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양식 독서'에 해당하는 글 259건





 

나는 성묘를 위해 근년 들어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찾아든 고향은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나는 비애감에 젖는다. 그 중에서도 맨 먼저 가슴을 후려친 것은 왕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사실이었다.

왕소나무가 서 있던 거리엔 외양간만 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만이 꼴불견으로 뻗질러 서 있던 것이다. 또한 내가 살았던 옛집의 추레한 주제꼴은 한결 더 가슴이 미어지는 비감을 더해 주면서, 내가 어느덧 실향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게 한다.

 

  나는 먼저 할아버지 산소부터 성묘를 한다. 할아버지의 산소를 찾은 나는 순간적으로 지팡이에 굽은 허리를 의지한 할아버지가 당신의 헛묘(가분묘)를 굽어보고 서 있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팔순의 고령이셨다. 인생에서 은퇴하다시피 왕조의 유민으로 은둔자적하던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복고주의적 향수를 버리지 못했는데, 내게 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그런 향수를 못 이긴 자위책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천자문을 떼자마자 내 하루의 일과를 짜놓고 그 일과표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도록 했다.

내가 할 일은 새벽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사랑에 나가 할아버지께 문안을 드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놋요강과 놋타구를 가시는 일도 해야 했다. 할아버지가 배운 것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오랫동안 이웃해 살았던 낯익은 사람들이 여럿 남아 있음을 떠올리고 그네들을 방문할까 하지만, 그네들을 방문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깨닫고 망설인다. 마을을 아주 떠나던 날까지도 일가 손윗사람 아닌 이에게는 무슨 경어나 존칭을 써 본 적이 없던 나였다.

할아버지의 지시였고, 곁에서 배운 버릇이었다. 안팎 동네 사람의 거지반이 행랑이나 아전붙이었으므로 하대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지론이요 고집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안팎 삼 동네를 다 뒤져도 친구랄 만한 친구랄 게 있을 수 없었던 고적한 소년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가급적이면 알 만한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마을을 돌지 않기로 작정한다.

 

  봉건적 세계 속에 살고 있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고색창연한 할아버지의 가훈을 깨뜨리고, 전혀 반대 방향의 풍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할아버지의 전근대적인 가풍에 반발하기 위해서 싹튼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아버지의 길은 당신 스스로 선택한 것일 뿐이었다. 내가 태어나기 수삼 년 전만 해도 몇 척의 어선을 가진 선주였던 아버지는 광복을 전후해서 종래 회고조의 가풍이나 실속 없는 사상을 스스로 뒤집어엎는 데에 서슴지 않았다.

 

사농공상의 서열을 망국적 퇴폐풍조로 지적했고 '무산계급의 옹호와 서민 대중의 사회적인 위치를 쟁취한다.'는 구호와 함께 그것의 실천을 앞장서서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변형되어 남로당과 합세했던 것은 그로부터 다시 많은 시일이 흐른 뒤의 일이었지만, 그 결과로 집안은 완전히 쑥밭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할아버지에게서 와는 달리 한없는 거리감과 두려움만을 가졌었다.

 툭하면 경찰서에 불려가고 연행돼 가던 신분이었음에도 언제나 의기왕성하며 투지만만한 아버지를 보며 나는 외경스러움과 동시에 무정한 거리감, 아니 차라리 공포감을 느꼈었던 것이다.

 

  변변한 친구도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는 나에게 옹점이는 잊지 못할 친구 역할을 해 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친정에 갔다가 허드레 심부름이나 시킬 요량으로 데려온 아이었다. 옹점이는 마음이 착하고 어른 앞에서는 소견이 넓었으며, 아이들에게는 남달리 인정이 많았다. 또한 그릇을 잘 깨는 덜렁쇠였고, 참새 못잖은 수다쟁이이기도 했다.

  나는 읍내로 나가는 과수원 탱자나무 울타리 곱은 탱이를 돌 어름, 잠시 발걸음을 멈춰 다시 한 번 옛집을 돌아다보았다. 이어 칠성 바위 앞으로 눈을 보냈는데, 정작 기대했던 그 할아버지의 환상은 얼핏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의 넋만은 벌써 남의 땅이 되어 버린 칠성 바위 언저리에 아직도 묵고 있을 것만 같았음은 웬 까닭이었는지 몰랐다. 다시 한 번 옛집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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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입석부근”으로 등단. 70년대 초반, “객지”, “삼포 가는 길”, “돼지꿈”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산업 사회의 민중 현실을 체험의 언어로 형상화해 낸 황석영의 등장은 곧 70년대 민중 문학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가 작품으로 보여준 민중 현실은 그 속에서 시대의 모순이 첨예하게 녹아 있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그의 문학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울로서 리얼리즘 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리얼리즘은 민중 현실을 그릴 때에도 어떤 도식에 빠지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본적 결핍에 시선을 드리움으로써 삶의 비극적 서정을 놓치지 않았다.

 

민중사의 거대한 흐름을 현재적 문제 의식에서 찾아 들어간 기념비적 대작 “장길산”을 비롯, 월남전의 본질을 해부한 “무기의 그늘”까지 그의 문학은 여전히 현실과의 지난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간척지 공사장을 배경으로 열악한 노동 현실을 개선하려는 부랑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을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객지”의 문화적 성과는 산업 사회로 진입한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용기 있게 적발해 냄으로써 70년대 민중문학의 획을 그었다.

 

 “장길산”(1974-1984)은 조선조 숙종 연간에 황해도 구월산을 본거지로 활약한 의적패의 이야기를 축으로 해서 당시의 사회상을 민중사적 시각으로 그린 소설이다. 의적 소설이라는 점에서 “홍길동전”, “임꺽정”의 계보에 속하나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 역사를 빌린, 당대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발언으로 읽힌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동화적 은유로 잡아낸 현실을 “장길산”은 역사적 은유로 포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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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용묵의 단편소설 중에 '백치 아다다'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은 1935년에 발표한 것으로 백치이자 벙어리인 ‘아다다’란 인물을 통해 물질사회의 불합리를 지적한 것으로 백치라는 육체적 조건과 돈의 횡포로 인해 비극적 생을 마쳐야 했던 한 여성의 아픔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아다다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돈으로 인해 어떻게 타락하는지 보여준 작품이다.
그런데 백치 아다다를 읽을 때마다 이런 궁금증이 생기곤 했다.소설 작품 속 백치로 나오는 아다다는 IQ가 얼마나 될까?
여기에 대한 근거를 찾다 우연히 17년전 교사실무수첩에 나온 내용에 백치에 대한 IQ가 나오는 것을 찾았다.
교사실무수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다다의 IQ는 25 이하라고 보아야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1년 새한신문사에서 발행된 교사실무수첩....교사가 학생들의 학습을 지도할 때와 행동과 교수법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교사실무수첩 56p와 57p에 나오는 학습부진아의 개념에는 천재,수재,영재, 정상평균,학습지진으로 나누어 놓았다. 어릴 적 원숭이라고 놀리던 친구들이 IQ 80~90에 속해 있고 학습지진으로 분류되어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자료에 나온 맨끝에 백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놀랍게도 IQ가 25 이하라고 나온다.
25이하면 도대체 어느 수준을 말하는 것일까?

백치의 사전적의미는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고 정신이 박약한 것. 또는 그런 사람이라고 되어있다.소설 속에 아다다는 선천적으로 천치에 가까우면서 무슨 일이든지 힘에 부치도록 하고 싶어한다. 둔한 지혜로 뼈가 부러지도록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고 .때로는 불에 활짝 단 솥뚜껑을 맨손으로 열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묵은 된장을 옮겨 담다가 그릇을 깨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머리카락이 빠지도록 두들겨 맞기도 한다. 백치 아다다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아다다’는 벙어리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아다다’뿐이어서 아다다로 불린다. 거기에 행동마저 천치에 가까운 그녀는 논 한섬지기에 딸려 멀리 사는 가난뱅이에게 시집을 간다. 처음에는 시집갈 때 가져간 논 덕분에 대우를 받고 산다. 그러다 살림살이가 차츰 나아지자 남편의 학대가 시작된다. 남편은 1년 농사대금으로 투기를 해 거금 2만원을 손에 쥐고 첩을 들이고 아다다를 쫓아낸다. 친정으로 쫓겨온 아다다는 가난하지만 그녀를 위해주는 수롱이를 의지하여 신미도라는 섬으로 간다. 수롱은 그동안 모은 돈 160원으로 밭을 사 농사를 짓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다다는 돈이나 땅은 불행을 가져오는 화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이 깨어질까 두려워 수롱 몰래 밭살 돈을 바다에 뿌려버린다. 격분한 수롱은 아다다를 발길로 차고 그녀는 결국 물에 빠져 사라지고 만다.

 위의 내용으로 비추어 아다다의 행동을 백치나 천치로만 볼 수 있을까?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는 순수한 아다다의 마음은 동물적인 본능이 아닌 가장 인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회 경제적 빈곤이 교육이나 학군으로 차별화 되는 사회 ....소설 백치 아다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요즘도 물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변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심심찮게 보도되는 사건 사고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사회가 좀더 따뜻해지려면 IQ가 높고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보다 인간적이고 순수한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부자 고소영으로 대변대는 현정부에 과연 아다다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갑자기 이런 쌩뚱맞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지능으로 살지말고 감성으로 살라는 메세지가 가슴을 울린다.
따듯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백치 아다다'를 다시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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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이솝우화

          이동호

나는 책이다.
508호 집이 이사갈 때
온갖 잡지와 함께
쓰레기로 버려졌지만
108호 집 사내의 눈에 띄어
혼자 살아 남은
이솝우화다

사내의 딸은 여덟 살
아빠가 주워온 줄도 모르고
이야기 속에 푹 빠졌다
여우가 지나가고
늑대가 지나가고
토끼가 잠든 사이
거북이 지나가고

아이의 눈 속에서
다시 살아난 동물들이
아이의 가슴에
집을 짓는다

그냥 쓰레기로 버려질
내 안의 것들이
아이의 꿈으로
되살아나는

나는 행복한
이솝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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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이면 작고 40주기를 맞는 풀의 시인 김수영(1921~68) 시인의 미발표 시 15편과 일기 등 산문 30여 편이 새로 발굴됐다고 한다. 이 시들은 오는 17일 발간 예정인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릴 예정인데 이번에 공개된 시들 가운데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1960년에 쓴 〈'金日成萬歲'〉다 .
이시는 풍자시 이지만 제목이 당시로써는 발표될 수 없는 금기어라 묻혀있다가 이번에 공개된 것이라고 하는데 김수영 시인은 시 '김일성 만세’를 인정할 수 있어야 진정한 언론자유라고 말하고 있다.
그 전문을 보면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일성 만세> 부분. 한자는 한글로, 표기는 현대어법으로 고침)

<창작과 비평>에 새로 발굴된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공개하면서 ‘제 모습 되살려야 할 김수영의 문학세계’라는 해제를 쓴 김명인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김수영은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최대의 금기였던 ‘김일성 만세’를 제목을 포함해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상당한 시적 울림을 확보한 문제적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1981년 '민음사에서 펴낸 '김수영 전집'에는 1960년 자유문학'에서 시의 제목을 '잠꼬대'로 바꿔서 발표하자고 했었다는 일기가 있다고 했다.
제목만으로 보면 간첩으로 오인받기에 충분한 김수영 시 '김일성 만세'가 올바른 평가를 받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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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大明) 가정연간(嘉靖年間) 금릉 순천부에 유현(劉炫)이라는 명환이 있었다. 늦게야 일자를 낳고 연수라 이름하였다. 유공의 부인 최씨는 연수를 낳아 놓고 자라는 것도 보지 못하고 졸하였다. 연수의 나이 10세에 이르매 문장재화(文章才華)가 대성하여 향시(鄕試)에 장원급제하고,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으나 연소(年少)하므로, 10년을 더 수학하고 나서 출사(出仕)하겠다고 천자에게 상소하였다. 천자는 특별히 본직(本職)을 띠고 6년 동안의 여가를 준다.
유한림(劉翰林)은 섭덕(涉德)과 재학(才學)을 겸비한 사씨와 결혼하였다. 금실이 좋았으나 사씨는 유씨 가문에 들어온 지 9년이 되어도 출산을 못한다. 사씨는 후일 조상의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할까 근심한 나머지 유한림을 권하여 새로이 여자를 보게 하였다. 유한림은 거절했으나 여러 번 권하매 마지 못하여 교씨(喬氏)라는 처녀를 맞아들인다.
교씨는 천성이 간악하고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여자였다. 겉으로는 사씨를 존경하는 척하나 속으로는 증오하였다. 그러다가, 잉태하여 아들을 출산하고는 자기가 정실(正室)이 되려고 마음먹고, 문객(門客) 동청(董淸)과 모의하여 남편 유한림에게 사씨를 가지가지로 참소한다. 유한림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부정한 자취를 드러내어 모략하는 데는 마음이 굳은 유한림도 미혹되어, 그 모략을 사실로 알고는 사씨를 폐출(廢黜)시키고 곧 교씨를 정실로 맞이한다.
남편 유한림에게 축출을 당한 사씨는 남으로 남으로 정처없는 방랑을 계속하면서도 온갖 풍파와 고난을 겪는 가운데 몇 번이나 자살하려고 한다. 자살하려고 할 때마다 신명의 계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순제(舜帝)의 두 비(妃)인 아황, 여영의 혼령의 교시를 받고 어느 산사에 들어가서 의탁하게 된다.
정실 사씨를 축출하는데 성공한 교씨는 자기가 정실이 되었으나, 그의 간악은 그에 그치지 않고, 다시 문객 동청과 간통하면서 유한림을 귀양 보내고 유한림의 전재산을 탈취해 가지고 도망가서 살기로 약속하고는, 유한림을 천자에게 참소하여 원배(遠配)시키는 데 성공한다.
문객 동청은 유한림의 천자에 대한 불평을 고발했다는 공에 의하여 지방관이 되어 부임하게 된다. 그는 유한림의 전재산을 가지고 교씨와 같이 부임하다가, 도중에서 강도를 만나 전재산을 다 빼앗기고 궁경(窮境)에 빠진다 이 때, 조정에서는 유한림에 대한 혐의가 풀려 소환하고, 충신을 참소한 동청은 처형하기고 한다.
정배(定配)를 당한 유한림은 비로소 교씨와 동청의 간계(奸計)에 속은 줄 알고 전죄(前罪)를 대오(大悟)한다. 마침 조정에서 해배(解配)의 통지가 왔는지라, 고향으로 돌아와서 사방으로 탐문하여 사씨의 행방을 찾는다. 한편, 남편 유한림이 해배되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들은 사씨는 산사에서 나와 남편을 찾으러 나선다. 사씨와 유한림은 도중에서 해후한다. 유한림은 사씨에게 전죄(前罪)를 사과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간악한 교씨와 동청을 잡아 처벌하고 나서 사씨를 다시 정실로 맞이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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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 짓는 송 영감은 늙은 몸에 병까지 깊었다. 그런데 아내는 조수와 눈이 맞아 어린 아들 당손이를 남겨 둔 채 도망쳤다. 송 영감은 조수가 지어 놓은 독을 보자, 끓어오르는 심사에 당장 떼려부수고 싶었지만 그걸 팔아야 부자(父子)가 연명할 수 있기에 참는다. 그리고 한 가마를 채워 구우려고 일어나 독을 짓기 시작한다.
  손놀림이 예전처럼 잘 되지 않고 신열 때문에 짓다가 쓰러지고, 쓰러지면 또다시 일어나 짓고 하는 동안 배고픈 어린 아들은 옆에서 칭얼댄다. 어느 날, 이들 부자(父子)를 따뜻하게 돌보아 주던 앵두나뭇집 방물장수 할머니가 찾아와서 마땅한 집이 나섰으니 당손이를 그 집에 보내자고 권유한다. 송 영감은 버럭 화를 내면서 가마에 독을 넣어 불질을 한다.
  며칠 불길을 지켜보던 중 마지막 단계에서 독이 튀는 소리가 났다. 자신이 만든 독이 깨어지고 있는 것임을 안 송 영감은 그 자리에서 그만 쓰러진다. 다음날, 가지 않겠다는 당손이를 방물장수 할머니에게 딸려 보내는 송 영감의 눈에는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는 가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마치 터져 나간 자신의 독을 대신이라도 하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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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토지와 그 밖의 모든 재산을 두고 쫒겨 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한 생원은 우쭐해졌다.  "거 보슈 송 생원. 인전들 내 생각나시지?"한 생원은 허연 탑석부리에 묻힌 쪼글쪼글한 얼굴이 위아래 다섯대 밖에 안 남은 누런 이빨과 함께 흐믈흐믈 웃는다.  일본인에게 땅을 팔고 남의 땅을 빌려 근근히 살아오던 한 생원은 일 본인들이 쫓겨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푼다. 일본인이 쫒겨 가면 땅을 다시 찾게 된다고 큰소리를 쳐왔던 터였다.  한일합방 이전에 고을 원에게 강제로 아홈 마지기의 땅을 빼앗기고, 남은 일곱 마지기마저 술과 노름, 그리고 살림하느라 진 빚 대신에일본인에게 팔아 넘길 수밖에 없었던 한 생원에게 땅을 도로 찾게 될 거라는 기대는 큰 기쁨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 가니 땅은 그전 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 생원은 술에 얼근히 취해 자기 땅을 보러 간다고 외친다.그러나 그러나 막상 찾으리라고 기대했던 땅은 이미 소유주가 바뀌어 찾기 어렵게 되고, 논마져 나라가 관리하게 됨을 알게된 한 생원은 허탈에 빠지고 만다.  그는 마침내 자신은 다시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하며, 해방되던 날 만세 안부르기를 잘 했다고 혼잣말을 한다.
  "일없네.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에길 삼십 육년두 나라 없이 살아 왔을려냐. 아아니 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 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고 살지.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할 당을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야 ?"'독립이 돼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길 잘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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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부를 은강그룹의 회장으로 착각한 공원의 칼에 맞아 숙부는 죽었다. 사촌은 미국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나(은강그룹 경영주 아들 경훈)와 함께 법정에 참석한다. 범인은 은강방직 기사로 일하던 난쟁이 가족 큰아들이었다. 사람이 죽은 엄연한 사실을 갖고 변호인 측은 은강 그룹 회장이 노동자의 억압의 중심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죽여야 했다는, 부정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투사적 논리까지 펴나간다. 변호인 측 증인으로 등장한 손가락이 여덟 개뿐이 없는 지섭은 난쟁이의 큰아들은 이상을 펴려다 고생을 했으며 지금도 난쟁이 큰아들과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집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논리를 편다. 마음 약한 사촌은 그들의 논리에 열심히 귀 기울이고 무엇이 사실인가를 나에게 설명한다. 공판은 끝나고 사촌형은 떠났다. 재판 결과는 난쟁이 큰아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기대를 품었던 공원들은 혼란과 착각에 빠졌고 재판에 승소할 것처럼 기세 등등하던 변호인은 낙담했다. 이번 일로 나는 공원들의 행복과 부모님이 내게 주신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창작과 비평 1978.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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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자 중에서 석담이 특히 득의해하던 것은 대나무와 매화였다. 그런데 그 대나무와 매화가 한일합방을 경계로 이상한 변화를 일으켰다. 대원군도 신동(神童)의 그림으로 감탄했다는 석담의 대나무와 매화는 원래 잎과 꽃이 무성하고 힘차게 뻗은 것이었으나 그때부터 점차 시들고 메마르고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후년으로 갈수록 심해 노년의 것은 대 한 줄기에 잎파리 세 개, 매화 한 등걸에 꽃 다섯 송이가 넘지 않았다. 고죽에게는 그것이 불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대나무의 잎을 따고 매화의 꽃을 훑어 버리십니까?"
  이제는 고죽도 장년이 되어 석담선생이 전처럼 괴퍅을 부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고죽이 그렇게 물었다.
  "망국(亡國)의 대나무가 무슨 흥으로 그 잎이 무성하며, 부끄럽게 살아남은 유신(遺臣)의 붓에서 무슨 힘이 남아 매화를 피우겠느냐?"
  "정소남(所南=정사초)은 난의 노근(露根)을 드러내어 망송(亡宋)의 한을 그렸고, 조맹부는 훼절(毁節)하여 원(元)에 출사(出仕)했지만, 정소남의 난초만 홀로 향기롭고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비천하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서화는 심화(心畵)니라. 물(物)을 빌어 내 마음을 그리는 것인즉 반드시 물의 실상(實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글씨 쓰는 일이며 그림 그리는 일이 한낱 선비의 강개(慷慨)를 의탁하는 수단이라면, 그 얼마나 덧없는 일이겠읍니까? 또 그렇다면 장부로 태어나 일평생 먹이나 갈고 화선지나 더럽히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모르긴 하되 나라가 그토록 소중한 것일진대는, 그 흔한 창의(倡義)에라도 끼어들어 한 명의 적이라도 치고 죽는 것이 더욱 떳떳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서실에 앉아 대나무잎이나 떼어내고 매화나 훑는 것은 나를 속이고 물을 속이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 물에 충실하기로는 거리에 나앉은 화공이 훨씬 앞선다. 그러나 그들의 그림이 서푼에 팔려 나중에는 방바닥 뚫어진 것을 메우게 되는 것은 뜻이 얕고 천했기 때문이다. 너는 그림이며 글씨 그 자체에 어떤 귀함을 주려고 하지만, 만일 드높은 정신의 경지가 곁들여 있지 않으면 다만 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예도(藝道) 논쟁이 있다. 역시 고죽이 장년이 된 후에 있었던 것으로 시작은 고죽의 이러한 물음이었다.
  "선생님 서화는 예(藝)입니까, 법(法)입니까, 도(道)입니까?"
  "도다"
  "그럼 서예(書藝)라든가 서법(書法)이란 말은 왜 있습니까?"
 "예는 도의 향이며, 법은 도의 옷이다. 도가 없으면 예도 법도 없다"
  "예가 지극하면 도에 이른다는 말이 있읍니다. 예는 도의 향이 아니라 도에 이르는 문(門)이 나겠습니까?"
  "장인(匠人)들이 하는 소리다. 무엇이든 항상 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글씨며 그림을 배우는 일도 먼저 몸과 마음을 닦는 일이겠군요?"
  "그렇다. 그래서 왕우군(王右軍)은 비인부전(非人不傳)이란 말을 했다. 너도 이제 그 뜻을 알겠느냐?"

