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고자로 3일간 영안실에 방치된 천재화가 이중섭
2008. 6. 17. 12:08ㆍ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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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을 사람들은 천재화가 또는 국민화가라고 부른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고 그 그림에 대단한 자부심과 찬사를 보내곤 한다.
그렇지만 화가 이중섭의 말년이 얼마나 불우했는가 안다면 가슴 한 켠이 무너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중섭은 짧은 생애동안 치열하게 몸부림 쳤지만 결국 불혹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숨을 거둔다.그때가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이었는데 적십자 병원 영안실 흑판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고 한다.
1956년 9월6일 오전 11시45분 간장염으로 입원 가료 중 사망. 이중섭 < 40세>
숨을 거둔 후에 이중섭의 주검은 무연고자로 3일동안 영안실에 방치되었는데 그가 누운 병원 시트에는
그동안 밀린 병원비 계산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거식증과 우울증 그리고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년의 그의 생은 우울한 잿빛 그 자체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예감한 듯 식사도 거부하고 수혈과 링거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신병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자신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화상을 그려 조카인 영진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나더라 정신병자라고 하길래 내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사진처럼 그렸다,영민아,넌 나를 정신병자라고 믿지 않지? 그렇지?"
이말에 조카 영진은 목이 메여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림출처: 이중섭 사이버 갤러리http://svr.seogwipo.go.kr/miniBBS/JSLee/default.htm>
이중섭이 몸은 망신창이가 되어도 그의 예술혼은 꼿꼿하여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팔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소설가 최태응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린 중섭의 황소그림을 미문화원장이며 미술 비평가였던 맥타가트에게 전시회를 주선해달라고 했을 때 중섭의 그림을 보고 스페인 투우같다고 하자
"내 그림의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니라 일하며 고생하는 한국의 순한 소란 말입니다."
라며 벌떡 일어서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맥타가트가 중섭의 소그림을 사려고 하자 맥타가트에게는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그림출처: 이중섭 사이버갤러리 http://svr.seogwipo.go.kr/miniBBS/JSLee/default.htm>
이에 맥타가트는 최태응으로 부터 은지화 세 점과 그림 두 점을 사 뉴욕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이중섭이 죽기 전해인 1955년 여름 중섭의 은종이 그림 세 점이 현대적인 재료의 개발과 독특한 기법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해 뉴욕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 내 그림이 비행기 탔겠네 "
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 둘을 보고 싶어하는 짙은 그리움이 배어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내가 일본으로 간 후 단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죽고 난 후 3일만에 친구인 김병기에 의해 발견된 이중섭은 절친한 친구였던 구상시인과 조카 영진과 이광석 등 많은 예술가들이 모인 가운데 9월 9일 예술인 상으로 치루어졌다.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에 살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다.
아무도 찾지 않은 병실에서 혼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나며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세상에 태어나 한때는 불꽃같은 삶을 살아보리라는 열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이루지 못한 꿈이 아프고 서러워 발버둥치기도 했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허상이란 것을 이제 알겠다. 다만 한 여인을 만났고 그녀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나의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진실로 살아 있을 것을 나는 믿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속에 그가 살다간 고뇌와 그리움과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마지막 임종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이에 화장터에서 쓴 친구 박고석의 편지는 언제나 가슴 미어지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의 그림을 보았을 것이고 그 그림에 대단한 자부심과 찬사를 보내곤 한다.
그렇지만 화가 이중섭의 말년이 얼마나 불우했는가 안다면 가슴 한 켠이 무너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이중섭은 짧은 생애동안 치열하게 몸부림 쳤지만 결국 불혹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숨을 거둔다.그때가 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이었는데 적십자 병원 영안실 흑판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고 한다.
