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 독서(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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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권하는 사회 /현진건
"아이야, 아야 "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 손가락 손톱 밑을 찔렸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櫻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 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血色)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낟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아물었으려니 하고 손을 떼면 또 얼마 아니..
2008.01.08 -
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화폭은 이 며칠 동안 조금도 메워지지 못한 채 넓게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돌아가 버린 화실은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이 소설을 쓴다는 기이한 일은, 달포 전 그의 칼 끝이 열살배기 소녀의 육신으로부터 그 영혼을 후벼내 버린 사건과 깊이 관계가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수술의 실패가 꼭 형의 실수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피해자 쪽이 그렇게 생각했고, 근 십 년 동안 구경만 해 오면서도 그쪽 일에 전혀 무지하지만은 않은 나의 생각이 그랬다. 형 자신도 그것은 시인했다. 소녀는 수술을 받지 않았어도 잠시 후에는 비슷한 길을 갔을 것 이고, 수술은 처음부터 절반도 성공의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건은 형에게서뿐 아니라 수술중엔 어느 병원에서나 일어날 ..
2008.01.08 -
김유정/ 봄봄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 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 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빙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알았다. 이태면 이태, 삼년이면 삼년, 기한..
2008.01.08 -
고교생이 읽어야할 소설 현진건/운수 좋은 날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이 날이야말로 동소문(東小門)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 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으로,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를 동광 학교(東光學敎)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째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치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 첨지는 십 전짜리 백동화 서 푼 또는 다섯 푼이 ‘찰각’ 하고 ..
2008.01.08 -
고교생이 읽어야할 소설 나도향의 물레방아
물레방아 / 나도향 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겻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 나온다. 솰솰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리쯤 꿰뚫은 두에 이 방원(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에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은 신치규(申治圭)라고 부른다. 이 방원이라는 사람은 그 집의 막실(幕室)살이를 하여가며 ..
2008.01.08 -
감자/김동인 =고교생이 읽어야할 소설
줄거리 몰락한 선비의 후예요, 비교적 엄한 가율의 농가의 딸로 자라난 복녀(福女)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극도의 가난에 처한 그녀는 15세의 어린 나이게 같은 동네에 사는 20년 연사의 홀아비에게 80원에 팔려서 시집을 가게 된다. 그러나 남편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더욱더 가난하게 되어 떠돌아다니던 그들은, 결국 죄악의 소굴인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의 주인이 된다. 거기서 복녀는 배고픔에 쫓겨 거지 행각을 하다가 무안만 당하고 돌아온다. 마침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들끓자 빈민 구제 사업이 벌어지고, 칠성문 밖 빈민굴 주민들이 송충이잡이 인부로 동원되었다. 그런데 복녀는 젊은 여인들 몇이 놀면서도 자기보다 더 많은 삯을 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어느 날 복..
2008.01.08 -
고교생이 읽어야할 소설 김동인의 붉은 산
줄거리 의사인 ‘여(余)’가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들른 ××촌에서 겪은 일이다. 조선 사람 소작인들만 사는, 비교적 평화스런 동네인 그 마을에 ‘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정익호가 들어온다. 출신도 고향도 알 수 없는 그는 생김새나 행동 모두가 지극히 불량하고 난폭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를 미워한다. 너무나 난잡한 패륜아여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내쫓고자 하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그저 암종 취급을 할 뿐이다. 그러던 중에 만주인 지주에게 소출을 바치러 갔던 송 첨지가 소출이 적다는 이유로 맞아 죽어서 나귀에 실려 온다. 마을 사람들은 분개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 이튿날, 사람들이 ‘여(余)’를 깨우기에 동구밖으로 나가보니 ‘삵’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데, 그가 혼자 만주인 지주에게 가서 항변하다가..
2008.01.08 -
(소설감상) 광염소나타 /김동인
광염 소나타 김동인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可能性) 뿐은 있다― 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찜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 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서,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2008.01.01 -
(소설감상) 날 개 /이상
날개 이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 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만 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 끔 되..
2008.01.01 -
(소설감상) 빈집 /신경숙
빈집 신경숙 스페인은 언제 가시우? 밤이 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을 흠뻑 맞아 눈사람이 되어 스튜디오 경비실을 막 지나려는 그를 보며, 아니 그의 어깨에 걸린 기타를 보며, 늙은 경비원이 습관처럼 물었다. 봄이 오면....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을 줄여 버리려는 참인데 스튜디오 뜰의 거위 우리의 꽉꽉 소리가 그의 소리를 잘라먹었다. 웬 뜰의 거위를? 그가 늙은 경비원이 거위를 기르고 있었던 걸 모르고 꽉꽉 거리는 소리에 짜증을 내며 물었을 때 경비원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엄한 표정을 지으며 벌떡 일어났었다. 집 지키는 덴 거위가 최고요. 나는 이때껏 거위만큼 집 잘 지키는 사나운 놈은 못 봤소. 나 어려서두 산골짝에 있는 내 집도 거위 두 마리만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서웠으니까. 그러니 ..
2008.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