  이미 육순에 접어들어 늙음의 기색이 완연한 석담선생은 거기서 문득 밝은 얼굴이 되어 일생을 불안하게 여겨 오던 제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고죽은 끝내 그의 기대를 채워 주지 않았다.
  "먼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이제 예닐곱 살 난 학동들에게 붓을 쥐여 자획을 그리게 하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만약 글씨에 도가 앞선다면 죽기 전에 붓을 잡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기예를 닦으면서 도가 아우르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평생 기예에 머물러 있으면 예능(藝能)이 되고, 도로 한 발짝 나가게 되면 예술이 되고, 혼연히 합일되면 예도가 된다"
  "그것은 예가 먼저고 도가 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도를 앞세워 예기(藝氣)를 억압하는 것은 수레를 소 앞에다 묶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석담 문하에 든 직후부터 반생에 이르는 고죽의 항변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석담선생의 반응도 날카로웠다. 그를 받아들일 때부터의 불안이 결국 적중하고 만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으리라.
  "이놈, 네 부족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애써 채우려들지는 않고 도리어 요망스런 말로 얼버무 리려 하느냐? 학문은 도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너는 경서(經書)에도 뜻이 없었고, 사장(詞章)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오직 붓끝과 손목만 연마하여 선인(先人)들의 오묘한 경지를 자못 여실하게 시늉하고 있으니 어찌 천예(賤藝)와 다름이 있겠는가? 그래 놓고도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앞사람의 드높은 정신의 경지를 평하려들다니 뻔뻔스러운 놈"

  그러다가 급기야 그들 두 불행한 사제가 돌아서는 날이 왔다. 고죽이 서른 여섯 나던 해였다.그 무렵 고죽은 여러 면에서 몹시 지쳐 있었다. 다시 석담의 문하로 돌아간 그 팔년 동안 그의 고련(苦練)은 열성스럽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었다. 하도 자리를 뜨지 않고 서화에 열중하는 바람에 여름이면 엉덩이께가 견디기 힘들 만큼 진물렀고, 겨울에는 관절이 굳어 일어나 상받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석담선생의 말없는 꾸짖음을 외면한 채 서화가 관련이 없으면 어떤 것도 보지 않았고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이미 그 전에 십 년 가까이 석담 문하에서 갈고 닦았지만, 후년에 이르기까지도 고죽은 그 팔 년을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부분으로 술회하곤 했다. 그 전의 십 년이 오직 석담의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한 십 년이라면, 그 팔 년은 석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팔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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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李文烈, 1948- )
1948년 서울 생, 1950년 고향인 경북 영양군 석보면에 이주. 1953년 안동으로 이사. 57년 서울로 이사, 59년 밀양으로 이사. 1961년 밀양 중학 입학했으나 그만두고 64년 검정고시로 안동고교 입학. 1965년 안동고교 그만두고 부산으로 이사, 이후 3년간 떠돌이 생활. 1968년 대입 검정고시를 쳐 서울대 사대 입학. 70년 자퇴 후 사법고시 준비. 1973년 76년 군생활. 77년 대구매일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되고, 1978년 동아일보 신춘에 중편 「새화곡」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들소」(1979),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1979), 「달팽의 외출」(1980), 「이 황량한 역에서」(1980), 「금시조」(1981), 「익명의 섬」(1982), 「칼레파타칼라」(1982), 「귀두산에는 낙타가 산다」(1982), 「장려했으니, 우리 그 낙일」(1984),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87)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사람의 아들」(1979),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 가지 못하리」(1980), 「젊은 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레터의 연가」(1983), 「영웅시대」(1984), 「미로일지」(1984),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8),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1989), 「시인」(1991) 등이 있으며, 대하 장편 「변경」은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이문열의 소설은 매우 넓은 관심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종교 문제와 예술관의 문제에서부터 분단과 이데올로기 갈등, 근대사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 재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형상화하는 기법 또한 현란할 정도로 다채롭다. 정통적인 리얼리즘의 기법으로부터 대체 역사나 우화의 형식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이문열의 소설은 크게 두 경향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능란한 장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소설들로, 「황제를 위하여」나 「우리가 행복해지기까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그 예이다. 다른 하나는 연작 장편 「젊은 날의 초상」이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등과 같이 작가 자신의 실족적 번민을 특별한 기교 없이 절실하게 형상화해 낸 작품들이다. 이 둘이 더러 「사람의 아들」이나 「새화곡」에서와 같이 더러 혼자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문열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자의 요소다. 무엇보다도 현실을 하나의 체계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 곧 관념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의 문학은 고급 문학의 품격을 지키면서도 광범위한 대중의 호응을 받은 진귀한 경우에 속한다.
  1979년 장편 「사람의 아들」로 제3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였으며, 1982년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제1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단편집으로는 『금시조』(1983), 『귀두산에는 낙타가 산다.』(1989)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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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당(唐)나라 때 천축(天竺)으로부터 육관 대사(六觀大師)라는 고승(高僧)이 중국에 와서 큰 절을 세우고 제자를 모아 불도(佛道)를 강론(講論)한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가 성진(性眞)이었다. 어느날 성진은 대사의 심부름으로 용궁에 가게 되었는데, 용왕의 융숭한 대접에 술을 몇 잔 마시고 돌아온다. 한편 선녀 위진군(魏眞君)은 팔선녀(八仙女)를 대사에게 보내 약간의 보물을 선사한다. 길 중간에서 팔선녀와 성진이 만나게 되어 서로 희롱하다 돌아온다.
  절에 돌아온 성진은 선녀들을 그리워하며 속세의 부귀 영화만 생각한다. 끝내 그는 죄를 얻어 지옥에 떨어지고 다시 인간 세상에 환생하여 양소유(楊少遊)가 된다. 한편 팔선녀도 같은 죄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각각 다시 세상에 환생한다. 양소유는 차례로 그들 여덟 여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드디어 벼슬은 승상에 이르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린 양소유의 화려한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다.
  회남 수주현 양처사의 아들로 태어난 성진[양소유(楊少遊)]은 15세에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혼약하고, 난을 피해 있다가 과거를 보러 올라가던 중 낙양의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고, 경사에 이르러 거문고를 타는 여자로 가장하여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경패의 시비인 '가춘옥'과도 인연을 맺는다.
  하북의 왕이 역모하려 아니 양소유는 절도사로 나가 이를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인 줄 알고 만난 여자가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상경하여 예부상서가 된 양소유는 황제의 누이인 '난양 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인연으로 부마로 간택이 되는데.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물리치다가 옥에 갇힌다.
  토번왕이 쳐들어 오자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 양소유는 토번왕이 보낸 여자 자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고, 백룡담에서는 용왕의 딸인 '백릉파'를 도와 주어 인연을 맺는다. 그 동안에 난양 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을 이루지 못하여 실심한 정경패를 만나 보고 그 인물에 감복하여 제 1 공주인 '영양 공주'를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의 벼슬에 오르고, 영양 공주 난양 공주 2처와 진채봉, 계섬월, 가춘옥, 적경홍, 심요연, 백릉파의 6첩을 거느리게 된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아홉'이라는 숫자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 이제는 승상의 벼슬에서도 물러나 한가히 그의 여생을 즐기던 양소유는 어느 가을날 두 부인과 여섯 낭자를 거느리고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이때 한 노승을 만난다. 때마침 찾아온 어느 고승에게 불도(佛道)에 귀의할 것을 말하자 그 도승은 쾌히 승낙하고 짚고 온 지팡이로 난간을 두드린다. 그러자 모든 것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손에 백팔 염주를 들고 있고 까칠까칠한 중의 머리를 한 자기(성진) 뿐이었다.
  당황한 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귀 영화는 하룻밤 꿈이었고 자기는 분명히 연화 도량(蓮花道場)의 성진이었다. 꿈을 깬 성진은 황망히 대사 앞에 뛰어가 엎드린다. 팔선녀도 이어 들어와 제자되기를 청한다.
  후에 대사는 도(道)를 성진에게 물리고 천축으로 돌아가고 팔선녀는 성진이 앞에서 계속 도를 닦아 후에 아홉 사람은 모두 극락 세계로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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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고, 충렬공 익겸의 유복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로서, 숙종대왕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방(昉)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지(遲)의 따님이다.
  서포의 어머니는 흔히 맹자의 어머니와 비유되곤 한다. 자식교육에 대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 소설가. 호는 서포.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요, 병자호란때 순절한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나 오로지 어머니 윤씨의 남다를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했는데 그의 생애와 사상도 어머니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베짜고 수놓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봐 어린 자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서포의 어머니의 지극한 정서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16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하고 암행어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 직언도 불사하는 강직성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김金'씨 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예조참의로 복귀하여 대사헌을 거쳐 대제학에까지 오르는 등 7년간은 전생애를 통한 황금기였다. 그러나 변덕쟁이 임금인 숙종이 정비인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세우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남해에 유배당한다. 유배지에서 숙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쓴 것이 '사씨남정기'다. 이러한 와중에 그의 어머니 윤씨는 아들의 안부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으나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의 일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상과 문학은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거나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한 점등에서 사상의 진보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 예찬론'은 문학이론에서의 진보성을 보여준다. 김시습의 '금오신화' 이후 허균의 뒤를 이어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나타난 그는 우리 문학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왔다.
  즉 소설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에 있어 소설의 가치를 인식, 창작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후 국문소설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그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국자의식(國字意識)은 높이 살 만하며 특히 숙종을 참회시키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나 모친을 위로하기 위해 순수한 우리말로 유배지에서 쓴 '구운몽' 같은 국문소설의 창작은 허균을 잇고 조선후기 실학파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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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내는 애완 동물들을 길렀고, 그 중에서 나는 플루토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가장 귀여워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나는 알콜 중독이 되어갔고 동물들을 학대하고 아내에게도 폭언을 퍼부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술을 마시고 고양이가 나를 피하는 느낌을 받자 자개 칼로 고양이의 한쪽 눈을 도려낸다. 그 뒤에도 여전히 나는 술에 빠져 살았고 고양이를 나무에 목매달았다. 그날 밤, 집에 화재가 났고 누군가에게 불이 났음을 알리기 위해 목매달린 고양이를 내 방을 향해 던졌다.
  여러 달 동안 나는 그 고양이를 대신할 만한 놈을 찾았고 어느 날 밤, 술집에서 가슴에 흰  털이 있는 검은 고양이를 발견한다. 나를 따라온 고양이는 곧 나와 아내에게 귀염둥이가 되었다.
  고양이를 데려온 다음 날 그 녀석도 플루토처럼 눈 하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고양이에 대해 곧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갈수록 광란의 발작을 일으켰으며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이 받아 주었다.
  어느 날 가난해진 탓으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거처하고 있는 옛날 집 지하실로 아내와 같이 들어가는데, 고양이가 나를 가파른 층계에서 거꾸로 메어칠 뻔했다. 화가 난 나는 도끼로 내려치려 했지만 아내가 막는 바람에 치지는 못했다. 나는 아내의 골통에다 도끼를 내리 꽂았고 나는 시체를 지하실 벽 속에 집어넣고 흙을 다시 발랐다.
  나흘 뒤 집을 수색하러 온 경관들에게 나는 태연했지만 벽 속에서 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벽을 허물어 보게 된다. 고양이가 시체 머리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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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가로 1809년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배우였던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숙부인 J. 앨런의 양자로 보내지지만 사이가 좋지 못했다. 14살 때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열애해 훗날 유명한 서정시「헬렌에게」(1831)를 쓰게 되었다. 1826년 버지니아대학에 입학했으나, 노름과 방종한 생활로 많은 빚을 지고 양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퇴학당하기에 이른다. 그 뒤 보스턴에서 처녀시집「티무르, 기타 시집」(1827)을 익명으로 출판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어「알 아라프, 티무르 그리고 2류 시집」(1829),「포 시집」(1831) 등 두 권의 시집을 내지만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볼티모어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단편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되었는데, 특히「병 속에서 나온 수기」(1833)로 인정받은 후 문예지의 편집자가 되었으나 혹독하고 엄격한 서평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반감을 샀고 나쁜 술버릇으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36년에는 14살인 사촌동생 버지니아와 결혼했고, 리치먼드, 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잡지 편집자로 일했으나 계속하지는 못했다. 이때부터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하여「리지아」(1838),「윌리엄 윌슨」(1839),「어셔 가(家)의 몰락」(1839) 등을 수록한 최초의 단편집『기이한 이야기(2권)』(1840)을 출판하였다. 이어서「모르그 가(街)의 살인 사건」(1841),「큰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서」(1841),「붉은 죽음의 가면극」(1842),「황금벌레」(1843),「마리 로제 사건의 불가사의」(1842∼43) 등을 썼고,「검은 고양이」(1843) 등을 포함한『단편집』을 1845년에 출판했다.

[리브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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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의 꿈

- 리처드 바크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갈매기 조나단에게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

제 1 부


 아침이었다.

 새로 솟은 태양이 잔잔한 바다의 잔물결 위에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해변으로부터 좀 떨어진 바다 위에서 고깃배 한 척이 물고기를 모으기 위해 밑밥을 물 속으로 던지고 있었고, 아침 먹이를 찾아 나온 갈매기 떼에게 전하는 (우두머리 갈매기의) 전달이 허공 중에 빛처럼 번쩍이자, 이윽고 수많은 갈매기들이 이리저리 날며 서로 다투면서 먹이 부스러기를 쪼아갔다. 바쁜 하루가 또다시 시작 된 것이다.

 그러나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고깃배와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홀로 나와 외로이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삼십미터 상공에서 그는 물갈퀴가 달린 두 발을 아래로 내리고 부리를 쳐든 채, 양쪽 날개를 뒤틀어 구부린 힘겹고 고통스러운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애썼다. 날개를 뒤틀어 구부린 자세는 저속 비행을 위한 자세였고, 그래서 그는 이제 볼에 스치는 바람소리가 속삭이듯이 낮아지고 발 아래의 해면이 정지한 것처럼 보일 때까지 최대 한도로 속력을 줄였다. 그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눈을 가늘게 뜨고, 단 한 치 만이라도 …… 더 …… 날개를 구부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 날개의 깃털들이 흐트러지며, 그는 속력을 잃고 추락했다.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갈매기는 공중에서 비틀거리거나 속력을 잃거나 하는 법이 없다. 공중에서 속력을 잃는다는 것은 갈매기들에게는 수치요 불명예인 것이다.

