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희의 낙동강 줄거리 읽기

2008. 2. 22. 16:06마음의 양식 독서

 

낙동강 7백 리 길이 길이 흐르는 물과 더불어 이곳 들판의 인간들은 살아왔다. 이른 겨울 어두운 밤, 낙동강 가에 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각종 사회단체에 속한 자들로서, ○○감옥의 미결수로 있다가 병이 위중해져 보석 출옥한 방성운을 인력거에 실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일행이 배에 오르자 병인은 뱃노래나 한마디 할 것을 부탁한다. 살아서 마지막으로 건너게 되는 지도 모를 이 강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로사가 박성운이 지은 노래를 부르자 다같이 합창하던 박성운은 팔을 강물에 넣어 물에 적셔 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였다. 해외에서 떠돈 다섯 해 동한 한 번도 낙동강을 잊은 적이 없고, 자신이 낙동강의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 낙동강은 곧 그에겐 조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낙동강에 대해 남다른 애착을 보이게끔 했던 것이다.

박상운은 원래 농부의 아들로 농업학교를 마친 후 군청 농업 조수로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 이에 참가하여 1년 반 동안 투옥된 이후 나와 보니 고향은 황폐해져 더 이상 눌러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더불어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많은 농사꾼 행렬에 섞여 서북간도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곳 역시 살기 어려워 이리저리 떠돌다가 아버지는 끝내 타향에서 죽고 그는 남북만주, 북경, 상해 등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다섯 해의 세월이 흐르고 모든 운동이 침체해 갈 무렵 그는 고국으로 발길을 돌리는데 그때는 이미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서울에서의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사회 운동 단체들의 파벌 의식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분연히 경상도로 내려와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남조선 일대를 망라한 사회 운동 단체를 만들어 정당한 운동에 힘쓴다. 그러나 고향은 너무도 많이 변해 버렸다. 중농은 소농으로 소농은 소작농으로 몰락했고 소작농들은 뿔뿔이 흩어져 정든 동무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대신 크나큰 함석지붕의 동척 창고만이 초가집을 위압하듯이 들어서 있었다. 그는 야학을 설치하여 농민 교양에 힘쓰는 한편 소작 조합을 만들어 지주와 동척의 횡포에 대항하였다. 어느 정도의 성공은 있었으나 동척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운동은 침체되었고 농민의 생존에 치명적인 일이 발생한다. 토지조사 사업 때 국유지로 편입되었던 낙동강 강가의 수만 평 갈밭이 일본인에게 불하되면서 갈을 베어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갈을 베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분개한 농민이 덮어놓고 갈을 베다가 갈밭을 지키던 사람과 시비가 붙어 사람까지 상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성운은 선동자로 붙들려 가 고문당한 끝에 급기야 병을 얻어 위중해지자 나오게 되었다.

한편 박성운의 애인 로사는 원래 백정의 딸로서 부모가 백정 신세를 면해 볼 양으로 딸을 교육시킨 덕분에 보통학교 여교사로 있었다. 방학을 맞이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형평사원과 장꾼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이에 박성운이 각 조직의 사람을 동원해 형평사원을 응원함으로써 그들은 가까워지게 되며 로사는 여성 동맹원으로 박성운에게 크게 영향받는다. 로사가 부모와 다툰 끝에 박성운에게 와 하소연하면 그는 ‘최하층에서 터져나오는 폭발탄과 같이’ 오든 것에 반항하여야 한다고 격려해 주곤 했다.

성운이 병든 몸으로 마을로 들어간 며칠 뒤 긴 행렬이 강언덕으로 뻗쳐 나왔는데 수많은 만장이 걸려 있었다. 박성운이 죽은 것이다.

이해 첫눈이 내리는 어느 날 아침 구포역을 떠나는 북행 열차 속에는 로사가 앉아 있었다. 애인이 밟던 길을 밟아 보려는 의도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