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때문에 몸서리치던 나의 음치 탈출기..

2010. 4. 16. 18:44세상 사는 이야기

종종 아내와 함께 노래방에 들리곤 한다.
요즘이야 노래를 부르는 것이 고작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이지만 대학시절에는 주점에서 통키타를 치며 아르바이트를 한적도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노래로 인정받고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사실 나는 음치였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내내 음치라는 소리를 듣곤했고 음악시간에 선생님에게 늘 혼이 나곤했다.
변성기가 지난 후에도 음정과 박자를 맞추지 못해 늘 노래 콤플렉스를 갖고 살았다.
당시 마을에는 친한 친구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는 노래를 너무나 잘 불렀고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는 리드보컬을 하기도 했었다. 그 친구 집에는 전자키타에서 드럼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집도 부유했지만 친구 형이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자연스럽게 친구도 따라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부러웠고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하는 것이 늘 부끄럽고 창피했다.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내게도 맨처음 기타가 생겼을 때가....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살던 고모네집은 부대 옆에서 작은 가게를 했었다.
그곳에는 대부분 군인들이 단골손님으로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 고모네 집에서 망가진 기타 하나를 발견했다.
고모네 집에 드나들던 군인이 제대하면서 망가진 기타를 놓아두고 간 것인데 집으로 가져온 나는 금이간 기타에 판자를 덧붙여 연습하기 시작했다.
음이 제대로 날리 없었지만 기타 코드를 잡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었다.
가족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 까지도 제지할 정도였으니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키타를 배우고 모르는 것은 친구를 통해 귀동냥을 하다 읍내 서점에서 책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끌기 시작한 가수가 조용필이었는데 그의 출세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즐겨부르던 노래였었다.
당시 조용필 노래 따라 부르기가 친구들 사이에 유행이었는데 노래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나는 늘 속으로만 웅얼거리기만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찮게 서점에서 구입한 대중가요 책중에 조용필 특집이 나온 것을 보게 되었다.

책 앞쪽에 조용필에 대한 기사와 함께 지금의 목소리를 갖기 위해 날마다 계란을 다섯 개씩 먹었다는 것과 소금물로 목을 축이며 발성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때 부터 맹목적인 조용필 따라하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집에서 닭을 키우던 때라 계란을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소금 역시 장독대 항아리에 가득했다.
아침마다 계란을 먹고 소금물로 목을 축이고 동네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에 올라 조용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서투른 기타로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가관이었겠냐만은 그래도 내 자신은 너무나 절박하고 진지했다.
판소리 하는 사람들이 목청을 틔우기 위해 폭포 아래에서 연습하듯 날마다 연습을 되풀이 했다.
목이 칼칼해지고 나중에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을 느끼고 목에서 피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점차 목으로만 부르던 노래가 배와 가슴으로 부르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다.
곡을 아예 외우고 음정과 박자는 수도 없이 반복 학습을 한 덕분에 스스로 만족할 정도가 되었다.
노래에 자신감이 생기자 레파토리도 다양해지고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 즐거워졌다.

                                                  ( 돌아가신 어머니가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기타......)

대학 4년 동안 학과에 행사가 있을 때면 나가서 단독으로 통기타를 치며 솜씨를 뽐내곤 했는데 그때 가장 즐겨부르던 레파토리가 홍삼 트리오의 '기도' 김학래의 '슬픔의 심로' 사월과 오월의 '화' 이범용 한명훈의 '꿈의 대화'였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 노래는 잘 부르는데 남과 같이 부를 때 화음을 넣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도 화음을 잘 맞추는 사람을 볼 때 마다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곤 한다.
지금도 고향에는 청춘의 표상 같던 기타가 남아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창고에 보관했던 것인데 그것을 볼 때 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음치든 박치든 노력해서 안되는 일은 없다....누구든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