  그런데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듯, 또다시 날개를 펴서 뒤틀어 구부리는 힘겨운 커브자세를 취하고 느리게 …… 느리게 …… 속력을 늦추어 가다가 마침내 또다시 속력을 잃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정말 보통 평범한 새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해변에서 먹이가 있는 데까지 날아갔다가 다시 해변으로 날아오는, 지극히 간단한 비행, 그 이상의 것은 배우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일[ 飛翔 ]이 아니라 먹는 일이다. 그러나 이 조나단 갈매기에게는 먹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일이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어떤 일보다도 조나단 리빙스턴은 날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으면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모들조차 그가 날이면 날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수백 번씩 저공활공(低空滑空)을 시도하며 연습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것이었으니까 …….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가령, 자기 날개 길이의 반정도도 못되는 아주 낮은 높이에서 해면 위를 날 때면 힘도 덜 들고, 활공 시간도 길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활공을 마치고 물에 내려앉을 때는 다른 갈매기들이 흔히 그렇듯이 두 다리를 쭉 펴고 물위에 첨벙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그의 몸에 유선형으로 착 붙이고 수면에 닿기 때문에 물위에는 기다란 물살이 자국으로 남는 것이었다. 그가 두 다리를 접은 채 해변에 동체 착륙(胴體 着陸) 연습을 시작한 뒤, 모래에 새겨 진 자기의 미끄러진 자국을 걸음으로 재어 보는 단계에까지 이르렀을 때 부모들은 정말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존, 정말 왜 그러니?"  하고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존, 남과 같이 행동하기가 왜 그렇게 어렵단 말이냐? 저공 비행 같은 것은 펠리컨(부리가 긴 바닷새)이나 앨바트로스(일명 신천옹(信天翁) 이라는 바닷새로 날개가 길다. -- 역주)에게 맡겨 버릴 수 없겠니? 더욱이 통 먹지도 않으니 어쩌자는 거냐, 얘야? 뼈와 깃털만 앙상하게 남았구나!"

 "뼈와 깃털만 남았어도 상관없어요, 어머니. 저는 자신이 공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며,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만 알고 싶을 뿐이어요."

 "이봐라, 조나단!" 하고 그의 아버지가 인자하게 말했다.

 "이제 곧 겨울이 닥쳐온다. 고깃배도 줄어들 터이고, 수면 가까이 떠돌던 물고기들도 깊은 물속으로 잠겨 버릴 것이다. 만약 꼭 연구를 해야겠다면, 먹이에 관해서 그리고 그것을 얻는 법에 대해서나 연구를 하려무나. 그 비행술인가 뭔가도 다 좋다만, 그러나 활공법이 밥을 먹여 주지는 못하지, 그렇지? 우리가 날아다니는 것은 먹기 위해서다. 이 점을 잊지 마라."

 조나단은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 뒤 며칠 동안 그는 다른 갈매기처럼 처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다른 갈매기들과 어울려 방파제와 고깃배 주위를 돌면서 꽥꽥 소리도 지르고 다투기도 하고 빵조각이나 물고기를 찾아 급강하도 하면서, 정말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두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힘들여 잡은 멸치 한 마리를 그를 쫓아오는 굶주린 늙은 갈매기에게 그냥 떨어트려 주었다. 이러는 시간을 모두 다 비행 연습을 하는 데 쓸 수있을 텐데, 배울게 무척 많지 않은가!

 조나단 갈매기는 또 다시 홀로 바다 멀리로 나가, 배가 고프지만, 행복한 가운데 비행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속도가 과제였다. 그리고 일주일을 연습하고 나자 그는 살아 있는 갈매기 중에서 가장 빠른 어느 갈매기보다도 나는 속도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삼백 미터 상공에서 그는 힘껏 날개를 쳐서 파도를 향해 직선으로 내려쏟듯 쏜살같이 날아 내려왔고, 그리고 갈매기들이 직선에 가까운 기울기로 급강하를 못하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급강하를 시작한 지 육 초쯤 지나자 그는 시속 약 일백 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이 속도에서는 치미는 공기의 압력 때문에 날개의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매번 일어났다. 그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면서 매우 조심했지만, 속도가 빨라지면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삼백 미터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먼저 전력을 다해 곧장 앞으로 날고, 다음에는 날개를 치면서 수직으로 내려꽂는다. 그럴 때마다, 치미는 바람의 압력으로 그의 왼쪽 날개가 들썩하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그의 몸이 왼쪽을 세차게 흔들렸으며, 몸의 균형을 잡느라 오른쪽 날개의 운동이 정지되는 순간 불꽃처럼 오른쪽으로 팽그르르 돌면서 공중제비를 하는 것이다.

 치미는 그 바람의 압력에는 아무리 조심을 했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는 열 번이나(수직의 급강하를) 해 보았는데 열 번 다 하강 속도가 시속 약 일백 킬로미터 이상이 되면, 날개의 깃털이 두리뭉수리로 휘감겨, 균형을 잃고,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던 것이었다.

 문제의 열쇠는 -- 그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마침내 생각했다. -- 매우 빠른 속도로 날 때는 날개를 끄떡없이 그대로 유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시속 팔십 킬로미터 정도가 될 때까지 날개를 친 뒤 그 다음에는 날개를 그냥 편 채로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육백미터 상공에서 그는 다시 해 보았다. 부리를 곧장 아래로 향하고 급강하에 돌입했다. 시속 약 팔십 킬로미터로 속력이 붙자 곧 날개를 그대로 편 채로 있었다. 엄청나게 힘이 들었지만 그대로 견딜 수 있었다. 십초 쯤 지나자 그는 거의 몸의 윤곽이 보이지 않을 시속 약 백 오십 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날고 있었다. 조나단은 갈매기의 세계에서 빠르게 날기 신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일순간이었다. 그가 수면 가까이에 이르러 수면에 평행으로 날기 위해 그의 날개의 각도를 바꾸는 순간, 그는 눈깜짝할 사이에 전과 같은 그 무서운, 킬로미터에서 몸의 균형을 잃었을 때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조나단 갈매기는 허공에서 폭발하여 벽돌만큼이나 단단한 바다 위에 내동댕이쳐졌던 것이었다.

 그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해가 저문 지 오랜 뒤였고, 그는 달빛 속에서 바닷물 위를 떠돌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날개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패배감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그 무게가 그를 살며시 바다 밑으로 끌어들여서, 모든 것을 끝장내 버렸으면 하고 연약한 심정으로 바랐다.

 그의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 텅빈 듯한 낯선 목소리가 그의 내부에서 울려왔다. --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나는 갈매기가 아니냐. 나에게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내가 비행에 관해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울 생각이라면 두뇌 속에 항공법 사전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굉장한 속도로 날기를 원한다면 매의 것과 같은 짧은 날개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리고 물고기가 아니라, 쥐를 잡아먹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 말이 옳았지. 이 어리석은 짓을 잊어 버려야 한다. 갈매기 떼가 있는 집으로 날아가서 있는 그대로의 나, 제한된 존재인 가련한 갈매기로서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소리는 사라졌다. 그리고 조나단도 같은 생각이었다. 밤에 갈매기가 있어야 할 곳은 해변이 아닌가. 그는 이 순간 이후로는 한 마리의 평범한 갈매기가 되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다 더욱 행복해질 것이다.

 그는 어두운 물결을 힘겹게 차고 날아올라 육지를 향해 날아갔다. 힘을 덜어 주는 저공 비행법을 익혔던 것에 감사하면서 …….

 이렇게 저공 비행을 해서는 안되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난날의 나를 청산하지 않았던가.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다른 모든 갈매기와 마찬가지의 갈매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보통 갈매기처럼 날아야지. 그래서 그는 아픔을 참으면서 삼십  미터 상공으로 날아올라 더욱 힘들여 날개를 치면서 해변으로 향했다.

 그는 갈매기 떼 중의 하나가 되기로 한 자신의 결심으로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로 하여금 비행 연습을 하도록 몰아세우던 충동에 얽매이지 않아도 될 것이었고, 더 이상의 도전도 더 이상의 실패도 없을 것이었다. 모든 생각을 떨쳐 버리고, 해변에 반짝이는 불빛을 향해 어둠속을 나는 것이 기분 좋았다.

 '어둠!' 그 텅 빈 듯한 소리가 경고나 하듯 날카롭게 울려 왔다. '갈매기들은 어둠속을 나는 법이 없지 않은가!'

  조나단은 이 소리를 무심히 들어 넘겼다. 기분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작은 횃불 같은 불줄기를 어둠속으로 던지듯, 달빛과 불빛이 밤물결 위에서 반짝였고,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고 그리고 고요했다…….

 내려가라! 갈매기들은 어둠속을 나는 법이 아니다!  어둠속을 날 생각이라면, 올빼미의 눈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머리 속에 항공법 사전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 매의 짧은 날개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밤하늘의, 삼십 미터 상공에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 눈을 깜빡였다. 그가 느끼던 고통, 그의 결심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짧은 날개. 매의 짧은 날개!

  바로 그거다. 난 참 바보였었구나! 내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아주 작은 날개다. 내 날개의 대부분은 접어 둔 채 날개 끝으로만 날면 되지 않겠는가! 짧은 날개!    

  그는 검은 바다 위 육백 미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실패와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날개의 앞쪽을 몸에 착 붙이고, 비수(匕首)처럼 좁게 도사린 날개 끝만을 바람 속에 펼치고 수직으로 날아 떨어졌다.

 바람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그의 머리에 와 부딪쳤다. 시속 일백 킬로미터, 백 오십 킬로미터, 이백 킬로미터, 그리고 점점 더 빨리 날아 떨어졌다. 시속 이백이십 킬로가 된 지금 날개에 와 닿는 바람의 압력은 그전의 (날개를 폈을 때) 시속 일백 킬로미터로 날던 때보다 그다지 더 세차지 않았고, 그리고 날개 끝은 트는 등 마는 둥 아주 살짝 틈으로써 그는 수직 강하의 방향을 쉽게 바꾸어, 달빛을 받으며 질주하는 포탄처럼 바다 물결과 수평으로 쏜살같이 날고 있었다.

 그는 다가드는 바람에 맞서 눈을 가늘게 떴고, 그리고 뛸 듯이 기뻤다. 시속 이백 삼십 킬로미터! 그것도 자유자재로 균형을 잡으면서! 육백 미터 상공이 아니라, 천 오백 미터 상공에서 수직 강하해 내려온다면, 얼마나 빠를까 …… .

 조금 전에 했던 맹세는, 그 무섭도록 바른 바람결이 휩쓸어 간 듯 잊혀졌다. 그렇지만 스스로 다짐했던 약속을 깨뜨린 데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한 약속은 평범한 상태에 만족하는 갈매기들이나 지키는 것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탁월한 경지에 도달해 본 자에게 그런 종류의 약속은 필요 없는 것이다.

 동이 틀 무렵, 조나단 갈매기는 또다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천 오백미터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고깃배들은 판판한 푸른 바닷물에 박힌 작은 반점 같았고, 아침 먹이를, 찾아 나온 갈매기 떼는, 빙빙 돌아가는 희미한 한 조각의 먼지구름 같았다.

 그는 기쁨으로 다소간의 전율을 느끼며 생기에 넘쳐있었고,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별 다른 절차없이 자연스럽게 날개의 앞부분을 끌어당겨 접고 짧은 날개끝을 편 뒤, 바다를 향해 수직으로 뛰어 들었다. 그가 고도 천 이백 미터 상공을 지날 때 그는 얼굴을 후려치는 소리의 벽이어서 그것을 헤치고 더 이상 빨리 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시속 삼백 사십 킬로미터로 곧장 아래로 날아 내려가고 있었다. 만약 그 속도에서 날개가 펴진다면 몸이 수백만 조각으로 갈기갈기 바람에 날려가 버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 속도는 힘이었고, 그 속도는 즐거움이었고, 그 속도는 순수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는 고도 삼백 미터 상공에 이르러 수평 비행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바람결에 날개끝이 들썩거리며 동요했고, 고깃배와 갈매기 떼가 그의 바로 앞에서 운석(隕石)처럼 빨리 돌진해 다가왔다.  

 하지만 그는 정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속도에서 방향을 바꾸는 법을 아직 알지 못했다.

 부딪치면 즉사하는 거다.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이 일은 그 날 아침해가 뜬 직후에 일어난 것이었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아침 먹이를 찾아 나온 갈매기떼 한복판을 가로질러 시속 삼백 사십 킬로미터로 눈을 감은 채 깃털과 바람이 날카롭게 아우성치는 대기 속을 총알처럼 날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을 주관하는 갈매기의 신 (The Gull of Fortune)이 이번만은 그에게 미소를 보내 준 탓인지 아무도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

 그가 하늘을 향해 부리를 곧장 치켜올렸을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시속 이백 육십 킬로미터로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속력을 시속 삼십 킬로미터로 줄이고 두 날개를 다시 폈을 때, 천 이백 미터 아래의 바다 위에 떠 있는 고깃배가 무슨 빵조각처럼 보였다.

 그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극한 속도! '시속 삼백 사십 킬로미터로' 나는 갈매기! 그것은 획기적인 기록이었고, 그 갈매기 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고, 그리고 그 순간부터 조나단 갈매기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자기의 외로운 연습장을 향해 날아가면서, 이천 사백 미터 상공에서 수직 강하를 위해 날개를 접고, 그는 즉시 방향 전환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날개 끝의 깃털 단 하나를 단 한치만 움직이면 엄청난 속도에서 미끄러지듯 완전히 선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기에 앞서, 그는 그 속도에서 하나 이상의 깃털을 움직이면 몸이 총알처럼 팽그르르 회전한다는 것을 먼저 체험했고……. 그래서 조나단은 이 세상의 갈매기들 가운데 최초로 곡예비행(曲藝飛行)을 한 셈이었다.  그는 그날 다른 갈매기들과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해가 저물어 어둡도록 날기를 계속했다. 그는 루프재주넘기(loop),느리게 옆으로 회전하기(slow roll, 低速橫轉),방위점 횡전(point roll), 배면 회전강하(inverted spin), 거꾸로 떨어지기, 바람개비처럼 돌기 등을 알아냈다.

 

 조나단 갈매기가 갈매기 떼가 있는 해변으로 온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는 머리가 빙빙 돌고 몹시 피로했다. 그렇지만 그는 기쁜 마음으로, 땅에 내리기 위해 루프 재주넘기로 비행을 했고, 땅에 내리기 직전에 허공에서 한 바퀴 재주를 넘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갈매기들이 그 획기적인 기록에 관해 들으면 기뻐 날뛰겠지. 이제 우리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게 되었나! 고깃배들에게로 날아갔다 왔다하는 단조로움 대신에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지(無知)에서 건져 낼 수 있으며, 스스로 탁월하고 지적(知的)이고 그리고 기술이 있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우리는 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앞으로의 세월은 약속으로 가득 차 신나고 빛났다.

 그가 땅에 내렸을 때 갈매기 떼들은 회의를 하러 모여 있었고, 벌써 얼마 전부터 그렇게 모여 있음이 분명했다. 사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조나단 리빙스턴 군! 한복판에 나와서라!"

 우두머리 갈매기의 말이 아주 엄숙하게 울려 왔다.

 한복판에 나가 선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 아니면 커다란 영광을 의미했다. 주요 지도자로 임명될 갈매기는 한가운데에 나가 서는 법이었다. 오늘 아침 먹이를 찾아 나왔던 갈매기 떼가 그 획기적인 기록 돌파를 물론 보았겠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명예도 원치 않는다. 나는 지도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내가 발견한 바를 나누어 갖고 싶을 따름이며, 우리들 모두의 앞에 열려진 그 지평선들을 보여 주고 싶을 따름이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조나단 리빙스턴, 그대의 동료 갈매기들이 보는 가운데 치욕을 당하기 위해 가운데로 나와 서라!" 하고 우두머리 갈매기가 말했다.

 그는 널빤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릎이 휘청거렸고, 모든 깃털이 축 처졌고, 귓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욕을 받으러 가운데 나가 선다니? 그럴 수가! 그 획기적인 기록 돌파를 했는데!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거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는 무책임하게 무모한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갈매기 가족의 전통과 위엄을 해치면서 …… ."

 치욕을 받으러 한복판에 나가 선다는 것은 갈매기 사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머나먼 벼랑에서 살아가도록 추방되는 것을 의미했다.

 "……조나단 리빙스턴, 그대는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무책임한 짓이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먹기 위해 그리고 가능한 한 오래 살아 남아 있도록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그 이상의 일은 알려지지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회의장에서 갈매기는 결코 말대꾸를 하는 법이 아니다. 하지만 조나단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책임한 짓이라구요? 형제들이여! 삶의 의미를, 삶의 더욱 높은 목적을 찾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갈매기보다 누가 더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물고기의 대가리나 찾아 다녀왔지만, 이제 우리에겐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배우고, 발견해 내고, 자유로와지고 하는! 단 한 번의 기회만이라도 주십시오, 내가 알아 낸 바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갈매기 떼는 목석이나 다름없었다.

 "형제의 관계는 이제 깨졌다." 하고 모든 갈매기들이 함께 소리쳤다. 그들은 일제히 그들의 귀를 막고 그리고 그에게 등을 돌렸다.

 

 갈매기 조나단의 그 날 이후로 혼자 나날을 보냈다. 그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벼랑 너머로 날아가서 지냈다. 그의 유일한 슬픔은 고독이 아니라, 다른 갈매기들이 자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비상(飛翔)의 영광을 믿으려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눈을 떠서 보기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는 하루하루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유선형으로 몸을 가다듬고 쏜살같이 날아 내려가면 수면에서 삼 미터 깊이에 떼지어 살고 있는 맛있고 진귀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이제 고깃배와 상한 빵 부스러기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밤에 바다로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질러 항로를 정하고, 해가 진 뒤부터 아침해가 뜰 때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날면서 허공에서 잠자는 법을 그는 익혔다. 그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짙은 바다 안개를 헤치며 날았으며, 안개를 뚫고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기도 했다. 모든 다른 갈매기들이 안개와 비에 휩싸여 아무 일도 못하고 땅위에 서 있을 바로 그 시각에도 그는 공중 높이 불어가는 바람결을 타고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법을 배웠고, 거기서 맛있는 곤충들을 잡아먹는 것도 배웠다.

 갈매기 떼 전체를 위해 기원했던 바를 이제 그는 혼자서 외로이 얻은 것이었다. 그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비행법을 익힌 것이었지만, 그것을 위해 치른 대가에 가슴아파하지 않았다. 조나단 갈매기는 갈매기들의 수명이 그토록 짧은 것은 그들이 두려움 속에서 쉽게 화를 내며 지루한 생활을 하는 때문임을 알게 되었고, 그 자신의 생각에서 이런 것들을 몰아냄으로써 그는 정말 길고 훌륭한 일생을 살았다.

