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안 받는다고 119 부른 딸 왜?

2011. 12. 23. 11:19세상 사는 이야기

폭설이 내리면 기억나는 일

해마다 영동지역에는 폭설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올해도 벌써 한차례 폭설로 홍역을 치렀는데 지난 해 보다 더 많은 폭설이 예상되고 있어 걱정이 앞섭니다.
이곳에 살면서 폭설 때문에 겪은 일들이 정말 많은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설날 하루 전 고향 가던 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미시령 터널이 뚫리기 전이라 폭설이 내릴 때 마다 도로가 전면통제되어 진부령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도로인지 도랑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길에 처박힌 차도 있었고 진부령 고개를 넘지 못해 엉겨붙은 차들로 인해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습니다.
명절 때 부모님을 꼭 찾아뵈야 한다는 일념으로 당시 한 시간 반 정도면 가는 거리를 일곱시간 걸려서 도착했습니다.
돌아오는 명절 때 또 다시 그때처럼 폭설이 내린다면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19에 전화 건 딸 왜?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는 형님도 폭설 때문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몇년전 형수님이 암으로 돌아가시고 혼자 지내는 형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병원비와 두 딸 대학 졸업시키느라 마지막 남은 아파트를 팔고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간 영동지역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다음 날 서울에서 출근 준비를 하다 영동지역이 폭설로 마을이 고립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작은 딸이 혼자 계신 아빠 걱정에 전화를 걸었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사를 하면서 일반전화를 반납하고 휴대폰만 사용하던 아빠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연락할 방법이 없었던 딸들은 이리저리 궁리 끝에 119에 도움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 시각 형님은 월요일 약속한 경매 대리를 위해 새벽에 집을 나와 한 시간 넘게 걸어 시내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걷느라 휴대폰 밧데리가 나간 줄도 모른체 경매장에 들어섰고 두 시간 후 사무실에 도착한 후에서야 자신의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충전기에 전화기를 연결하고 휴대폰을 켜자 수없이 많은 전화가 와있었고 이어서 119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합니다.
"여보세요, 000씨 핸드폰 아닌가요?"
"예, 맞는데요..."
"여기는 119 구급대인데 폭설로 인한 연락두절로 사고 접수가 되어 수없이 연락드렸는데 괜찮으신건가요?"
"아니, 누가 사고 접수를?"
"아, 예 서울에 있는 따님이요.."
"아니 왜 신고를 했죠?..."
"사무실과 핸드폰으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락이 안돼 119에 도움을 요청했고 급히 집을 방문했는데 아무도 없어 걱정 많이 했습니다..아무 일 없는 거죠?"
"예....폭설 때문에 걷느라 고생은 했지만...정말 죄송하게 되었네요..."
"무사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사고 접수 종결하겠습니다...수고 하세요.."

괜히 바쁜 119 대원들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바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빠,,어떻게 된 거예요 무사하신 거죠?..."
울먹울먹하며 전화를 받는 딸의 목소리에 코끝이 찐해옴을 느꼈다고 합니다.
"응,,전화기 밧데리가 나간 줄도 모르고 있었네....미안하다..."
"충전기를 집에 갖다 놓거나 사무실 전화도 외출할 때는 휴대폰과 연결해서 쓰세요...오늘 처럼 필요할 때 연락이 안되면 얼마나 걱정이 되는 줄 아세요?"
그 후 휴대폰을 자주 들여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형님은 폭설이 내린 날은 먼저 딸들에게 전화를 건다고 합니다.
"여기 눈 엄청 왔다....그래도 걱정마라 아빠는 무사하다...."

한 해가 저무는 연말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지에게 안부 전화 한 통 넣어 주세요.
꽁꽁 얼어있던 힘들고 어렵던 마음이 사르르 녹을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