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아버지의 휴대폰 적응기

2009. 5. 4. 17:10세상 사는 이야기

요즘은 아버지가 외출을 하셔도 늘 전화로 통화할 수 있어 마음이 편안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3년전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하루하루 수척해지는 아버지를 뵐 때 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이 깊어가는 아버지에게 자주 찾아 뵙는 것 이외에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형님을 제외하고 삼형제가 객지에 나가 살다보니 마음처럼 자주 찾아 뵙지 못해 늘 송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 형제들끼리 자주 전화를 드리기 위해 휴대폰을 사드린다고 해도 아버지는 극구 사양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작년 여름에 정말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밭에 나가 일을 하는데 동네 사람이 약주 한 잔 하라며 과일주를 한잔 건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맥주잔에 가득 따른 술한잔을 비우고 뙤약볕에 일하다 그만 쓰러지셨다고 합니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쓰러진 아버지는 누군가에 도움을 청하려고 해도 일어설 수 없어서 소리만 질렀다고 합니다. 다행히 동네 형님에 눈에 띄어 급히 병원에 갈 수 있어 화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는 아버지가 워낙 연로한 분이시라 조금만 더 지체했으면 큰일날뻔 했다며 며칠 입원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모인 형제들은 아버지가 휴대폰만 갖고 계셨어도 이렇게 위급한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거라며 휴대폰을 꼭 갖고 다니시라며 핸드폰을 구입해 드렸습니다. 단축키를 설정해서 1번은 형님, 2번은 나,3번과 4번은 셋째와 넷째 그리고 5,6,7,8 순서대로 번호를 입력해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험삼아 단축키 1번을 길게 눌러서 형님과 통화도 해보고 또 둘째인 나와도 통화를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면 이상하게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형님께 왜 아버지의 휴대폰이 늘 불통이냐고 물으니 저녁에 충전하는 것을 늘 잊고 또 폴더가 아닌 슬라이드식이라서 사용하기가 너무나 불편해 갖고 다니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갖고 계신 휴대폰은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슬라이드식이었는데 정작 아버지는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다고 하셨습니다. 한손으로 올리려고 해도 잘 올라가지 않고 두 손으로 올리고 통화를 하려고 해도 불편하기는 매 한가지고 잘 들리지 않고 귀찮아서 갖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에 걸려오는 전화가 고작 두 세통 밖에 안되다 보니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쓰고 있는 폴더형 휴대폰으로 바꿔 드리려고 했더니 너무 얇아서 사용하기 불편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예전에 내가 쓰던 구형 휴대폰을 보여 드렸더니 마음에 쏙 들어 하셨습니다. 휴대폰도 마음에 들었지만 더 마음에 드신 것은 아마도 핸드폰 줄이었던 같습니다.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불편하셨고 예전에 목에 걸던 줄은 너무 얇아 목을 조이는 느낌이 들어 싫었는데 이것은 마음에 쏙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주와 손녀가 자주 전화를 걸고 형제들이 일부러 휴대폰으로 전화를 자주 하다보니 이제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목에 걸고 다니시곤 합니다.지난 달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에도 아버지가 직접 전화를 해 병문안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가장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고 또 자식이나 손주 손녀들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는 쉽게 단축키를 누르면 되니 휴대폰이 정말 편하다는 팔순 아버지......처음에는 낯설었던 휴대폰이 이제는 어디서든 휴대폰으로 자식들과 손주 손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힘이 솟고 외로움도 덜해진 듯합니다.
어제는 경로당에서 여행을 떠나셨다며 관광버스 안에서 전화를 하신 아버지.....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기분이 어떠신지 금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어버이날 전날 찾아뵙겠노라는 말씀에 안와도 된다 하시며 "그런데 지난 번 막국수집 편육 정말 맛있었다" 하시며 웃으시는 아버지....... 아버지의 힘찬 목소리를 들으니 하루종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