 

 그럴 즈음, 황혼녘에 그들이 날아왔다. 그들은 조나단이 자기가 사랑하는 하늘을 통해 홀로 평화롭게 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날개 가에 모습을 나타낸 두 마리의 갈매기는 별빛처럼 순결했고,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높은 하늘의 밤공기 속에서 부드럽고 다정하게 빛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조나단의 날개 끝에서 한 치쯤 떨어져서 빈틈없이 정확하게 날개 끝을 움직이며 나는 그들의 비행 기술이었다.

 한 마디 말도 걸지 않고 조나단은 그들을 시험 -- 어느 갈매기도 통과한 적이 없는 시험으로 -- 해 보았다. 그는 날개를 뒤틀어서 거의 정지한 것이나 다름없는 시속 1 킬로미터 정도로 매우 느리게 날았다. 두 마리의 빛나는 갈매기도 그를 따라 유연하게, 일정한 위치를 유지하며 천천히 날았다. 그들은 저속 비행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날개를 접고, 몸을 돌려 시속 삼백 킬로미터로 쏜살같이 날아내렸다. 그들도 완전한 대형을 유지하면서 줄을 내려긋듯 그와 함께 날아 떨어졌다.

 마침내 그는 그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긴 수직 서행(徐行)회전을 했다. 그들도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했다.

 그는 다시 수평비행으로 날면서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을 꺼냈다. "참 잘하는데, 너희들은 누구지?"

 "조나단, 우리는 네가 속한 갈매기 떼에서 왔어. 우리는 너와 같은 형제야." 그 말은 힘이 있으면서 평온했다.

 "우리는 너를 더욱 높은 곳으로, 고향으로 데려가려 온 거야."

 "나에겐 고향이 없는걸. 내가 속한 갈매기 떼도 없고, 나는 추방당한 갈매기야. 지금 우리는 '큰산바람'꼭대기를 날고 있지. 나는 몇백 미터 높이 이상으로는 이 낡은 몸뚱이를 더 높이 들어 올릴 수 없어."

 "아냐 할 수 있어, 조나단. 너는 이미 배웠으니까 말야. 한 가지 과정이 끝나고, 또다른 과정을 시작할 때가 온 거야."

 그의 온 생애를 통해 늘 이해력이 등불처럼 그를 밝게 비춰주었듯이, 그 순간에도 조나단에게 이해의 등불이 밝게 켜졌다. 그들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는 더욱 높이 날 '수 있었고' 그리고 고향으로 갈 때가 '된'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하늘을, 자신이 그토록 많은 것을 배운 장엄한 은빛 영역을 한 바퀴 휘둘러 보았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이제 가자."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별처럼 빛나는 두 마리의 갈매기와 더불어 허공으로 치솟아 완전히 캄캄한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제 2 부


 여기가 정말 천국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미소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 속으로 날아올라 막 들어가려는 순간에 하늘을 비평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이 아닌가.

 그가 지금 대지로부터 떠올라, 그 빛나는 두 마리의 갈매기와 함께 긴밀한 대형을 이루면서 구름 위를 날때, 그는 자신의 몸뚱이도 그 두 마리의 갈매기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금빛 눈을 가진 지난날의 젊은 갈매기 조나단이 바로 거기에 그냥 있었다. 다만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새로와진 몸뚱이도 평범한 갈매기의 몸뚱이와 다를바 없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이미 과거의 몸뚱이가 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날고 있었다. 야, 이거, 힘을 반만 들여도, 두배의 속도를, 지상에서 내가 가장 훌륭히 해 냈던 때의 두 배의 속도를 내겠구나!

 그의 깃털은 이제 찬란한 흰빛으로 빛났고, 두 날개는 잘 닦은 은지(銀紙)처럼 매끄럽고 완전했다. 그는, 기쁨에 넘쳐, 그 날개에 관해 차츰 알게 되었고, 그 새로운 날개 속으로 힘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시속 사백 킬로미터로 날면서 그는 수평 비행으로 날 수 있는 최대 속도에 이르고 있다고 느꼈다. 시속 사백 사십 킬로미터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능력의 최대한의 속도로 날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다소 실망했다. 새로운 몸뚱이가 할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옛 수평기록보다 훨씬 빠른 것이긴 해도 역시 한계는 한계였고 그것을 깨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들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구름이 걷혔다. 그를 호위하던 두 갈매기가 말했다.

 "조나단, 즐거운 착륙이 되기를."

 그리고 그들은 희박한 대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어떤 바다 위의 톱니 모양의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몇 마리 안 되는 갈매기들이 벼랑 위에서 바람결을 타고 날아오르기를 하고 있었다. 멀리 북쪽으로, 수평선 위에 몇 마리의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새로운 광경들, 새로운 생각들, 새로운 의문들. 왜 이렇게 갈매기가 별로 없을까? 하늘에는 갈매기가 우글우글해야 할 텐데!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갑자기 피로한가? 하늘에서는 갈매기들이 피로하다는 것을 모르고, 잠도 자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것을 어디서 들었었더라. 지상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가 많은 것을 배운 곳이 다름 아닌 지상이었는데, 자세한 기억들이 몽롱해졌다. -- 먹이를 찾아 싸우던 일, 추방당하던 일등이…….

 해안선 가에 있던 십여 마리의 갈매기들이 그를 맞이하러 왔다. 모두들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자기를 환영하고 있구나, 그리고 여기가 고향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 따름이었다. 그 날은 언제 해가 떴는지를 기억해 낼 수 없는 날로서, 그에게는 굉장한 날이었다. 그는 해변에 착륙하기 위해 몸을 돌렸고, 날개를 펄럭여 지상에서 한 치쯤 되는 허공중에 정지한 후, 살짝 떨어지듯 모래 위에 내려앉았다. 다른 갈매기들도 내려 앉았다. 그런데 그들은 깃털을 별로 움직이지도 않고 그렇게 했다. 그들은 빛나는 날개를 쭉 편 채 바람결을 타고, 어떻게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날개의 방향을 바꾸어 땅에 발이 닿는 순간 동시에 정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몸가눔이었지만, 이제 조나단은 그와 같이해 보기에는 너무 피로해 있었다. 모두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해변에서 그는 선 채로 잠이 들었다.

 그 후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조나단은 이곳에서도 그가 뒤에 남기고 온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비행술에 관해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여기에는 그와 사고 방식이 같은 갈매기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제일 좋아하는 일, 즉 나는 일에서 끝없이 뻗어 나가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훌륭한 새들이었고, 그리고 그들은 매일매일 비행 연습을 하며, 어려운 항공술을 시험하는 데 모든 시간을 바쳤다.

 오랫동안 조나단은 그가 버리고 떠나온 곳 -- 먹이를 찾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수단으로 날개를 사용할 뿐 비상(飛翔)의 기쁨에 대해서는 눈을 딱 감고 살아가는 갈매기 떼가 있는 그곳에 관해서 잊고 지냈다. 그러나 때때로, 잠깐잠깐씩 그곳 생각이 났다.

 "모두들 어디 있습니까, 설리반?"하고 이제는 아주 익숙해진 이곳 갈매기들의 의사 전달 수단인 편리한 정신 감응법(telepathy) -- 찍찍 꽥꽥하는 소리대신 사용하는 -- 으로 소리없이 물었다.

 "어째서 여기에는 더 많은 갈매기가 없습니까? 제가 있던 곳에는 ……"

 "……수천 수만의 갈매기가 있었다 이 말이지?"

 설리반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존나단, 내가 아는 유일한 대답은, 너는 정말로 백만 마리의 새들 중에서 (뽑힌) 한 마리라는 거야. 우리의 대부분은 그렇게 어렵게 (이곳에) 온 거야.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서 그것과 거의 똑같은 다른 세계로 온 거지. 우리가 있던 곳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상관하지 않으며, 다만 순간을 살면서 말야. 갈매기들과 어울려 먹고, 싸우고, 권력을 얻고 하는 것 이상의 것이 삶에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깨닫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삶을 통과해야 했는지 알 수 있겠어? 천번의 삶, 만 번의 삶을 거쳐야 되는거야, 존! 그리고 나서 완벽함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까지는 또 수백의 삶이, 그리고 그 완벽함을 찾아내고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에는 또 다시 수백의 삶이 있어야 하는 거야. 이와 똑같은 법칙이 지금 우리에게도 물론 적용되는 거야. 우리는 이곳에서 배운 것을 통해 우리들의 다음 세계를 선택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배우지 않을 때, 다음의 세계는 이 세계와 마찬가지의 것이야. 넘어서야 할 똑같은 한계와 납처럼 무거운 짐이 모두 그대로 있는……."

 그는 날개를 펼치고 그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존, 너는 한꺼번에 아주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수천의 삶을 거치지 않고도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거야."

 그들은 곧 공중으로 다시 날아올라 연습을 계속했다. 대형을 유지하면서 방위점 회전을 하기는 어려웠는데, 그 까닭은 몸을 뒤집은 채, 거꾸로 생각을 해야 했고, 그의 스승과 정확히 대형을 유지하면서 날개의 커브를 바꾸어야 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해 보자." 하고 설리반이 거듭거듭 말했다. "다시 해 보자." 그러다가 마침내 "잘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고리 모양으로 밖으로 돌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야간 비행이 없는 갈매기들이 모래톱에 함께 모여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조나단은 있는 용기를 다 내서 원로(元老)갈매기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이 세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곧 가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치앙……." 하고 좀 어색하게 조나단이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가, 자네?" 노(老)갈매기는 인자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 원로 갈매기는 나이로 해서 노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인해져 있었다. 그는 이곳 갈매기 떼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날 수 있었고, 다른 갈매기들이 겨우 익히기 시작한 기술을 이미 연마해 가졌었다.

 "치앙, 이곳은 결코 하늘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원로 갈매기는 달빛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너는 또 다시 배우고 있구나, 조나단."

 "여기서는 무슨일이 생기는 거지요?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하늘이라는 곳은 없는 것인가요?"

 "없단다, 조나단, 그런 곳은 없단다. 하늘은 어떤 장소가 아니야, 또한 어떤 시간도 아니지. 하늘이란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거야."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너는 매우 빨리 날 수 있지, 그렇지?"

 "저는, ……저는 빨리 나는 게 좋아요." 하고 조나단은 깜짝 놀라서 그러나 원로 갈매기가 자기를 알아준 데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면서 말했다.

 "조나단, 자네가 완전한 속도에 이르는 그 순간, 그대는 하늘에 닿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그것은 시속 일 천 킬로미터로 혹은 일백만 킬로미터로, 혹은 빛의 속도로 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야. 왜냐하면 모든 숫자는 하나의 한계이고, 완벽한 상태란 한계가 없는 것이니까. 완벽한 속도란 '그냥 있는'거야 조나단."

 별안간 치앙의 모습이 사라졌나 보다 했더니 돌연 백 오십 미터쯤 떨어진 물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모든 것이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시없어졌고, 역시 눈 깜짝할 찰나에 조나단 곁에 서 있었다.

 "재미있지?" 하고 그가 말했다.

 조나단은 아찔할 정도로 놀랐다. 그는 하늘에 관해 묻는 일도 모두 잊고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럴 때 기분은 어떻지요?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지요?"

 "네가 원하는 아무 시각에 아무 곳에나 갈 수 있단다." 원로 갈매기가 말했다.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갔었지."

 그는 멀리 바다로 눈길을 던졌다.

 "참 이상한 일이야. 이동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해서 완벽한 상태를 비웃는 갈매기는 아무 데도 못가. 천천히라도 말야. 그런데 완벽함을 위해 이동하는 것을 버리는 갈매기는 어디에라도 즉시 갈 수 있거든. 잘 기억해 두어라, 조나단. 하늘은 어떤 장소 혹은 어떤 시간이 아니야. 시간과 장소란 전혀 의미 없는 것이니까 말야. 하늘은……."

 "그렇게 나는 법을 저에게 가르쳐 줄 수 있으신지요?" 조나단 갈매기는 또다른 미지의 것을 정복하고 싶어 몸을 떨었다.

 "배우고 싶다면 물론 가르쳐 주지."

 "배우고 싶어요. 언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좋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저도 그렇게 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하고 조나단이 말했다. 그의 두눈은 이상하게 빛났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 주세요."

 치앙은 천천히 이야기를 하며 이 젊은 갈매기를 주의 깊게 뜯어 보았다.

 "생각하는 것처럼 빨리, 어느 곳에나 다 날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네가 이미 어디엔가 도착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치앙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비결은 조나단이 자신을 제한된 육체 속에 얽매어 있는 존재로, 일 미터 남짓한 날개 길이와 도면 위에 그려 넣을 수 있는 동작을 하는 제한된 육체 속에 얽매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진정한 본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동시에 어느 곳에서나, 기록되지 않은 숫자가 완벽한 것처럼 완벽하게 살고 있음을 깨닫는데 비결은 있었다.

 조나단은 매일같이 꼭두새벽부터 자정이 넘도록 맹렬히 그 비결에 열중했다. 그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는 선 자리에서 단 한 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신념 같은 것은 잊어 버려라!" 치앙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일에는 신념이 필요 없단다. 나는 일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이해하는 것과 나는 것은 같은 것이야. 자 다시 해 봐라……."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 서서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조나단은 치앙이 자기에게 들려주던 말의 참듯을 불현듯이 깨달았다.

  "아, 그렇지! 나는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완벽한 존재다!" 그는 대단히 충격적인 환희를 느꼈다.

 "바로 그거다!"하고 치앙이 기쁜 어조로 말했다.

 조나단은 눈을 떴다. 그는 원로 갈매기와 단 둘이 전혀 낯선 해안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물가에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고, 두개의 노란 태양이 머리 위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너는 깨달은 거다, 허나 좀더 노력을 해야 제대로 조정이 될 것이다……."고 치앙이 말했다.

 조나단은 깜짝 놀랐다.

 "도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낯선 주위 광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며, 원로 갈매기는 조나단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는 분명히 초록빛 하늘과 태양 역할을 하는 두개의 쌍동이 별이 있는 어느 유성에 와 있는 거다."

 조나단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은 그가 지구를 떠난 이래 최초로 낸 소리였다.

 "되는구나!"

 "그럼, 언제나 되는 거다, 존." 치앙이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있을 때는 언제나 되는 것다. 자 이제는 제대로 조정하는 일에 관해서 ……."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다른 갈매기들이 놀라움이 역력한 금빛 눈으로 조나단을 바라 보았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못박힌 듯이 서 있던 곳에서 (순식간에 어디론가) 없어져 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서서 친구들의 축하를 받은 후 말을 꺼냈다.

 "나는 여기 신입생인데! 이제 시작인걸! 너희들에게서 배워야 할 건 오히려 난데!"

 "아냐, 그렇지 않아, 존." 가까이 서 있던 설리반이 말했다. "내가 지난 만 년 동안 보아 온 어느 갈매기보다도 너는 배우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구나."

 갈매기들은 말이 없었고, 조나단은 안절부절 못 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네가 원한다면 우리는 시간에 관한 문제부터 연구를 시작할 수 있다." 치앙이 말했다.

 "자네가 과거와 미래를 날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야. 그리고 나서 자네는 가장 어려운, 가장 힘찬, 가장 재미있는 것을 시작할 수 있게 될 거야. 날아올라서 친절과 사랑의 의미를 알게 되기 시작하는 것이지."

 한 달이 지나갔다. 아니 한 달처럼 느껴지는 기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조나단은 놀라운 속도로 배워 나갔다. 그는 언제나 평범한 경험 가운데서 쉽사리 무엇인가를 깨달아 왔는데, 원로 갈매기의 특별 지도를 받게 된 지금 마치 깃털이 달린 유선형의 컴퓨터와도 같이 그는 새로운 생각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 치앙이 떠나가야 할 날이 왔다. 그는 그들에게 배우기와 연습하기, 그리고 모든 삶의 보이지 않는 완벽한 원리를 더욱 잘 이해하려는 노력을 결코 중단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들 모두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그의 깃털은 점덤 더 밝게 빛나 갔고, 그리고 마침내는 어느 갈매기도 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빛났다.

 "조나단,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라."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들이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치앙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남에 따라 조나단은 자기가 되에 남기고 떠나온 지구에 관해 거듭거듭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상에 있을 대 만약 자신이 이곳에서 안 것의 단 십분의 일만이라도, 백분의 일만이라도 알았었다면, 삶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모래 위에 서서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곳 지상에도 자신의 한계를 깨고 나오기 위해 고군 분투하는 어떤 갈매기가 있을 것이 아닌가. 고깃배가 빵 부스러기를 얻으로 가는 수단 이상의 것에서 비상의 의미를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어떤 갈매기가 그곳 지구에 있을 것이 아닌가. 어쩌면 그곳에는 갈매기 떼들 앞에서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추방당한 갈매기조차 있을지 모르는 것이었다.

 조나단이 친절을 실행하면 실행할수록, 사랑의 본질을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더욱더 간절했다. 왜냐하면 조나단 갈매기는 그의 외로왔던 과거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도록 태어난 몸이었고, 그리고 스스로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주어지기를 기원하는 어느 갈매기에게 자기가 발견한 진리의 일부를 나누어 주는 것이야말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생각하는 속도[思念速度]로 나는 비행법에 명수가 되어 다른 갈매기들의 연습을 도와 주고 있는 설리반은 조나단의 그런 생각에 회의적이었다.

 "존, 너는 추방당한 자야. 어째서 너는 그 옛날 갈매기들이 이제 새삼스럽게 네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냐?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속담도 있지 않아, 그건 사실야. 네가 버리고 떠나 온 갈매기들은 저희들끼리 꽥꽥대고 싸우면서 땅위에 서 있는 거야. 그들은 하늘로 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 그들을 그냥 거기에 세워 두고 그들에게 하늘을 보여 주고 싶다 이말이지! 존,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날깨 끝조차 볼 수 없어! 여기 그냥 남아있어. 새로 오는 갈매기들, 네가 말해야 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높이 올라온 갈매기들을 여기에서 도와 줘." 설리반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치앙이 '자신의' 옛 세상을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어? 오늘의 네가 있을 법이나 하냐 이 말야?"

 마지막 설리반의 이야기는 정곡을 찌른 것이었고, 옳았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

 조나단은 떠나지 않고 남아서 이 세계로 들어오는 새로운 갈매기들과 함께 일을 했는데, 그들은 모두 매우 총명했고 학습에 진척이 빨랐다. 그러나 지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일어났고, 그곳 지상에도 배울 능력이 있는 한두 마리의 갈매기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조나단이 추방되던 그날 만약 치앙이 찾아와 주었다면 조나단은 지금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겠는가!

