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웃음 때문에 죽을 뻔한 장순손 왜?
2010. 3. 8. 14:09ㆍ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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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선시대 도망친 노비를 쫓는 노비 사냥꾼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추노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드라마를 보며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소재라서 궁금증이 많이 생겼는데 며칠 전 부터 집에 쌓여있던 역사책을 가까이 하고 있다.
20권으로 되어있는 이현희 저 '한국의 역사' 중 17권 '양반과 민중의 갈등'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대목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수가 극히 적었고 상대적으로 천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성종 15년(1484) 전체 인구가 300만명 내외였는데 그중 공천노비와 사노비를 모두 합쳐 100만원을 넘었다고 하니 인구의 3분의 1이 노비였던 셈이었다.
노비가 줄지않고 계속 늘어난 것은 당시에 어머니를 따르는 천자 종모법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비 외에 창기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는데 그중 기생의 웃음 때문에 죽을 뻔한 학자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안동 장씨로써 중종 때 조광조와 김안로의 세력 다툼에 김안로의 편을 들어 후에 영의정이 되었던 장순손(張順孫)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글도 잘하고 재능이 뛰어난 문사였지만 얼굴이 아주 못생겼다고 한다. 마치 생긴 것이 돼지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장저두(張猪頭)였다고 한다.
어릴 적 부터 놀림을 받아서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살던 장순손은 하마터면 기생의 웃음 때문에 죽을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연산군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일은 뒷전이고 날마다 기생들과 어울려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종묘에서 제사를 마치고 제사상에 올랐던 돼지 머리가 쟁반에 담겨 연산군의 잔칫상 위에 올라왔는데
갑자기 돼지머리를 본 기생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주에서 올라온 이 기생은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를 본 연산군이 갑자기 웃는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기생은 고향에서 보았던 돼지머리 닮은 사람이 생각나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연산군은 자신의 앞에서 다른 남자를 생각한 것을 보면 필시 애인이 분명할 것이라며 잡아다 사형을 시키겠다며 체포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금부도사에 잡혀 가게된 장순손은 함창의 공험지에 이르렀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문득 왼쪽 길로 가면 목숨을 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부도사에게 청을 했다.
“저기 금부도사 방금 고양이가 가는 길이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오, 예전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 고양이를 보면 좋은 일이 생겼는데 고양이를 따라 저 길로 가게 해주오.”
금부도사는 곧 죽을 죄인인데 그 정도 청이야 들어 줄 수도 있다고 여겨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장순손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기생의 애인일 것이라 확신한 성미 급한 연산군은 장순손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장순손을 서울까지 데려올 필요 없으니 선전관을 내려 보내 중간에 목만 베어 오라고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선전관이 말을 달려 큰길로 내려오는 사이 금부도사에 압송되던 장순손은 왼쪽 길로 들어서 서로 길이 어긋나 버렸다.
그런데 그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금부도사와 장순손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 성희안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내고 조카인 중종을 임금으로 세웠다는 소식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장순손은 그후 삼남지방의 순찰사를 거쳐 이조참판·형조판서·우참찬·호조판서·병조판서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과 등을 지고, 김안로와 함께 선비들을 축출하려 하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광조가 축출되고 중종과 사돈을 맺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으니, 이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33년 중종28년 5월, 73세로 영의정에 올랐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며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소재라서 궁금증이 많이 생겼는데 며칠 전 부터 집에 쌓여있던 역사책을 가까이 하고 있다.
20권으로 되어있는 이현희 저 '한국의 역사' 중 17권 '양반과 민중의 갈등'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흥미로운 대목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수가 극히 적었고 상대적으로 천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성종 15년(1484) 전체 인구가 300만명 내외였는데 그중 공천노비와 사노비를 모두 합쳐 100만원을 넘었다고 하니 인구의 3분의 1이 노비였던 셈이었다.
노비가 줄지않고 계속 늘어난 것은 당시에 어머니를 따르는 천자 종모법을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비 외에 창기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는데 그중 기생의 웃음 때문에 죽을 뻔한 학자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안동 장씨로써 중종 때 조광조와 김안로의 세력 다툼에 김안로의 편을 들어 후에 영의정이 되었던 장순손(張順孫)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글도 잘하고 재능이 뛰어난 문사였지만 얼굴이 아주 못생겼다고 한다. 마치 생긴 것이 돼지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장저두(張猪頭)였다고 한다.
어릴 적 부터 놀림을 받아서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살던 장순손은 하마터면 기생의 웃음 때문에 죽을 뻔한 일화가 있다.
당시 연산군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일은 뒷전이고 날마다 기생들과 어울려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어느 날 종묘에서 제사를 마치고 제사상에 올랐던 돼지 머리가 쟁반에 담겨 연산군의 잔칫상 위에 올라왔는데
갑자기 돼지머리를 본 기생 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주에서 올라온 이 기생은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이를 본 연산군이 갑자기 웃는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기생은 고향에서 보았던 돼지머리 닮은 사람이 생각나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연산군은 자신의 앞에서 다른 남자를 생각한 것을 보면 필시 애인이 분명할 것이라며 잡아다 사형을 시키겠다며 체포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영문도 모른 채 금부도사에 잡혀 가게된 장순손은 함창의 공험지에 이르렀을 때 고양이 한 마리가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가는 것을 보고 문득 왼쪽 길로 가면 목숨을 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부도사에게 청을 했다.
“저기 금부도사 방금 고양이가 가는 길이 서울로 가는 지름길이오, 예전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 고양이를 보면 좋은 일이 생겼는데 고양이를 따라 저 길로 가게 해주오.”
금부도사는 곧 죽을 죄인인데 그 정도 청이야 들어 줄 수도 있다고 여겨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장순손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기생의 애인일 것이라 확신한 성미 급한 연산군은 장순손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장순손을 서울까지 데려올 필요 없으니 선전관을 내려 보내 중간에 목만 베어 오라고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선전관이 말을 달려 큰길로 내려오는 사이 금부도사에 압송되던 장순손은 왼쪽 길로 들어서 서로 길이 어긋나 버렸다.
그런데 그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금부도사와 장순손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 성희안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쫓아내고 조카인 중종을 임금으로 세웠다는 소식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장순손은 그후 삼남지방의 순찰사를 거쳐 이조참판·형조판서·우참찬·호조판서·병조판서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조광조 등 신진사림들과 등을 지고, 김안로와 함께 선비들을 축출하려 하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광조가 축출되고 중종과 사돈을 맺은 김안로가 다시 권력을 잡으니, 이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33년 중종28년 5월, 73세로 영의정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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