1956년 9월6일 오전 11시45분 간장염으로 입원 가료 중 사망. 이중섭 < 40세>
숨을 거둔 후에 이중섭의 주검은 무연고자로 3일동안 영안실에 방치되었는데 그가 누운 병원 시트에는
그동안 밀린 병원비 계산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거식증과 우울증 그리고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년의 그의 생은 우울한 잿빛 그 자체였는데 스스로 죽음을 예감한 듯 식사도 거부하고 수혈과 링거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신병자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자신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자화상을 그려 조카인 영진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나더라 정신병자라고 하길래 내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사진처럼 그렸다,영민아,넌 나를 정신병자라고 믿지 않지? 그렇지?"
이말에 조카 영진은 목이 메여 대답할 수 없었다고 한다.
종이에 연필, 48.5×31cm, 1955년 |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됨으로써 또 다른 면모를 알 수 있다. |
이중섭이 몸은 망신창이가 되어도 그의 예술혼은 꼿꼿하여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팔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소설가 최태응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그린 중섭의 황소그림을 미문화원장이며 미술 비평가였던 맥타가트에게 전시회를 주선해달라고 했을 때 중섭의 그림을 보고 스페인 투우같다고 하자
"내 그림의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니라 일하며 고생하는 한국의 순한 소란 말입니다."
라며 벌떡 일어서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맥타가트가 중섭의 소그림을 사려고 하자 맥타가트에게는 팔지 않겠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종이에 유채, 32.3×49.5cm, 1953년 무렵 |
소는 고개를 들면서 외치는 듯하다.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는 듯하다. 외침이 들리 듯한 느낌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의 얼굴과 목 주위를 유달리 주름지게 한 것으로 보인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평원군은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런 감회를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소'> |
" 내 그림이 비행기 탔겠네 "
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 둘을 보고 싶어하는 짙은 그리움이 배어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내가 일본으로 간 후 단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죽고 난 후 3일만에 친구인 김병기에 의해 발견된 이중섭은 절친한 친구였던 구상시인과 조카 영진과 이광석 등 많은 예술가들이 모인 가운데 9월 9일 예술인 상으로 치루어졌다.화장된 뼈의 일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른 일부는 일본에 살던 부인에게 전해져 그 집 뜰에 모셔졌다.
아무도 찾지 않은 병실에서 혼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나며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세상에 태어나 한때는 불꽃같은 삶을 살아보리라는 열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이루지 못한 꿈이 아프고 서러워 발버둥치기도 했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허상이란 것을 이제 알겠다. 다만 한 여인을 만났고 그녀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나의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진실로 살아 있을 것을 나는 믿는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속에 그가 살다간 고뇌와 그리움과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마지막 임종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픔이 북받쳐 오른다.
이에 화장터에서 쓴 친구 박고석의 편지는 언제나 가슴 미어지게 한다.
제 아이 자식들마저 제 손으로 먹여 살리질 못해 처가(일본)로 보내고
그저 그리움에 안타까워만 하던 꼴이 밉살머리스러워서인가?
중섭형, 자네같이 못난 놈은 없을 걸세. 그 좋은 재간 그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보를 갖고
그래 사나이자식이 더 살아 배길 수가 없었단 말인가.
나같이 흉측한 놈이 이렇듯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이러 저러 살아나갈 수 있는
반성과 용기를 또 누구에게 의존해야 한단 말이냐.
내가 듣고 보아 아는 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사람으로 나는 형을 우러러 사모해 왔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일(작품)을 한 화가를 치면 형을 엄지손가락에 꼽는
우리들의 심정만이라도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내나 또한 형을 아끼고 숭모하는 친구들은 젖혀놓고라도
형 처나 아이자식들의 안타까이 그리워하는 숙원은 어떻게 되느냐 말이다.
임종이 외롭다기보다 살림살이가 고달프다기보다 세상사람들이 야속하다기보다
자네는 자네만 아름답게 살았고 좋은 그림을 남기고 가면 그만이라는
그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난것인가?
너만이 착하고 아름답고 너만이 좋은 그림을 그린 것이 우리들에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너같이 너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놈은 죽어야 마땅해.
《서울신문》1956.9.16일자 <박 고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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