 "설리(설리반의 애칭), 나 돌아가야겠어." 그는 마침내 말했다.

 "네가 가르치는 갈매기들은 잘 하고 있어. 그들은 새로 오는 갈매기를 이끌어 가는 데 너에게 많은 도움을 줄 거야."

 설리반은 한숨을 쉬었을 뿐 입씨름을 하지는 않았다.

 "네가 없어지면 섭섭하게 될 거야, 조나단."라고만 말했다.

 "설리, 그게 무슨 말이야!" 조나단이 책망하듯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마! 우리가 매일 연습하려고 하는게 뭐지? 만약 우리의 우정이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것에 달려 있다면,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극복했을 때는, 스스로의 형제애를 깨쳐 버리게 되다는 건가? 우리가 일단 공간을 극복하면 우리에게 남는 건 '여기'뿐이고, 시간을 극복하면 남는건 '지금'뿐이야. 그러니까 '여기'와 '지금'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서로를 한두 번쯤은 만나게 되지 않겠어?"

 갈매기 설리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왔다.

 "야, 이 돌아 버린 친구야."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땅 위에 있는 갈매기에게 천 마일 밖을 보여 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정도밖엔 없겠지!" 그는 모래를 바라보았다. "나의 친구 존, 잘가"

 "잘있어, 설리.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이런 말을 하면서 조나단은 지난 날의 해변에 있던 굉장한 갈매기 떼의 모습을 생각 속에 그려 보았다. 그리고 자신은 뼈와 깃털만 앙상한 존재가 아니라, 무엇에 의해서도 제한 받지 않는 비상과 자유의 완전한 이념 자체임을 늘 그렇듯이 자연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갈매기 플레처 린드는 아직 나이가 매우 어리긴 했어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느 갈매기 떼에서도 그토록 가혹한, 그토록 부당한 처사를 당한 갈매기는 일찌기 없었다는 것을…….

 "그들이 무슨 말을 해도 상관 없어."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먼 벼랑을 향해 날아갈 때 그는 눈물이 글썽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에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개를 치며 그냥 돌아다니는 것 이상의 것이 있는걸! 그러니까……, 그러니까……,'모기'도 그런 건 할 수 있지! 그냥 장난삼아 우두머리 갈매기 주위로 한 바퀴 짧게 횡전(橫轉)했을 뿐인데, 그래서 추방당해야 되다니! 눈들이 멀었단 말인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지? 나는 법을 진정으로 배웠을 때 오게될 그 영광 같은 건 생각조차 못하는 모양이지?"

 "그들이야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어. 나는 나는게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보여 줄 테야. 그들이 원하는게 그거라면 난 철저히 법을 어기는 자가 될 테야. 그래서 그들이 몹시 후회하도록 해 줄 테야……."

 (이때) 그의 머리 속으로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 소리는 아주 부드러웠지만 그는 하도 놀라서 공중에서 멈칫하고 비틀거렸다.

 "플레처 갈매기야, 그들에게 너무 가혹해서야 쓰나. 너는 쫓아 냄으로써 그들은 그들 자신을 해쳤을 뿐이야, 그리고 어느 날엔가 그들이 그것을 알 날이 있을 게고, 네가 본 것을 그들도 보게 될 때가 있을 거야. 그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도록 도와 주어라."

 그의 오른쪽 날깨 끝에서 한 치쯤 떨어져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흰빛의 갈매기가, 깃털 하나 까딱치 않으며,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플래처의 최고 속도에 가까운 빠르기로 미끄러지듯 날고 있었다.

 이 나이 어린 갈매기는 잠시 정신이 혼란되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내가 돌았나? 저승에라도 왔단 말인가? 무슨 일인가?"

 조용하고 나즈막한, 아까의 그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으로 들려 왔다.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갈매기 플레처 린드야, 너는 정말 날기를 원하느냐?"

 "네, 날고 싶어요."

 "갈매기 플레처 린드야, 갈매기 떼들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날기를 배운 뒤에 어느 날엔가 그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깨닫도록 도와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간절히 배우기를 원하느냐?"

 플레처 갈매기가 얼마나 자랑스러움을 느꼈든 혹은 얼마나 가분이 상했든, 여하튼 이 절묘한 기술을 가진 갈매기가 거짓말을 할 리는 만무였다.

 "정말 배우고 싶어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플레처야." 그 빛나는 갈매기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아주 상냥했다.

 "수평 비행부터 시작하자……."


제 3 부


 <먼 벼랑>위 하늘에서, 조나단은 그를 지켜보면서, 천천히 선회하고 있었다. 이 거친 어린 플레처 갈매기는 비행법을 배우기에 안성마춤이었다. 그는 힘이 있으면서 몸이 가볍고, 그리고 허공중에서 동작이 잽쌌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배움에 대해 타는 듯한 의욕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지금 이 순간 급강하하여 윤곽이 흐릿한 회색의 물체처럼 윙윙 소리를 내며 시속 백 사십 킬로미터로 스승을 스치듯 지나 번개같이 날아 내려왔다. 그는 갑자기 16개 방위점 수직 저속 횡전(橫轉)을 다시 해 보았다. 한 바퀴 한 바퀴 크게 헤아려 보며,

 "……여덟,……아홉,……열, 조나단 보세요--속도가--줄어들고--있어요. ……열 하나, ……선생님처럼--탁--멈추고--싶은데, ……열 둘, ……그런데--제길할--안 되네요, ……열 셋, ……이제--마지막--세 바퀴가, ……없으면, ……열 네에에, ……아악!"

 플레처가 최고 속도에서 딱 멈추는 일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울화와 분통으로 더욱 잘 안되었다. 그는 뒤로 넘어지며 딩굴었고, 거꾸로 사정없이 뱅글뱅글 돌면서 떨어졌다. 그러다가 스승보다 삼십 미터 가량 밑으로 떨어진 곳에서 겨우 몸의 균형을 되찾고 숨을 할딱이고 있었다.

 "선생님은 저 때문에 시간만 낭비하고 계시네요. 조나단! 저는 너무 머리가 멍청하고, 바보인 모양이에요! 해 보고 또 해 봐도 안 되네요!"

 갈매기 조나단은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억지로 급하게 상승하려고 하는 한 절대로 되지 않을 거야. 플레처, 너는 방향을 바꾸는 순간에 이미 시속 육십 킬로미터나 되는 속력을 잃었다. 부드럽게 '해야'돼! 확고 부동하게, 그러나 부드럽게, 알았어?"

 삼 개월이 지날 때쯤에는 조나단은 여섯 명의 또 다른 제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모두 추방당한 갈매기들로서, 나는 기쁨을 위해 난다는, 이 새롭고 희한한 생각에 호기심들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고도의 비행 기술을 연습하는 일이, 왜 연습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일보다 오히려 더 쉬웠다.

 "우리들 각자는 실제로 위대한 갈매기의 이념, 즉 무한한 자유의 이념 그 자체란다."

 모래톱 위에서 조나단은 저녁마다 이런 이야길 하곤 했다.

 "그리고 정확한 비행은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표현키 위해 내딛는 한 걸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물리쳐야 하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고속 비행, 저속 비행, 공중 곡에 따위를 하고 있는 거란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날의 비행으로 기진 맥진하여 꾸벅꾸벅 졸기가 일쑤였다. 그들은 연습하기를 좋아했다. 연습은 재빠르고 신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더욱 커지는 배움에 대한 갈망을 채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플레처 린드마저도, 생각의 속도를 난다는 것이 과연 바람과 깃털로 나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는 믿지를 못했다.

 "너희들의 몸 전체는, 이 날개 끝에서 저 날개 끝까지……."

 또 다른 때 조나단은 말하곤 했다.

 "모두 너희들의 생각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생각이 눈에 보이는 형체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생각의 사슬을 끊어 버리면, 너희들은 육체의 사슬도 또한 끊어 버리는 셈이지……."

 그러나 그가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그들에게 그것은 재미있는 소설 이야기처럼 들렸고, 그래서 그들은 더욱 잠이 왔다.

 한 달쯤이 지났을까 했을 때, 조나단은 갈매기 떼에게로 돌아갈 때가 왔다고 말했다.

 "우리는 아직 각오가 돼 있지 않아요!"하고 갈매기 헨리 칼빈이 말했다.

 "우리는 환영받지 못해요! 우리는 추방당한 갈매긴 걸요! 환영받지도 못할 곳에 억지로 갈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에겐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자유와 우리들 자신이 우리들일 자유가 있는 거란다." 조나단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모래톱으로부터 날아올라 갈매기 떼의 본거지가 있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제자들은 잠시 고뇌에 사로잡혔다. 왜냐하면, 갈매기 떼의 법에 의하면 추방당한 자는 결코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었고, 그 법은 수만 년 동안 한 번도 어겨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법은 가지 말 것을 요구했고, 조나단은 가자고 했다. 그리고 벌써 조나단은 저 앞 바다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더 이상 지체한다면, 조나단은 적의에 찬 갈매기 떼속으로 혼자 가게 될 것이었다.

  "하기야, 우리 자신이 갈매기 떼에 속해 있는 게 아니니까 그 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어, 그렇지 않아?" 플레처가 열적어하면서 말했다.

 "더군다나, 싸움이라도 난다면 여기 있는 것보다 거기에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아니겠어."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 날 아침, 날개 끝과 날깨 끝이 거의 겹친 상태로, 여덟이서 두 개의 다이아몬드 대형으로 편대를 지어서 동쪽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시속 이백 이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갈매기 떼가 회의장으로 쓰는 해변에 이르렀다. 조나단이 앞장이었고, 그 오른쪽에는 플레처가 부드럽게 날고 있었고, 왼쪽에는 헨리 칼빈이 사기 충천하여 따르고 있었다. 그 전체 편대가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천천히 오른쪽으로 횡전했고……, 다시 수평으로……, 거꾸로……, 다시 수평으로 비행했다. 바람은 그들 모두의 위로 채찍질이나 하듯 불어 오고 있었다.

 이 갈매기 편대는 마치 거대한 한 자루의 칼이기라도 되는 듯, 갈매기 떼의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들리는 깩깩끽끽하는 소리들을 한칼에 베어 침묵시키는 듯했다. 팔 천 마리의 갈매기 눈들이 깜빡도 하지 않고 주시해 보고 있었다. 이들 여덟 마리의 갈매기는 한 마리씩 한 마리씩 날쌔게 공중으로 솟아올라 크게 한 바퀴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날아 내려오다가 속력을 딱 죽이고 모래 위에 사뿐이 내려 앉았다.

 그리고 마치 이런 일은 매일 하는 일상사이기라도 하다는 듯, 조나단은 그 비행에 대한 평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함께 모이는 과정에서 모두 다 조금씩 늦었다."

 저것들은 추방당한 갈매기들이 아닌가! 그런데 돌아왔단 말이지! 그럴 수가……, 그러수가! 하는 생각이 갈매기 떼의 머리 속으로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싸움이 있으리라던 플레처의 예상은 갈매기 떼속에서 일어난 혼란에 휩싸여서 녹아 없어졌다.

 "그래, 틀림없어, 저들은 추방당한 자들야."

 몇몇 어린 갈매기들이 말했다.

 "하지만, 이봐, 저들은 어디서 저렇게 나는 것을 배웠을까?"

 우두머리 갈매기의 말이 갈매기 떼에서 완전히 전달되기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들은 못 본 체 무시해 버려라. 추방된 자에게 말을 거는 갈매기는 그 자신이 이미 추방당한 줄 알아라. 추방된 자를 자세히 관찰하는 갈매기는 갈매기 떼의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조나단에게 회색 깃털의 등들을 돌려 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갈매기 떼의 회의장인 해변 바로 상공에서 비행연습을 행하고,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능력을 다하도록 다그치기 시작했다.

 "마아틴 갈매기!" 그가 하늘이 쩡쩡 울리도록 외쳤다.

 "저속 비행을 할 줄 안댔지. 실제로 증명해 봐라! 날아 봐!"

 그래서 얌전하고 작은 갈매기 마아틴 윌리암은 선생의 불같은 정열에 질겁한 나머지 저속 비행의 명수가 되었다. 가장 희미한 바람결 속에서도 그는 날개를 한번도 치지 않고 깃털을 구부려 모래 사장에서 구름 위로 솟아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마찬가지로 갈매기 찰즈 롤린드는 큰 산맥 바람이 불어가는 칠천 미터 상공까지 날아올랐다가, 희박하고 차가운 대기로부터 새파랗게 얼어서 내려왔지만, 놀랍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해서 내일은 더 높이 올라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보다 공중 곡예를 좋아하는 플레처는 16개 방위점 수직 저속 횡전을 드디어 해냈고, 다음날은 그것을 해 내고서 옆으로 세 바퀴 재주를 넘어 마지막을 장식했는데, 그의 깃털에 반사된 새하얀 햇살이 많은 갈매기들의 눈이 그것을 몰래 훔쳐 보고 있는 해변에 번쩍번쩍 빛났다.

 조나단은 언제나 각 제자들의 옆을 날면서 시범을 보여 주고, 충고를 하고, 다그치고, 지도를 했다. 그는 재미삼아 폭풍우와 구름과 밤의 어둠을 뚫고 제자들과 함께 날았다. 그럴 때 갈매기 떼는 땅 위에서 비참하게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며 복닥대고 있었다.

 

 비행이 끝나면 제자들은 모래톱에서 쉬었고, 또 때가 되면 조나단에게 더욱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유별난 생각을 가졌는가 하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생각도 갖고 있었다.

 점차 밤이면, 제자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은 주위로 또한 겹의 원을 그리며 갈매기들이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몇 시간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호기심 많은 갈매기들이었는데, 서로 보려고도 하지 않고 남의 눈에 띄고 싶지도 않아서 날이 밝기 전에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갈매기 떼에서 한 마리의 갈매기가 이탈하여 나와 비행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들이 돌아온 지 한 달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렇게 요청함으로써 갈매기 테렌스 로웰은 추방된 자라는 낙인이 찍힌 저주받은 새가 되었고, 그리고 조나단의 여덟번째 제자가 되었다.

 그 다음 날 밤 갈매기 커크 메이나아드가 왼쪽 날개를 질질 끌며 모래톱을 비틀비틀 가로질러와서 조나단의 발아래 쓰러졌다.

 "도와주세요." 그는 다 죽어 가는 자의 목소리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이 세상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날고 싶어요……."

 "그러면 따라 오너라." 하고 조나단이 말했다.

 "나와 함께 공중으로 올라가서 시작해 보자."

 "이해하지 못하시는 군요. 제 날개를 좀 보세요. 날개를 움직일 수 없어요."

 "메이나아드 갈매기야. 너는 지금 여기서 네 자신이 될, 너의 진정한 자신이 될 자유가 있다. 아무것도 너를 방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 위대한 갈매기의 법칙이고 실재하는 유일한 법칙이야."

 "제가 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너는 자유롭다는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빨리 갈매기 커크 메이나아드는 힘들이지 않고, 그의 두 날개를 펼치고,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가 백 오십 미터 상공에서 마음껏 소리내여 외치는 바람에 갈매기 떼가 잠에서 깨었다. -- "나는 날 수 있다! 자 들어 보시오! 나는 날 수 있다!"

 해가 뜰 무렵에는 천 마리 가까운 새들이 조나단의 제자들 둘레에 모여들어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메이나아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남들이 보든지 말든지 상관치 않았고 조나단 갈매기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는 매우 간단한 것들에 대해 -- 갈매기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 갈매기의 본질은 바로 자유라는 것, 갈매기의 본질은 바로 자유라는 것,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의식(儀式)이든 미신이든 제약이든, 여하튼 물리쳐 버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리쳐 버려야 된다구요?"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것이 갈매기 떼의 법률일 경우에도 말입니까?"

 "자유로 이끌어 가는 법만이 참된 법이다. 그 밖에 다른 법이란 없다."고 조나단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들이 당신처럼 날 수 있다고 기대하십니까? 당신은 다른 새들보다 뛰어난, 특별하고 재주있고 그리고 신성한 새입니다."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레처를 보아라! 로웰을! 찰즈 롤런드를! 쥬디리를! 그들 역시 특별하고 재주 있고 신성하단 말이냐? 너희들보다 뛰어난 것이 없고, 나보다 뛰어난 것도 없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시작했다는 것뿐이다."

 플레처만을 제외하고 그의 제자들은 불안하게 몸을 뒤척혔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다.

 질문하러 오는 새들, 숭배해 오는 새들, 경멸하러 오는 새들 등으로 매일같이 군중은 늘어 갔다.

 

 어느 날 아침, 고등 고속 비행 훈련을 마친 뒤 플레처가 조나단에게 말했다.  "갈매기들이 그러는데, 당신은 위대한 갈매기 그분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당신의 시대보다 천 년이나 앞선 갈매기라는 거예요."

 조나단은 한숨을 쉬었다. 오해로 얻은 이름이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악마 아니면 신이라고 부르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플레처? 우리들이 우리의 시대보다 앞서 있는 것이냐?"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글쎄요, 이런 식의 비행법은 언제나 여기에 있어 왔고 그것을 발견하려고 원하는 자는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시간과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유행에 앞서 있는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갈매기가 나는 식보다 앞선 식으로 날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거 근사한 이야기군." 잠시 몸을 뒤집은 자세로 날기 위해 회전하면서 조나단이 말했다.

 "시대에 앞선다는 말보다 훨씬 듣기 좋은데."

 

 그 후 꼭 일 주일 뒤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플레처가 한 학급의 새 제자들에게 고속 비행의 요령등을 시범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이천 미터 상공으로부터 급강하하여 지상에서 불과 몇 치 안되는 지점에서 방향을 틀어 회색의 긴 줄을 긋듯 총알처럼 수평으로 날고 있었다. 이때 처음 날아보는 어린 갈매기 한 마리가 어미새를 부르면서 플레처의 정면으로 곧장 날아왔다. 이 어린 갈매기를 피하기 위하여 플레처는 시속 삼백 이십 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로 날다가 순간적으로 왼쪽을 홱 방향을 틀어, 단단한 화강암 절벽에 꼰아 박았다.

 그에게 그 바위는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딱딱하고 거대한 하나의 문처럼 느껴졌다. 그가 충돌하는 순간에, 두려움과 충격과 암흑이 왈칵 밀어닥쳤고, 그리고 그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두렵고 슬프고 안타까운, 말할 수 없이 안타까운 가운데 어딘가 낯선 세계에서 둥둥 떠 가고 있었다.

