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문 축산인 꿈을 접은 한우 아빠

2008. 11. 4. 07:28세상 사는 이야기

친구가 마침내 평생 일궈오던 한우사육을 포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축산업에 뛰어든 친구는 오로지 한 길만 걸어온 전업축산인이었고 나름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남들이 공무원으로 대학으로 진학할 때에도 축산업으로 성공해보겠다며 당차게 말하던 친구....
아주 작은 체구라 별명이 땅꼬마라 불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소신만큼은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친구라서 무엇인든 잘 할 것이라 믿었고 한우 두 마리로 시작한 축산업은 10년 뒤에 100여 마리로 늘어났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영농후계자로 선정되어 탄탄한 입지를 확보했다.
지역에서 한우사육에 관한한 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해박했고 수입쇠고기를 대비해 지역 한우의 브랜드화에도 힘썼다.
덕분에 한우 품평회에 나가 전국 최고의 품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전문 축산인으로 매사 빈틈이 없는 친구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IMF로 자금압박이 심해지고 사료값의 인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사육두수를 줄이는 고육지책 끝에 무사히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이어온 전문축산업이 벌써 내년이면 30년으로 접어드는데 안타깝게도 한우사육을 접업다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은 한우값의 폭락과 공동출자해 법인으로 시작한 브랜드 한우전문점의 실패였다고 한다.
어려운 한우농가들이 안정적인 판로와 한우수급을 위해 다섯 명이서 5천만원씩 투자해서 한우전문점을 직영으로 운영했지만 출자한 사람들과의 의견차이와 운영적자로 7개월만에 큰 손실을 입고 접업다고 한다.
인구 8만도 안되는 군소 지역에서 한우전문점으로 성공하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크고 수입쇠고기 여파로 급격히 매출이 줄었다고 했다.한미 FTA와 수입쇠고기 파동을 겪으면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원형탈모에 울화병까지 생겼다는 친구는 마지막 남았던 50여 마리의 한우를 모두 처분하고 마침내 축산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사육두수를 늘이면 늘일 수록 적자가 커지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제는 다른 대안을 찾아 잠시 쉬어야겠다며 웃던 친구.......
아이를 사고로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지켜오던 한우사육을 접었다는 것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려울 때 자신만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힘들다는 속 깊은 친구....친구들로 부터 한우 아빠라고 불리던 그의 선택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