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가스로 죽을 뻔한 자취방 알고 봤더니...
2009. 11. 24. 09:43ㆍ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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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수능에 대입에 온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지난해 큰 아들이 수능을 보면서 큰 홍역을 치루었을 때 정말 난감했었다.
이제 내년이면 또 작은 녀석이 수능을 보게 된다.
학원도 다니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뻥뻥대는 녀석을 보면 대견하면서도 늘 걱정이 앞서곤 한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큰 아들은 고등학교 때도 늘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올초 이삿짐을 옮겨주려고 가본 기숙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좁은데다 어두워서 불을 켜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27년전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나는 야간대학이라도 다녀볼 요량으로 농사를 짓는 틈틈히 공부를 했다.
재수를 하는 친구중에는 서울의 유명 학원을 다니던 친구도 있었고 읍내에 학원을 다니며 대학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 형님을 대신해 농사일은 도맡아 하면서 주경야독하며 다음해 아버지 몰래 야간 대학에 입시원서를 냈다.
당시에 담배농사를 크게 짓고 있었는데 담배를 따며 영어 단어와 숙어를 외우던 생각이 지금도 나곤한다.
담뱃잎은 마치 꿀처럼 찐득찐득해 일을 마칠 즈음에는 마치 전신에 꿀을 바른듯 끈적끈적해졌다.
그리고 그해 합격증을 받고 아버지 앞에 내밀었을 때 아버지는 몇날 밤을 잠을 못이루시는 듯했다.
"첫 등록금만 대주시면 제가 벌어서 다니겠습니다"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내고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는 대학 인근에 있는 자취방을 구해 주고 입학기념으로 정장을 한 벌 사주셨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당시에 구한 자취방은 도배와 장판을 새로 깔아 외양상 깔끔해보였다.
겨울이라 먼저 냉기가 도는 방안에 연탄불을 지피고 밥솥과 냄비등 자취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인근 대학에 다니던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한터라 땀을 흘리며 청소를 하고난 후 허기진 배를 라면으로 떼웠다.
땀을 흘리고 일한 터라 라면 맛이 꿀맛이었는데 방이 뜨끈뜨끈해지자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한참 후 눈을 뜬 곳은 바로 병원이었다.
당시 자취방은 약속을 했던 친구가 구해주었던 방이었는데 그날 약속 장소에 나갔다 내가 없자 자취방을 찾아 왔다고 한다.
그런데 문을 열자 방안 가득 연탄가스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방안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된 이야기 였지만 내가 구했던 자취방은 소를 키우던 우사였는데 자취생을 받기 위해 방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방을 꾸미고 난 후 처음 들어온 학생이 나였고 연탄을 피우고 잠이 든 사이 장판 아래로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친구가 들어와 장판을 걷어 보니 아직 덜마른 시멘트 사이로 흰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주인이 다시 고쳐준다고 했지만 한 번 연탄가스에 중독된 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버스를 두번 갈아 타야 되는 친구의 자취방으로 짐을 옮겼다.
다행히 얼마되지 않아 식당의 아르바이트 일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식당의 골방에서 기거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당시 한달 자취방세가 2만원이었고 등록금도 40만원 조금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올 아들의 등록금 500만원이 넘었다.
아들의 등록금을 준비하면서 27년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입학도 하지 못하고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 했던 그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하다.
지난해 큰 아들이 수능을 보면서 큰 홍역을 치루었을 때 정말 난감했었다.
이제 내년이면 또 작은 녀석이 수능을 보게 된다.
학원도 다니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뻥뻥대는 녀석을 보면 대견하면서도 늘 걱정이 앞서곤 한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큰 아들은 고등학교 때도 늘 기숙사 생활을 했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올초 이삿짐을 옮겨주려고 가본 기숙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좁은데다 어두워서 불을 켜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27년전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않았던 나는 야간대학이라도 다녀볼 요량으로 농사를 짓는 틈틈히 공부를 했다.
재수를 하는 친구중에는 서울의 유명 학원을 다니던 친구도 있었고 읍내에 학원을 다니며 대학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 형님을 대신해 농사일은 도맡아 하면서 주경야독하며 다음해 아버지 몰래 야간 대학에 입시원서를 냈다.
당시에 담배농사를 크게 짓고 있었는데 담배를 따며 영어 단어와 숙어를 외우던 생각이 지금도 나곤한다.
담뱃잎은 마치 꿀처럼 찐득찐득해 일을 마칠 즈음에는 마치 전신에 꿀을 바른듯 끈적끈적해졌다.
그리고 그해 합격증을 받고 아버지 앞에 내밀었을 때 아버지는 몇날 밤을 잠을 못이루시는 듯했다.
"첫 등록금만 대주시면 제가 벌어서 다니겠습니다"
아들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내고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는 대학 인근에 있는 자취방을 구해 주고 입학기념으로 정장을 한 벌 사주셨고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문경 석탄박물관: 연탄 by Jinho.Jung |
당시에 구한 자취방은 도배와 장판을 새로 깔아 외양상 깔끔해보였다.
겨울이라 먼저 냉기가 도는 방안에 연탄불을 지피고 밥솥과 냄비등 자취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녁에 인근 대학에 다니던 친구와 만날 약속을 한터라 땀을 흘리며 청소를 하고난 후 허기진 배를 라면으로 떼웠다.
땀을 흘리고 일한 터라 라면 맛이 꿀맛이었는데 방이 뜨끈뜨끈해지자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한참 후 눈을 뜬 곳은 바로 병원이었다.
당시 자취방은 약속을 했던 친구가 구해주었던 방이었는데 그날 약속 장소에 나갔다 내가 없자 자취방을 찾아 왔다고 한다.
그런데 문을 열자 방안 가득 연탄가스 냄새가 진동을 했고 방안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된 이야기 였지만 내가 구했던 자취방은 소를 키우던 우사였는데 자취생을 받기 위해 방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방을 꾸미고 난 후 처음 들어온 학생이 나였고 연탄을 피우고 잠이 든 사이 장판 아래로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친구가 들어와 장판을 걷어 보니 아직 덜마른 시멘트 사이로 흰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고 한다.
주인이 다시 고쳐준다고 했지만 한 번 연탄가스에 중독된 곳에 다시 가고 싶지 않아 버스를 두번 갈아 타야 되는 친구의 자취방으로 짐을 옮겼다.
다행히 얼마되지 않아 식당의 아르바이트 일을 얻을 수 있었고 그 식당의 골방에서 기거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당시 한달 자취방세가 2만원이었고 등록금도 40만원 조금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올 아들의 등록금 500만원이 넘었다.
아들의 등록금을 준비하면서 27년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
입학도 하지 못하고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뻔 했던 그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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