 이윽고 어떤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것은 그가 처음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을 만났던 날 들은 그 목소리였다.

 "플레처, 우리가 참을성 있게 순서에 따라 우리의 한계들을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거기에 비결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계획에서 바위를 뚫고 지나 나는 일은 얼마뒤에 할 과정이다."

 "조나단이구나!"

 "위대한 갈매기의 아들로도 알려진 몸이지." 그의 스승(조나단)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거죠? 그 절벽! 나는 죽지……, 죽지 않았던가요?"

 "아, 플레처, 진정하고, 생각해 봐라. 지금 네가 내게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너는 분명히 죽은 게 아니지, 그렇지? 네가 우연히도 해 낸 일은 너의 의식 수준을 뜻밖에 느닷없이 바꾼 것이었어. 여기에 머물면서 이 수준의 것을 계속 배우든지--그런데 그것을 앞서 네가 하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야. 아니면 다시 돌아가서 갈매기 떼와 함께 일하든, 이제 선택은 네게 달려 있는 거야.

 우두머리 갈매기들은 일종의 파국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 왔는데, 네가 그렇게도 그들의 마음을 잘 알아 준데 대해 그들은 놀랐을 거야."

 "물론 저는 갈매기 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갈매기들과 이제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던 걸요!"

 "좋다, 플레처. 우리의 육체란 생각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겠지……?"

 

 플레처는 모든 갈매기 떼가 절벽 아래서 그를 에워싸고 둥그렇게 둘러서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머리를 흔들어 보고 두 날개를 펴 보고, 그리고 눈을 떳다. 그가 처음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몰려왔던 갈매기들 사이에서는 끽끽 꽥꽥 야단 법석이 났다.

 "그가 살아났다! 죽었던 그가 살아났다!"

 "한쪽 날개 끝으로 그를 건드리더니! 그를 살려 냈어! 그 위대한 갈매기의 아들이 말야!"

 "그런데 참! 그는 자기가 위대한 갈매기의 아들임을 부인했지? 그는 악마야 악마! 갈매기 떼를 분열시키러 왔어!"

 사천여 마리의 갈매기들이 모여서, 지금 일어난 일에 놀랐고, 그리고 악마라고 외치는 소리가 바다의 폭풍처럼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눈들이 초점을 잃은 채 빛났고, 부리들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조나단과 플레처를 죽여 버리기 위해 바싹 다가섰다.

 "이곳을 떠나면 기분이 좀 좋아질 것 같은가, 플레처?"

 "뭐 떠나도 괜찮겠죠……."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둘이서 일 킬로쯤 떨어진 곳에 와 있었다. 갈매기 떼의 번득이는 부리들은 빈 하늘만 쪼았을 뿐이었다.

 "어째서 그럴까?" 조나단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한 마리 새에게 너는 자유롭다, 조금만 시간을 들여 연습하면 스스로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기가 왜 그다지도 힘들단 말인가? 그것이 어째서 그렇게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주위의 풍경이 갑자기 바뀐 것에 대해 플레처는 여전히 눈을 깜박이며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신 거죠? 어떻게 해서 여기에 왔습니까?"

 "갈매기 떼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었느냐, 그랬었지?"

 "그랬었지요!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야, 플레처. 연습을 해."

 

 아침이 되었을 때 갈매기 떼는 이미 전날의 광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으나, 플레처는 그렇지 않았다.

 "조나단, 오래 전에 당신이 한 말, 갈매기 떼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배우는 것을 도와 줄 수 있을 만큼 그들을 사랑하느냐던 당신의 말, 그것을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물론이지!"

 "당신을 죽이려 했던 바로 그 갈매기의 무리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아, 플레처, 그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야! 말할 나위도 없이 미움과 악을 사랑할 수는 없는 거야. 진정한 갈매기를, 모든 갈매기들 속에 깃들어 있는 착함을 연습을 통해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 속에 있는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거야. 그것이 내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지. 그것의 비결을 터득했을 때는 기분이 좋은 거야."

 "예를 들어서, 나는 거센 어린 갈매기를 기억하고 있지. 이름은 갈매기 플레처 린드. 막 추방당해서, 먼 벼랑 위에 자신의 절망적인 지옥을 마련하면서, 갈매기 떼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참이었었지. 그런데 오늘 그는 여기에서 지옥이 아니라 천국을 꾸미며, 전체 갈매기 떼를 그리고 이끌어 가고 있는 거야."

 플레처는 스승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어렸다. "'제가' 이끌어 가고 있다고요? 당신이 스승인데, 떠나셔서는 안 됩니다!"

 "안 될까? 빛을 향해 가고 있는 이곳의 갈매기 떼보다 더욱더 하나의 스승을 필요로 하는 다른 갈매기 떼들이, 다른 많은 플레처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들어?"

 "'제가' 어떻게요? 존, 저는 한 마리의 평범한 갈매기인데, 하지만 당신은……."

 "위대한 갈매기의 독생자라 이 말이지?" 조나단은 한숨을 쉬고 바다를 내다보았다.

 "너에겐 이제 더 이상 내가 필요 없어. 너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네 자신을, 무한한 플레처 갈매기를 발견해나가기만 하면 되는거야. 무한한 플레처 그가 너의 스승이야. 그를 이해하고 그를 본받아 훈련하면 돼."

 잠시 후에 조나단의 몸은 대가 중에서 가물가물 반짝이며, 아른아른하는가 싶더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에 관한 가당찮은 소문을 퍼뜨리거나, 나를 신(神)으로 만들게 하지 말아. 알았지, 플레처! 나는 한 마리의 갈매기야. 나는 날기를 좋아하고, 어쩌면……."

 "조나단!"

 "가련한 플레처! 너의 눈이 네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믿지 말아라. 네 눈이 보여 주고 있는 모든 것은 한계뿐이야. 너의 이해력으로 보고,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찾아내라. 그러면 나는 법을 알게 될 거다."

 아른거리는 모습이 없어졌다. 갈매기 조나단은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얼마 후 갈매기 플레처는 (무거운) 몸을 이끌며 하늘로 솟아올라 아주 새로운 한 무리의 제자들을 만났다. 모두 다 첫 수업에 열심이었다.

 "우선……,"엄숙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갈매기란 무한한 자유의 이념이라는 것, 위대한 갈매기의 한 영상(影像)이라는 것, 그리고 너희들의 몸 전체는 날개 끝에서 날개 끝까지, 바로 너희들의 생각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젊은 갈매기들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야, 뭐 이래. 공중에서 재주넘는 법칙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하고 그들은 생각했다.

 플레처는 한숨을 쉬고 위로 날아올라갔다.

 "흠, 에…… 좋다."고 말하면서 그는 그들을 눈여겨 뜯어보았다.

 "수평 비행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는 조나단이 정말로 자기와 다름없이 신성할 것이 없는 새였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던 것이다.

 무한하다고 했지, 조나단?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희박한 대기를 넘어가서 '당신의' 해변에 모습을 나타내고, 그리고 당신에게 비행법에 관한 새로운 한두 가지 사실을 보여 줄 시간도 멀지 않았지!

 플레처는 자기 제자들에게 엄격한 스승으로 보이려고 애를 썼으나, 그는 불현듯, 한순간이나마 제자들 모두의 참모습을 발견했고, 그들의 참모습에 호의 정도가 아니라 사랑조차 느꼈다. 한계가 없다고 했지요, 조나단?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배움을 향한 그의 줄달음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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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
세상 구석구석 따스하고 소소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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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4월 8일

더없이 소중한 나의 바르바라!

오늘 아침은 어쩌면 이렇게 멋있을까요? 창문을 열자 태양은 환히 빛나고, 새들은 지저귀고, 그야말로 모든 것이 싱싱하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당신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바르바라, 기억나나요? 내가 당신에게 키스하던 때가?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 지금 나는 아주 행복하답니다.

 

바르바라, 나는 이 방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참, 당신은 이 집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군요? 우선 어두컴컴하고 불결한 긴 복도를 상상해 주십시오.

 

오른쪽은 창문 하나 없는 벽이고, 왼쪽에는 여관집처럼 셋방이 한 줄로 죽 늘어 서 있답니다. 난 부엌 한쪽에 칸막이를 하여 살고 있습니다. 혹 당신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방은 꽤 안정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당신 방의 작은 창문과 마주 보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나의 천사여, 거듭 말하지만 내가 이런 방에 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추측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단지 편리하다는 점에 유혹되었을 뿐이니까요. 참, 바르바라, 당신을 위해 봉선화 화분 두 개를 사 왔습니다. 이 편지와 함께 보내드리겠습니다. 안녕, 나의 천사여! 벌써 출근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귀여운 손등에 키스를 하며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4월 8일

친애하는 마카르!

 

당신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건 정말로 괴롭습니다. 그러한 선물이 당신에게 있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또 그 때문에 당신이 얼만큼 절약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마카르, 저를 속이려고 하셔도, 또 변명하려 하셔도 소용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시끄럽고 지저분한 곳에 세들어 계신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제발 저 때문에 쓸데없는 돈일랑 쓰지 마세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당신이 그다지 부자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참, 오늘 하녀 표도라가 일거리를 가져왔어요. 그 때문에 저는 하루 종일 마음이 즐거웠답니다.

 

 

4월 8일

친애하는 바르바라!

 

바르바라, 당신은 늙은 나를 놀리고 있군요! 하긴 머리칼도 희끗한 늙은이가 사랑이니 뭐니 하고 주책없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바르바라, 당신은 나의 마음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나는 단지 아버지 같은 정으로 당신을 보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나의 생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한 당신 집에 간다는 것도 함부로 할 일은 아니지요. 사람들이 보면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릴 것이 뻔하잖아요. 나의 천사여, 차라리 내일밤 교회의 기도식에서나 만나도록 합시다. 바르바라, 이젠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잘 자요.

 

 

 4월 9일

 

경애하는 마카르!

 

당신은 화를 내고 계신가요?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해 드렸다고 생각하니 정말 슬퍼지는군요. 마카르, 제가 당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전 상관없어요.

 

참, 마카르, 오늘 안나 표도로브나가 저에 대해 수소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녀는 언제까지고 저를 쫓아다닐 건가 봐요. 자기가 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나요. 저와 어머니를 굶어 죽지 않게 보살펴 주었는데 은혜를 잊어버렸다느니 어쩌구 하면서요. 안나 표도로브나 얘기가 나왔으니, 당신에게 저의 지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유년 시절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조그만 시골에서 시작되었어요. 아버지는 T현에 있는 P공작의 광대한 소유지의 관리인이었는데, P공작이 돌아가신 뒤 해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의 괴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는데, 어쩌다 집에 있는 날은 안색이 무척 어두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유도 없이 화를 벌컥벌컥 내는 등 성격까지도 아주 나빠져 버렸습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되어 빚만 산더미같이 졌다나요. 결국 아버지는 날로 수척해져 가더니, 오래지 않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살림살이를 모조리 가져가 버렸어요.

 

그 때, 안나 표도로브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의 아주 먼 친척이라고 하면서 우리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추운 겨울날, 그녀를 따라 바실리예프 섬으로 떠났답니다. 안나 표도로브나는 상당히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우리에게 꽤 친절히 대해 주었지요. 하지만 우리가 빈털터리라는 걸 알게 되자, 본성을 드러내어 못살게 굴기 시작했어요. 할 수 없이 우리는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일거리를 받아 삯바느질을 했지요. 바느질에다 온 힘을 쏟아 붓던 어머니는 점차 몸이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 무렵 저는 남몰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집에 하숙을 하고 있는 포크롭스키라는 가난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어, 브이코프라는 지주의 손에서 자랐답니다. 브이코프 씨는 안나 표도로브나의 친구였으며, 또 포크롭스키의 어머니와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 집도 브이코프 씨가 소개해 주었고요. 아무튼 저는 그에 대한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순 없고 하 여, 항상 그를 곯려 줄 궁리만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늘 저를 말괄량이 취급했습니다.

 

그 날도 그런 마음이었겠지요. 저는 포크롭스키가 외출한 사이에 그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의 방은 그다지 깨끗하거나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다섯 개의 책꽂이에 책이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이렇게 학식이 높은 사람에게 저 따위는 아무런 관심거리도 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요. 저는 불현듯이 그의 책들을 남김 없이 읽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답니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뽑아 드는 찰나, 복도에서 인기척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 넣기 위해 선반의 책들을 죽 밀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선반을 지탱하고 있던 녹슨 못이, 마치 이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힘없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선반 한쪽이 털썩 하고 내려앉으면서 책들이 방바닥에 와르르 쏟아졌지요. 바로 그 때, 문이 열리면서 포크롭스키가 들어왔습니다.

 

“도대체 언제쯤에나 철이 들 거야?”

 

하고 그는 저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당황하여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 방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 후 전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어머니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습니다. 저는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잔 채 어머니를 돌봐야 했지요.

 

어느 날 밤, 밀려드는 피로 때문에 깜빡 잠이 들었던 저는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지요. 그러자 포크롭스키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그의 팔에 안겨 있었습니다. 저는 밤새 한 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설렘이 온몸으로 번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부터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되었지요. 어머니가 편찮으신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매일 밤 몇 시간씩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늘 가까이에서 그를 위로해 주고 싶다고……. 그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저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없이 괴롭고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습니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전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의 두 손을 잡아 키스를 하더니, 자기 가슴에 가만히 갖다 대었습니다. 그는 감동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의 가슴은 아주 따뜻하게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집에 이사 온 후로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즐거웠던 나날은 너무나 짧고, 그것을 대신할 슬픔과 불행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앓고 있는 동안, 매일 그의 머리맡에 붙어 앉아 간호를 했습니다. 포크롭스키는 이따금 제 얼굴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대개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가을이 깊어 가던 10월의 어느 날,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장례를 치른 뒤, 저는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마지막 남은 친구인 어머니를 힘주어 껴안았습니다. 어머니를 죽음의 신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온 몸을 떨며 흐느껴 울었지요. 그러나 죽음의 신은 이미 어머니의 곁에도 다가와 서 있었습니다.

 

마카르, 이런 걸 편지에 써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저의 이러한 심정을 이해해 주시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쓸쓸한 마음을…….

 

 

6월 12일

그리운 바르바라!

 

어제는 옆방에 사는 라타쟈예프와 함께 문학 모임에 나갔답니다. 문학은 정말 좋은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든든하게 하고, 또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지요. 그들 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바라, 만일 이 세상에 『마카르 제부시킨 시집』이라는 책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길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이, “저기 작가이며 시인인 제부시킨 씨가 지나간다. 저기 봐, 바로 저 사람이야.” 하고 소리를 치겠지요. 참, 바르바라, 당신을 위해 책을 한 권 사 왔습니다. 그리고 사탕도 보내 드릴게요. 사탕을 먹을 때마다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6월 27일

마카르!

 

어느 분이 저의 딱한 처지를 동정해서 가정교사 자리를 알선해 주겠다고 합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세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당신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카르, 당신은 왜 요즘 저를 만나러 오시지 않나요?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노라면 무척 쓸쓸해진답니다.

 

 

6월 28일

사랑하는 나의 바르바라!

 

제발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다른 지방으로 가겠다니? 난 단연코 반대입니다. 차라리 내가 헌 셔츠 하나를 걸친 채 거리를 떠돌아야 하는 한이 있다 해도 당신을 불편하게 하진 않겠습니다. 바르바라,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당신이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에게 찾아가고 말고요. 곧 찾아가겠습니다. 바르바라, 부디 마음을 가라앉혀 주십시오.

 

 

7월 1일

사랑하는 마카르!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이렇게 좋은 자리를 거절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 곳 생활이 괴롭고 쓰라릴 수도 있지만, 매일매일의 빵만은 어김없이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전 항상 몸이 아프잖아요. 그래서 당신처럼 늘 일을 할 수도 없지요. 대체 어떻게 해야 조금이나마 당신에게 도움이 될까요? 전 정말 당신에게 필요한 여자일까요? 다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발 저를 붙잡지 말아 주십시오. 잘 생각해 보세요.

 

 

7월 1일

바르바라, 그건 정말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이 부족한 거죠? 당신은 사랑받고 있고, 또 당신도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바르바라, 당신이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나는 때때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내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또 당신의 답장을 받고…….

 

그런 일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네바강에 몸을 던져 죽을 지도 모릅니다. 당신 없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아아,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당신은 내가 영구차에 실려 볼코보의 묘지로 운반되길 바라는군요.

 

너무하십니다, 바르바라. 정말로 너무하십니다. 나를 떠나려 하다니요? 아아, 나의 소중한 사람이여, 제발 당신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생각은 깡 그리 내쫓아 버리십시오. 바르바라, 반드시 마음을 돌려 이 늙은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십시오.

 

 

7월 6일

마카르!

 

너무 절망하지 마세요. 좋은 일자리가 생겼을 땐 마땅히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 리고 당신은 저 때문에 월급까지 가불하신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병이 났을 땐 옷까지 파셨다는 것도 알고요. 그 때문에 저는 괴로움에 빠졌던 거예요. 아아, 마카르! 그 동안 당신이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도움은 늘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받아 오기만 것이 지금은 경솔한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이 사 주신 모든 물건들이 이제는 전부 저를 슬프게 하는군요. 그리고 마카르, 왜 그렇게 분별 없는 생활을 하시나요?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이 술에 취해 길가에 쓰러져 계신 걸 경관이 발견하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면서요? 마카르, 제발 부탁이니 마음을 가라앉혀 주세요. 당신은 나 때문에 빚까지 져 집주인과도 안 좋은 일이 있다지요? 당신이 그런 사실을 모두 숨겨 왔기 때문에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온 거예요.

 

 

7월 28일

더없이 소중한 나의 바르바라!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했지만, 그런 건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주인 여자가 몇 차례 꽥꽥댄 일은 있지만, 당신이 보낸 10루블로 빚의 일부를 갚고부터는 별말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일시적인 혼란에 휩싸여 있긴 하지만,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여 성실하게 맡은 바 직무를 다하고 있고요.

 

그러니 당신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내가 괴로워하는 건 이 늙은이가 당신을 도와주기는커녕 되레 신세를 지게 돼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아, 바르바라! 이번엔 당신이 죄를 저질렀습니다. 무례하게도 어떤 녀석이 당신에게 청혼을 했다면서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단숨에 집을 뛰쳐나가, 그 괘씸한 녀석을 찾아갔지요. 그리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말을 지껄였는지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저 정신 없이 떠들어 댄 것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입니다. 그러다 그 자리에서 쫓겨났지요. 그 순간 계단에서 미끄러진 거고요. 이게 전부입니다.

