사라진 고향의 맛 막걸리를 추억하다

2008. 4. 18. 06:18세상 사는 이야기

1960년과 1970년에 시골에 살아본 사람은 안다.그 시절 먹을 것이 얼마나 귀하고 힘든 시절이었는지를......물론 가정형편이나 지방에 따라서 달랐겠지만 내가 살던 마을은 초가집에 읍에서 비포장 도로로 한 시간을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마을 입구에는 동네에서 가장 큰 미루나무가 있었고 도로를 따라서 굵은 미루나무가 하늘거리곤했다.마을 사람들의 주업은 논일과 밭일이었는데 우리집은 과수원과 조농사 그리고 논농사 약간 지었다. 봄이면 농사일로 마을은 바쁘고 모내기가 한창인 5월에는 새참을 이고 논두렁 사이로 오가는 아주머니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린 나는 아주머니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모밥(새참)을 얻어먹곤 했는데 그때 먹는 밥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새참과 함께 꼭 따라오는 것이 막걸리였는데 처음에 난 그것이 미숫가루인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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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동네 짖꿋은 아저씨가 새참을 먹고 있는 나에게 막걸리를 주는 것이 아닌가...
"야 너도 미숫가루 먹어 볼테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는 못주겠고 맛만 봐라"
하면서 사발에 조금 따라준 막걸리를 단숨에 벌컥 들이켰는데...........
아 껄쭉한 것이 입안에서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데 목이 쌔한 것이 아닌가?
그 표정을 본 아저씨가 던진 말이
"왜 미숫가루 맛이 이상해?....요즘은 미숫가루 맛이 다 이렇단다 하하하......"
그 표정이 왜 그렇게 밉던지........이것이 난생 처음 내가 맛본 막걸리의 맛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다. 학교에서 미술시간에 밀주 금지 포스터를 그렸는데 운좋게도 내가 그린 포스터가
세무서장 상에 뽑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밀주가 무언지도 몰랐고 선생님의 설명만 듣고 그린 그림인데 최고상이라니 행운도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덕분에 선생님과 함께 읍내로 상을 받으러 가서 난생처음 자장면을 먹는 행운도 함께 누렸다.나중에 안일이지만 친구 아버지는 밀주를 몰래 담그다 세무소에 적발되어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엄청 멀었다.물론 2학년 말부터 버스가 다녔지만 1학년과 2학년 초에는 8킬로나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다.잘 사는 친구들은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갔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친구 자전거에 가방을 맡기고 맨발의 아베베처럼 열심히 뛰어야 했다.
학교에 지각하면 벌칙과 화장실 청소가 무서워서 그야말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등하교를 그렇게 뛰어 다녔으니 배고픈 것은 당연지사....도시락은 당연히 조밥에 김치 그리고 간혹 장아찌가 대부분이라서 금새 배가 꺼지곤 했는데 .....다행히(?)  학교 옆에는 양조장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 만든 막걸리가 읍내까지 배달하였는데 자전거에 항아리를 싣고 아슬아슬하게 타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하얀 한 말 통의 막걸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양조장은 학교에서 20여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하교길이면 구수한 누룩 냄새 때문에 늘 학생들의 표적이 되곤했었다.
양조장은 복이층으로 되었는데 얇은 양철로 된 옆면은  녹슬어 떨어진 곳으로 손만 디밀면 누룩이 잡히곤 했다.
그것을 안 양조장 주인은 그 구멍을 양철로 땜빵(?)을 해놓곤 했는데 그러면 나와 친구들은 다시 도둑고양이처럼 구멍을 내서 누룩을 훔쳐먹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모내기 철이면 봉사활동을 나가곤 했는데 3학년 때인가 교련 선생님이 힘들어 하는 우리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 허리가 무척 아프지?"
"허리 아픈데 약을 줄까?"
하시면서 막걸리를 한 사발씩 주시는 것이 아닌가
교련선생님도 예전에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약으로 주는 것이라 하셨는데....
아 정말 신기하게도 이것이 약발을 발휘했는지 그렇게 끊어질 듯 아팠던 허리가 금새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한 잔이니 얼굴만 벌개지고 기분이 좋아져 생각보다 빨리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동네 유일한 가게였던 월남상회에는 겨울철 꼬닥한 양미리가 구이가 제철이었다.
속초에서 반건조 상태로 올라온 것을 주렁주렁 매달아놓고 막걸리 잔 술과 함께 팔곤했는데 김치 안주에만 길들여진 막걸리 안주가 고기 안주로 바뀌어서 그런지 몇 잔만 기울여도 포만감이 오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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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상회 가게 안에는 막걸리 독을 묻어 놓았는데 휘휘 저어서 찌그러진 주전자에 퍼주는 막걸리맛......
입영전야의 친구들과도 막걸리 파티는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 였다.
술값이 모자르니 양동이 하나를 갖다놓고 샴페인에 소주에 막걸리를 섞어서 한 사발씩 먹으면 금새 얼굴에 취기가 확 오르곤 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급하게 제조한 싸구려 폭탄주였던 셈이다.
대학 다닐 때는 대부분 생맥주와 소주를 마셨는데 문학을 한답시고 우리는 시내에서 유일한 초가집에 앉아서 막걸리 파티를 벌이곤했다. 그때는 막걸리가 병에 담겨 나왔는데 잘못 흔들면 샴페인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도 했었다.특히 비오는 날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파전과 도토리묵과 함께 먹는 막걸리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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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친구녀석은 막걸리에 밥을 말아 김치와 함께 먹기도 했다.지금 생각해도 별난 친구였다.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이상하게도 막걸리를 멀리하게 되었는데...그건 아마도 소주와 맥주 그리고 양주의 소비가 늘면서 막걸리의 소비가 급격히 줄어 들었기 때문이었고 주변사람들이 소주와 맥주를 즐겨마시다 보니 점점 멀리하게 되었다. 그 여파였을까 전국의  양조장도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결혼하고 난 후 가끔 막걸리를 사 먹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더 이상  예전의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추억이 가미되지 않은 막걸리의 맛은 더 이상 고향의 맛이 아닌듯 했다.....아니면 변한 입맛에 막걸리가 등떠밀려가는 것은 아닌지.....
문득 고향생각을 할 때 마다 또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 기억 언저리를 구르는 찌그러진 주전자와 막걸리 한 사발............정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