 

바르바라, 난 지금 당신과 말다툼할 용기도 없습니다. 당신은 마치 나에게 은혜를 보답할 기회가 주어졌다고 기뻐하는 것 같군요. 바르바라, 이제 빚 얘기는 그만하도록 합시다. 이 나이에 돈을 함부로 썼다고 비난을 듣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난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입니다. 요즘은 직장에 나가서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문득문득 사람들이 당신과 나 사이를 눈치 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옆방에 사는 라타쟈예프가 다 지껄여 버린 모양입니다. 어제 당신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갔을 때, 주인 여자가 나를 가리키며, “저봐, 악마 같은 늙은이가 나이 어린 계집애하고 붙었구려.” 하면서 당신에 대해서까지 함부로 지껄였습니다. 난 이제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가 없을 듯합니다. 나의 천사여, 이젠 숨겨 봐야 소용도 없지만, 아마도 우린 신의 노여움을 받은 모양입니다.

 

 

8월 2일

경애하는 마카르!

 

제발 아무 염려도 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일이 잘 되도록 하느님이 지켜 주실 거예요. 저에게 있었던 유쾌하지 못한 일에는 아마 안나 표도로브나가 관계되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전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당신도 주인 여자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마십시오.

 

 

8월 4일

친절하신 마카르!

 

얼마라도 좋으니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돈을 좀 구해 주세요. 당신의 입장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런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지만, 제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아시면……. 전 더 이상 이 집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요.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어제 아침, 지난번에 무례를 저지른 장교의 큰아버지라는 노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붙잡고 어떻게 지내는지, 뭘 하며 지내는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대답은 듣지도 않고, 조카는 아주 경망스런 놈이니 이제부터는 자기가 보호해 주겠다나요. 그러더니 제 볼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당신은 참 아름답군. 볼우물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어.” 하고 중얼거리며 키스를 하려 들지 않겠어요? 그 때 마침 표도라가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 남자를 방에서 내쫓아 버렸답니다. 안나 표도로브나가 한 짓이 분명해요. 그러니 마카르,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나중에 다 갚을게요. 모른 척 하지 말아 주세요. 당신에게 이런 걱정을 끼쳐 드리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지 만, 저로서는 당신밖에 달리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8월 4일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이 무슨 청천 벽력 같은 일입니까? 그런 무서운 소리를 듣고 나니, 온 몸이 다 떨립니다. 반드시 당신을 구해 내겠어요. 아아, 바르바라, 나의 귀여운 사람, 당신에게 바느질을 하게 하고, 돈 때문에 머리를 아프게 하고, 눈을 따갑게 하다니… …. 난 정말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이번엔 당신을 꼭 지키겠어요. 나의 천사,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8월 5일

누구보다도 친절한 마카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당신만이라도 절망하지 말아 주세요. 일이 잘 되지 않는다 해도 하는 수 없잖아요. 마카르, 제 일로 너무 마음 졸이지 마세요. 그 때문에 당신 일은 모두 팽개쳐 버리셨죠? 오늘 퇴근길에 들러 주신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겁을 먹은 표정……. 아주 절망적이었어요. 돈을 구하지 못하신 것 때문에 제가 슬퍼할까 봐 두려우셨던 거죠? 마카르, 제발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일이 잘될 거예요.

 

 

8월 5일

나의 사랑스런 바르바라!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내가 돈을 마련하지 못했는데도 당신은 불행해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나도 안심입니다. 당신이 이 늙은이를 버리지 않고 그 하숙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 아닙니까? 앞일을 미리 생각하여 쓸데없이 근심하는 게 좋지 않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걱정과 고생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설사 추운 겨울날에 외투도 입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은 채 살아야 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라 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지껄이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뭐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그 사람들을 위해 외투를 입고 구두를 신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늘 아침엔 여느 때보다 일찍 거리로 나섰습니다. 출근하기 전에 돈을 좀 빌려 볼 생각이었죠. 비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어서 거리는 온통 진창길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길모퉁이에서 때와 기름에 절은 옷을 입은 노동자들의 무리와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내 몸을 툭툭 치며 지나가더군요. 그 바람에 나는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지요. 정말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그 꼴로 돈을 빌리기는 다 틀렸으니까요. 그래서 돌아설까 하다가, 되든 안 되든 부딪혀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집 문을 열었지요. 그런데 하필이면 지저분하고 꼴사나운 개 한 마리가 뛰쳐나와 미친 듯이 짖어 대는 게 아닙니까? 나는 얼떨결에 그 집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오오, 그런데 현관으로 뛰어들다가 커다란 통에 우유를 따르고 있던 노파한테 걸려서 우유를 몽땅 엎질렀지 뭡니까? 노파는 욕을 마구 퍼붓더군요.

 

소동이 일어나자, 도둑놈 같은 눈초리를 한 사나이가 나타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찾아온 용건을 간단히 말했지요.

 

“40루블 가량 빌려 주실 수…….”

 

 “담보물은?”

 

나는 그의 눈빛을 보는 순간, 이미 일이 틀려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담보물은 없지만 내 옆자리에 앉는 예멜리안 이바노비치의 소개니까……, 하고 사정을 설명했지요.

 

“나는 돈이 없습니다. 예멜리안 이바노비치가 뭐라고 했든 나는 돈 같은 것 갖고 있지 않아요. 자, 얼른 돌아가시오. 서 있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까… ….”

 

순간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 나는 어떻게 그 집을 빠져 나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몸이 얼어붙어서 덜덜 떨면서 가까스로 직장에 출근을 했습니다. 현관에서 옷에 튄 진흙을 옷솔로 털려고 했더니, 글쎄 옷솔이 상한다고 수위가 빼앗아 버리지 뭡니까?

 

바르바라,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퇴근을 하고 돌아왔더니, 라타쟈예프가 누군가의 편지를 소리 높여 읽고 있지 않겠어요? 그것은 바로 내가 당신에게 쓴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떨어뜨린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마구 떠들어대면서 뱃살을 움켜쥐고 웃어대더군요. 나는 라타쟈예프를 향해 ‘ 배신자’라고 소리 쳤습니다. 그러자 라타쟈예프는,

 

“너야말로 여러 여자를 정복하였으니, 로벨라스(리처드슨의 소설 「클라리사 할로」에 나오는 주인공. 바람둥이의 대명사)로군!”하며 대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로벨라스라고 부릅니다. 하인놈들 까지 한 패가 되어 나를 모욕한답니다. 팔리돈이란 하인에게 소시지 가게에 가서 소시지를 좀 사 오랬더니 말을 안 듣더군요. 그래서 그게 네 의무가 아니냐고 했더니, “천만에요! 난 우리 주인 아주머니한테만 의무가 있지 당신한테는 의무가 없습니다.”하고 대꾸를 하는 겁니다. 나는 하인놈에게 모욕을 받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서, “너 취한 게로구나. 이 못난 놈아!”하고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봐요, 당신이 언제 나한테 술값이라도 집어 준 적이 있던가요? 아마 자기가 먹을 술 한 잔 값도 없을걸. 나이 어린 계집애한테 20코페이카짜리 돈푼이나 얻어 쓰는 주제에…….”하고 지껄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르바라, 어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을까요?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르바라,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건 돈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푸대접입니다. 그들의 냉랭한 표정과 비웃음, 쑥덕거럼, 그런 것들이지요. 아아, 나의 황금 시절은 다 가 버렸습니다. 마음이 울적하군요.

 

 

8월 14일

마카르!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되신 거죠? 하느님까지 잊어버리셨나요? 마카르, 당신이 저를 이토록 비참하게 하실 줄은 몰랐어요. 이제 전 우리 집 층계도 오르내릴 수 없게 되었어요. 모두들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이니까요.

 

“저 계집애가 술주정뱅이한테 붙었다는구나. 어제도 그 하급 관리가 잔뜩 취해 서 끌려왔다더군.”

 

이런 말을 듣는 저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게다가 여주인은 당신을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지요? 당신은 현관에 쓰러져서 밤을 새우셨다지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아시나요? 제발 저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왜냐 하면 저는 당신 한 분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언제까지나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니까요. 자꾸만 불행해지지 말고 꿋꿋이 견뎌 주세요.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명심하시고요. 그렇다고 부끄러워하시지는 마세요. 당신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고치신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연이은 불행이 덮쳐 오기 때문에 이제 저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곤경에 처해 있는 당신을 어떻게든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에 은화 30 코페이카를 보내 드립니다.

 

 

8월 19일

바르바라!

 

사랑하는 바르바라, 정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마음을 좀 풀어 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 그렇게 나쁜 짓입니까? 어쨌든 그렇게 좀 취해 있는 동안은 다 떨어진 구두창이나 낡아빠진 외투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은 마음대로 술도 마실 수가 없는 건가요? 다들 무엇 때문에 나를 욕보이고 경멸하는 거죠? 편지를 읽어보니 당신은 마음이 몹시 상했군요.

 

아니에요, 바르바라. 내가 나빴습니다.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탈선을 해 버린 겁니다. 하지만 악의는 없었어요. 당신은 또 돈을 보냈더군요. 당신이 보내 온 돈을 바라보노라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합니다.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인간입니다. 구두창보다도 나을 게 없는 인간이죠. 사랑하는 바르바라,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난 외톨이였습니다. 당신이 나의 어두운 생활에 빛을 비추어 준 겁니다. 이제 나도 마음의 안 정을 되찾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리라 했는데, 운명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군요.

 

바르바라, 오늘은 당신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고로호바야 거리에 갔었거든요.

 

호화롭기 짝이 없는 거리더군요. 그 곳엔 훌륭한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그 사이를 눈부실 만큼 현란한 마차들이 신나게 내달았습니다. 그 속엔 귀부인들이 앉아 있었지요. 하나같이 화려하게 차려 입은 걸 보면 모두 공작의 딸이거나 백작의 부인이 틀림없겠지요.

 

나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아아, 귀여운 바르바라! 당신을 생각하자 가슴 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토록 불행할까요? 당신은 다정하고 아름답고 학식도 있는데 어찌하여 그런 불행을 짊어져야 합니까? 도대체 저 사람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그런 마차를 타고 다닌다면 어떨 까요?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장군이나 귀족들이 당신의 상냥한 눈길 을 붙잡으려고 야단들일 겁니다. 당신은 그 낡아빠진 무명 옷 대신 금실로 수놓은 비단 옷을 입겠지요.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아니 그림자 만 보아도 행복해질 겁니다.

 

정말로 오늘은 나를 감싸고 있는 가난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바르바라, 연기 자욱한 어느 길모퉁이에 개집이나 다름없는 방 안에서 한 직공이 잠을 자다 깨어났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구두 꿈만 꾸었지요. 어제 잘못 재단한 구두 꿈을 말이에요. 그는 구두를 만드는 직공이거든요. 그래서 꿈도 그런 것밖에는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두 꿈은 다른 사람도 꿀 수 있습니다. 방 안을 훌륭하게 치장한 큰 부자가 역시 전날 밤에 구두 꿈을 꿀 수도 있겠지요. 다음날에 있을 무도회에 신고 나갈 멋진 구두를 고르느라 고심하는 꿈을…….

 

바르바라,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알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직공이라는 겁니다. 바르바라, 건강하시오. 당신을 생각하면 이렇게 병든 마음도 신기한 약을 먹은 듯 금방 가벼워지니까요.

 

 

9월 9일

 

사랑하는 바르바라!

 

나는 정신없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사무실에서 굉장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 나는 매우 흥분해 있습니다.

 

어제 일부터 말해야겠군요. 내가 출근을 하자마자, 치모페이 이바노비치가 중요하고 급한 서류라면서 정서(글씨를 깨끗이 쓰는 일)를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어요. 가슴속은 냉랭하고, 마음은 어둡고, 머릿속은 당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그렇다고 안 할 수가 있나요. 할 수 없이 한 줄 한 줄 써 나갔죠. 그런데 어떤 악마가 나를 부추겼는지, 아니면 그렇게 될 운명이었는지, 아무튼 결재 내용 중에서 한 줄을 빼 버린 채 다음 줄을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서류를 거기까지 만드는 데도 시간이 꽤 많이 걸렸기 때문에 다시 쓸까 하 다가 그냥 내버려두었답니다.

 

그런데 오늘 막 출근을 했을 때였습니다. 치모페이 이바노비치가 나를 급히 부르지 않겠어요?

 

“이봐, 제부시킨! 얼른 각하께 가 보게. 자네는 그 서류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단 말일세.”

 

나는 죽은 사람처럼 핏기를 잃었습니다. 이윽고 멍한 표정으로 각하의 집무실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인사조차 잊어버렸죠. 너무나 겁을 먹고 있었거든요. 입술도 다리도 온통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각하는 몹시 노한 어조로, “자네, 도대체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하나? 이게 얼마나 중요한 서륜 줄 알아?” 나는 사과를 드리려고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내 단추가, 그 괘씸한 놈의 단추가 별안간 실을 끊고 떨어지더니 툭 튀어서 각하 의 발 밑으로 날아갔습니다. 내가 각하께 하려던 변명과 사과를 단추가 해 버렸던 겁니다. 아, 그 순간 차렷 자세로 가만히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나는 단추를 주우러 허겁지겁 달려갔습니다. 몸을 굽히고 단추를 잡으려고 하자, 그것은 요리 조리 굴러가면서 좀체 잡히지 않더군요. 각하는 나의 행동을 지켜보시더니, 치 모페이 이바노비치를 향해, “어떻게 된 건가? 저 사람 왜 저래?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거야?” “저, 각하, 하지만 여태까지 실수라곤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아주 모범적인 직원입니다.”

 

“그럼 저런 궁색한 꼴은 하지 않게 해줘야 하잖겠나? 가불이라도 해주든가… ….”

 

“벌써 오래 전부터 가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매우 곤란을 겪고 있는 모 양입니다.”

 

“좋아, 제부시킨, 이리 와 보게.”

 

각하는 나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지갑에서 1백 루블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잘것없는 나의 손을 잡고 흔들며, “자, 이제 가 봐도 좋네. 이번은 그냥 넘어갈 테니까 다시는 틀리지 않도록 하 게.”

 

바르바라, 그 순간 나는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나를 낳아준 아버지를 위해선 빌지 않더라도 각하를 위해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빌어 달라고 할 작정입니다. 각하는 그 악수로써 나의 영혼을 되살아나게 하고, 나의 생활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바르바라! 지금 내 마음은 굉장히 두근거립니다. 당신에게 45루블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20루블은 주인 여자에 게 주고, 35루블은 수중에 남겨 놓을 생각입니다. 지금 내 기분은 아주 평온합니다. 나중에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사랑, 안녕히…….

 

 

9월 23일

친애하는 마카르!

 

며칠 동안 편지를 한 장도 드리지 못했군요. 당신에게 주어진 행운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카르, 왜 이렇게 많은 돈을 보내셨어요? 조금씩이 라도 저축을 하셔서 또다시 불행한 일을 만나지 않도록 하셔야죠.

 

마카르, 그 동안 저에게도 커다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답니다. 사실은 그저께 브이코프 씨가 찾아왔어요.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죠. 안나 표도로브나의 친구라 고……. 그 사람은 큰 소리로 웃으며 다짜고짜 방안으로 들어섰어요. 그리고 백 지장같이 창백한 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별안간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글쎄, 결혼을 신청한다는 겁니다.

 

“나는 당신에게 결혼을 신청합니다. 지금 불현듯 당신 명예를 회복해 드리는 것 이 나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부자니까 당신을 내 영지가 있는 시골로 데려가서 토끼 사냥을 하며 즐겁게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소. 당신은 정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군요. 이대로 한 달만 더 내버려두면 당신은 죽어 버릴 겁니다.”

 

저는 그 사람이 결혼해 달라고 하는 말에 너무 놀라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바보같이 왜 울어 버렸을까요? 그 사람은 제 눈물을 감사의 표시라 생각한다며, 당신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자기로서는 제가 당신에게 빚을 진 채로 있게 하고 싶지는 않다나요? 자기가 대신 5백 루블 정도 주면 넉넉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제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아무튼 자기의 청혼을 깊이깊이 생각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인 뒤, 수틀 위에 5백 루블을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심했답니다. 마카르, 그 사람과 결혼하겠어요. 저의 이 치욕을 씻어 주고,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가난과 불행에서 저를 구해 줄 사람이 있다면……. 제가 장차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체질이 약해서 앞으로도 남들에게 폐만 끼칠 거 예요. 물론 제가 가려는 길이 천국일 리 없다는 거 잘 알아요. 제가 행복해질지 어떨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입니다. 다만 브이코프 씨는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저를 아껴 주실 것이고, 또 저도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9월 23일

사랑하는 바르바라!

 

물론 당신은 이제 행복해지겠지요. 아무런 불편도 없이 살아가겠지요. 사랑스런 나의 천사여,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토록 서두르는 겁니까? 이제 편지는 어떻게 하죠? 나는 혼자 남아서 무얼 할 수 있을까요? 바르바라, 아니 아니, 안 됩 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밖을 보세요. 비가 물통을 뒤집어 엎은 것처럼 쏟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마음까지 얼어 버릴 겁니다. 바르바라, 어두워지면 당장 당신을 만나러 가겠어요. 기다려 주십시오.

 

 

9월 27일

친애하는 마카르!

 

저희는 닷새 후에 결혼식을 올리고, 그 다음날에는 이 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준비할 것이 너무나 많아서 이젠 아주 지쳐 버렸습니다. 브이코프 씨 말로는 자기 의 아내가 남의 집 하녀와 같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녀서는 곤란하다는 거예요.

 

마카르 알렉세예비치, 부탁드릴 게 있어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고로호바야 거리 의 시폰 부인을 찾아가셔서 우선 저한테 바느질하는 여자 두서너 명을 보내 달 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어제 본 견본대로 비단 레이스의 모양을 꼭 바꿔 달라 고 하시고, 또 다른 견본도 보내 달라고 전해 주세요. 마카르, 여러 가지로 귀찮은 심부름으로 수고를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화가 나신 건 아니시겠죠? 오 늘 제 몸이 많이 불편하거든요.

 

 

9월 27일

바르바라!

 

당신이 부탁하신 일은 모두 그대로 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시내에 있는 상점이라는 상점은 모조리 돌아다녀도 좋습니다. 나의 천사여, 나는 오늘도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 집 앞에 두 번이나 갔었지요. 하지만 줄곧 브이코프 씨가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9월 28일

마카르!

 

미안한 부탁을 또 드려야겠어요. 지금 곧 보석상에 좀 다녀오시겠어요? 진주와 에머랄드 귀걸이는 만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브이코프 씨가 그건 너무 사치스럽다고 화를 내었어요. 이렇게 돈이 많이 들 줄 알았더라면 애당초 결혼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식을 올리는 대로 곧 출발하자고 합니다. 손님도 부르지 않겠대요. 마카르, 이제 전 어찌 될까요?

 

 

9월 29일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나는 이제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바쁘고 중요한 때 에 병이 들다니 참으로 원망스럽습니다. 이젠 편지를 쓰지 말아야겠어요.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바르바라, 알다시피 난 매우 우둔하고 단순한 사나이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써 버리곤 하여, 나중에 당신 이……. 아, 아닙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르 바라, 행복하게 살아 주십시오. 당신만 행복해진다면 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누가 우리의 편지를 전해 주죠?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은데…….

 

내게 당신이 빌려 준 책이 한 권 남아 있습니다. 이 책만은 가져가지 말고 내게 주십시오. 사랑하는 바르바라, 그 책이 매우 읽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이제 겨울이군요. 밤이 길어지면 무척 쓸쓸해지겠죠. 그리고 난 하숙을 옮겼습니다. 전에 당신이 있었던 그 집으로요. 이젠 텅 비어 버린 당신 방을 구석구석 살펴보곤 합니다. 그 방에는 당신의 손때 묻은 수틀과 그 위에 자수를 놓다 만 천 이 고스란히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써 보낸 편지를 접어 실을 감았더군요.

 귀여운 바르바라, 이젠 그만 써야겠어요. 안녕.

 

 

9월 30일

더없이 소중한 마카르!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는 하느님의 뜻 에 따를 뿐입니다. 내일 저는 떠납니다.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요 은인인 마카르! 마지막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저를 잊지 마시고, 저 때문에 상심하지 마시고 부디 행복하게 지내 주세요. 하느님의 축복이 당신의 머리 위에 내리기를 빌겠어요. 저는 늘 당신을 생각할 겁니다. 지난 추억 속에 즐거웠던 기 억 몇 가지를 새로운 생활로 가지고 갑니다. 그 중에서도 당신에 대한 추억은 더욱 소중하게 되살아나겠지요. 당신은 저의 유일한 친구였어요. 당신만이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저의 웃는 얼굴만 보고도, 저의 편지 한 줄로도 행복해 하셨지 요.

 

이 세상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친구 마카르! 당신을 이토록 깊이 사랑했던 당신의 바르바라를 생각해 주세요. 당신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든 당신에게 다녀오려 했지만, 브이코프 씨가 틈을 주지 않는군요. 사랑하는 이여, 그리운 분이여, 아아,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에게로 달려가 당신의 가슴에 매달리고 싶습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저 의 가슴은 지금 눈물로 가득 차 있어 당장 터져 버릴 것만 같답니다.

 

 

9월 30일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여운 바르바라!

 

당신은 끝내 가 버리고 마는군요. 아아, 당신을 빼앗길 바에는 차라리 내 심장을 빼어 던지는 게 낫겠습니다. 당신은 어쩌자고 울면서 떠나가나요? 편지지가 온통 눈물에 젖어 있더군요. 결국 당신은 가고 싶지 않은 거군요. 그 곳에 가면 당신 의 마음은 쓸쓸하고, 서글프고, 차디차게 얼어붙을 겁니다. 아아, 사랑하는 바르바라, 도대체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결심을 했습니까? 무덤 속으로 가는 거나 다름없어요. 나의 천사여,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죠? 말렸어야 하는 것을…….

 

아아, 바르바라, 마차 바퀴에 몸을 던져서라도 당신을 보내지 않겠습니다. 아니에요. 당신과 함께 가겠습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쫓아가겠습니다. 바르바라, 그 렇게도 지주의 부인이 되고 싶었습니까? 나는 앞으로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러야 합니까? 나는 어디에 가서 당신을 찾아야 합니까? 바르바라, 난 이런 불행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죽어 버리고 말 거예요. 아아, 그리운 바르바라, 난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내가 직장에 나가 일을 하는 것도, 산책을 하는 것도, 원고 정서를 하는 것도 모두 당신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바르바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가다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당신은 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도시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마차가 망가지고 말 겁니다. 바르바라, 말해 주십시오. 브이코프 씨와 함께 갈 수 없다고……. 여기에 남겠노라고 말해 주세요. 당신에게 그 사람은 뭐죠? 별안간 브이코프란 사나이가 그리운 존재로 변했단 말입니까? 당신에게 예쁜 장식이 달린 옷을 사 주었기 때문인가요? 나도 월급을 타면 그까짓 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바르바라, 안 됩니다. 이것이 마지막 편지가 되어 버리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 편지가 마지막이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내 문장도 틀이 잡혀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아, 아니에요. 문장 따위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단지 당신에게 몇 줄이라도 더 쓰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아, 나의 귀여운 바르바라, 나의 그리운 바르바라, 나의 사랑하는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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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퇴역한 군의관의 아들로 탄생. 1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 (St. Petersburg)로 보내져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공병학교로 진학하였으나 기술적인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44년 소설 번역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그는, 1846년 가난한 청년과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빈민의 삶과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 소설 『가난한 사람들』(Poor Fork)을 발표한다. 1848년 사회주의 이론을 연구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1849년 이 단체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감옥에 갇히고 총살형을 선고받지만, 총살되기 몇 분 전에 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취소되어 시베리아의 옴스크(Omsk)로 유배된다.

옴스크에서 4년간은 강제노역을 하고 또 다른 4년은 국경수비대의 말단 사병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수용소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경을 탐독하여 그가 젊은 시절 가졌던 무신론을 거부하고 윤리적 이상과 고난을 통한 구원 등을 확신하게 되며, 또한 온갖 부류의 죄수들을 통해 러시아 민중의 실체를 깨닫는다. 한편 이 시기의 고통은 그에게 간질을 유발시켰으며, 이후 그는 평생을 간질로 고생한다.

1854년 수용소에서 석방된 그는 몽고 근처 세미팔라틴스크의 보병대대에 배치되고, 그곳에서 하급관리의 미망인과 결혼한다. 1859년에 폐렴을 앓던 아내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861년 러시아 유형문학의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 『The House of the Dead』와 고난을 통한 구원을 주제로 한 『The Insulted and Injured』 가 완성되며, 1863년 서구문화의 공허함을 지적한 그의 수필 『Winter Notes on Summer Impressions』가 완성된다.

1864년 물질문명과 전체주의를 비판한 작품 『Notes from the Underground』를 출간하지만, 병을 앓던 아내가 죽고 경제적 후원자이던 동생마저 죽어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진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사악한 출판업자와 단시간 내에 새로운 장편소설을 한 편 완성하지 못하면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넘기기로 합의한다. 마감을 두 달 앞두고 그는 룰렛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토대로 『The Gambler』를 완성하는데, 이 때 시간이 촉박해 안나라는 19세의 속기사를 고용하게 되고, 이후 그녀는 그의 아내이자 문학적 동료가 된다.

도박 특히 룰렛을 좋아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수년간 채권자를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외국에서 생활했으며, 그 시기에 그의 걸작 『죄와 벌』(1866)과 『백치』(1869) 등을 완성한다. 1873년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온다. 1873년 『작가의 일기』를 연재하며 활동을 시작, 1880년에는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된 『카마라조프의 형제들 』를 발표한 후,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폐출혈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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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진건(玄鎭健, 1900-1943, 빙허 憑虛)
경북 대구생(대구우체국장으로 아들로 출생)
일본 도쿄 독일어 전수 학원 졸업.
중국상해 호강대학에 다니다 귀국, 서울에 정착.

<업적>
① 근대 문학 형성기의 선구자 역할
② 김동인과 함께 근대 단편 소설을 개척
③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 문학 개척
④ 소설 문학에서 기교의 가치를 보여준 대표 작가

<작품 연보>1)제 1기 : 체험소설(주로 1인칭)
1920년 <개벽(開闢)>에 단편 <희생화>발표 후 문단 등단
1921년 <빈처(貧妻)><술 권하는 사회> 등으로 문명
1922년 [백조(白潮)] 동인 <타락자(墮落者)><유린(蹂躪)> 등
1923년 <지새는 안개>
2)제 2기 : 전형적인 사실주의적 경향
1924년 <운수 좋은 날>, 1925년 <B사감과 러브레터>
1926년 <사립 정신 병원장>
1927년 <해 뜨는 지평선> 등 단편 발표, 염상섭과 함께 사실주의적 단편문학 개척 선구자적 업적
3)제 3기 : 그 이후 활동 미미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년간 복역,신문사(동아일보)를 물러남.
1939년 장편 <적도(赤道)>
1940년 <무영탑>
-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양계를 하다가 실패, 불우한 만년(병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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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현진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무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민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옷을 한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도 곧잘 철철대이거니와 중국말에도 그리 서툴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꼬마데 오이데 데스까?(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첫마디를 걸더니만, 도꼬가 어떠니, 오사까가 어떠니, 조선 사람은 고추를 끔찍이 많이 먹는다는 둥, 일본 음식은 너무 싱거워서 처음에는 속이 뉘엿걸다는 둥, 횡설수설 지껄이다가 일본 사람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끊은 꼿꼿한 윗수염을 비비면서 마지못해 까땍까땍하는 고개와 함께 "소데스까(그렇습니까)"란 한 마디로 코대답을 할 따름이요, 잘 받아 주지 않으매, 그는 또 중국인을 붙들고서 실랑이를 하였다. "니상나열취……" "니싱섬마"하고 덤벼 보았으나 중국인 또한 그 기름낀 뚜우한 얼굴에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띨 뿐이요 별로 대구를 하지 않았건만, 그래도 무에라고 연해 웅얼거리면서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짐승을 놀리는 요술장이가 구경꾼을 바라볼 때처럼 훌륭한 재주를 갈채해 달라는 웃음이었다. 나는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주적대는 꼴이 어줍지 않고 밉살스러웠다. 그는 잠깐 입을 닫치고 무료한 듯이 머리를 덕억덕억 긁기도 하며, 손톱을 이로 물어뜯기도 하고, 멀거니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하다가, 암만해도 중절대지 않고는 못 참겠던지 문득 나에게로 향하며, "어디꺼정 가는 기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붙인다.

"서울까지 가요."

"그런기오. 참 반갑구마. 나도 서울꺼정 가는데. 그러면 우리 동행이 되겠구마."

나는 이 지나치게 반가와하는 말씨에 대하여 무어라고 대답할 말도 없고, 또 굳이 대답하기도 싫기에 덤덤히 입을 닫쳐 버렸다.

"서울에 오래 살았는기요?" 그는 또 물었다.

"육칠년이나 됩니다." 조금 성가시다 싶었으되, 대꾸 않을 수도 없었다.

"에이구, 오래 살았구마, 나는 처음길인데 우리 같은 막벌이군이 차를 내려서 어디로 찾아가야되겠는기요? 일본으로 말하면 기전야도 같은 것이 있는기오?"

하고 그는 답답한 제 신세를 생각했던지 찡그려 보았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겅성드뭇한 눈썹이 올올이 일어서며, 아래로 축 처지는 서슬에 양미간에는 여러 가닥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 위로 뺨살이 실룩실룩 보이자 두 볼은 쪽 빨아든다. 입은 소태나 먹은 것처럼 왼편으로 삐뚤어지게 찢어 올라가고, 죄던 눈엔 눈물이 괸 듯 삼십 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그 얼굴이 10년 가량은 늙어진 듯하였다. 나는 그 신산스러운 표정에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하였다.

"글쎄요, 아마 노동 숙박소란 것이 있지요."

노동 숙박소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묻고 나서,

"시방 가면 무슨 일자리를 구하겠는기오?"라고 그는 매달리는 듯이 또 꽤쳤다.

"글쎄요, 무슨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는지요." 나는 내 대답이 너무 냉랭하고 불친절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일자리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외에 더 좋은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흠, 고향에서 오누마."하고 그는 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신세타령의 실마리는 풀려 나왔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따른 동리였다. 한 백호 남짓한 그곳 주님은 전부가 역둔토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 척식 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지인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이 3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하고 타처로 유리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 갔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봄에(그의 나이는 실상 스물여섯이었다.가난과 고생이 얼마나 사람을 늙히는가?) 그의 집안은 살기 좋다는 바람에 서간도로 이사를 갔었다. 쫓겨 가는 운명이거든 어디를 간들 신신하랴. 그곳의 비옥한 전야도 그들을 위하여 열려질 리 없었다. 조금 좋은 땅은 먼저 간 이가 모조리 차지하였고 황무지는 비록 많다 하나 그곳 당도하던 날부터 아침거리 저녁거리 걱정이랴. 무슨 행세로 적어도 1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먹고 입어 가며 거친 땅을 풀 수가 있으랴. 남의 밑천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보니, 가을이 되어 얻는 것은 빈 주먹뿐이었다. 이태 동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버티어 갈 제, 그의 아버지는 망연히 병을 얻어 타국의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다. 열아홉 살밖에 안된 그가 홀어머니를 보시고 악으로 악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중 4년이 못되어 영양 부족한 몸이 심한 노동에 지친 탓으로 그의 어머니 또한 죽고 말았다.

"모친까장 돌아갔구마." "돌아가실 때 흰죽 한 모금도 못 자셨구마."하고 이야기하던 이는 문득 말을 뚝 끊는다. 나는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을 몰랐다. 한동안 머뭇머뭇이 있다가 나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정종병 마개를 빼었다. 찻잔에 부어서 그도 마시고 나도 마셨다. 악착한 운명이 던져 준 깊은 슬픔을 술로 녹이려는 듯이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는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후 그는 부모 잃은 땅에 오래 머물기 싫었다.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품을 팔다가 일본으로 또 벌이를 찾아가게 되었다. 규슈 탄광에 있어도 보고, 오사까 철공장에도 몸을 담아 보았다. 벌이는 조금 나았으나 외롭고 젊은 몸은 자연히 방탕해졌다. 돈을 모으려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 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했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나는 탄식하였다.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뮌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9년 동안이나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이 되었단 말씀이오?"

"흥,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드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 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백여호 살던 동리가 10년이 못 되어 통 없어지는 수도 있는기오, 후!"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참!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그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이윽고 나는 이런 말을 물었다.

"그래, 이번 길에 고향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습니까?"

"하나 만났구마, 단지 하나."

"친척되는 분이던가요?"

"아니구마, 한 이웃에 살던 사람이구마."하고 그의 얼굴은 더욱 침울했다.

"여간 반갑지 않으셨지어요."

"반갑다마다, 죽은 사람을 만난 것 같더마.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까닭도 좀 있던 사람인데……"

"까닭이라니?"

"나와 혼인 말이 있던 여자구마."

"하아!" 나는 놀란 듯이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았다.

"그 신세도 내 신세만 하구마."

하고 그는 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보다 나이 두 살 위였는데, 한이웃에 사는 탓으로 같이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자라났다. 그가 열 네살 적부터 그들 부모들 사이에 혼인 말이 있었고 그도 어린 마음에 매우 탐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열일곱 살 된 겨울에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되는 자가 20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차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물론 피차에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이번에야 빈터만 남은 고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그 아내될 뻔한 댁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20원 몸값을 10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60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궐녀도 자기와 같이 10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루 해를 울어 보내고 읍내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10년 동안에 한 마디 두 마디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으로 그 일본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암만 사람이 변하기로 어째 그렇게도 변하는기오? 그 숱 많던머리가 훌렁 다 벗을졌두마. 눈을 푹 들어가고 그 이들이들하던얼굴빛도 마치 유산을 끼얹은 듯하더마."

"서로 붙잡고 많이 우셨겠지요"

"눈물도 안 나오더마.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둘이서 정종만 열병 때려 뉘고 헤어졌구마."

하고 가슴을 짜는 듯한 괴로운 한숨을 쉬더니만 그는 지난 슬픔을 새록새록 자아내어 마음을 새기기에 지쳤음이더라.

"이야기를 다하면 뭐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나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자, 우리 술이나 마자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주거니받거니 한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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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잡는 아버지


현덕 :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3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고무신」이 입선하고,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집을 나간 소년』, 『포도와 구슬』, 『토끼 삼형제』 등이 있습니다.



황혼의 종로로 방향을 돌려서

버스는 떠난다. 경쾌하게.


건드러진 노랫소리가 푸른 언덕을 넘어온다. 바우는 송아지를 뜯기며 밤나무 그늘에 앉아 그림 그리는 책을 펴 들었다. 송아지가 움직이는 대로 자리를 옮아 앉으며 옆으로 풀을 뜯는 송아지 모양을 그리느라 열심히 들여다보고 연필을 놀리고 하더니 잠시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흥!” 하고 빈정거리는 웃음을 한번 웃고는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듯 그 편에 등을 대고 돌아앉는다.

‘겨우 서울 가서 공부한다고 배워 가지고 온 것이 유행가 나부랭이냐. 그리고 나비 잡는 것하구.’

지난 해 봄에 바우와 경환이는 한날에 그곳 소학교 소학교 : 지금의 초등학교. 보통학교.

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경환이는 서울로 상급 학교를 가고 바우 자기는 집에서 꾸벅꾸벅 땅이나 파며 있지 않으면 아니 될 때, 바우는 무척 슬퍼하고 억울해 하고 따라서 경환이를 부러워도 하였다. 바우 자기가 값없이 보내는 그 하루하루에 경환이는 좋은 학교, 훌륭한 선생 아래서 날마다 새로워 가고 높아 갈 것을 생각할 때 바우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 상급 학교에 가지 못하는 벌충 벌충 : 모자란 것을 다른 데서 보태 채우는 것.

을 여기다 하려는 듯이 틈 있는 대로 그림을 그리었고 또 그것으로 즐거움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그 경환이가 하기 휴가 하기 휴가 : 여름 방학

를 하고 서울서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전보다 얼굴빛이 희어지고, 바지 통이 넓은 양복에 흰 테두리한 모자를 멋있게 쓴 것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경환이는 서울이 얼마나 좋고 자기 다니는 학교가 얼마나 훌륭한 곳인가를 자랑했다. 거기다 활동 사진 활동 사진 : 영화.

배우 중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쩌고, 그리고 잡된 유행가를 부르며 동네 어린아이들을 몰고 다니며 나비를 잡는 것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아마 경환이 자기는 이러는 것으로, 전일 보통학교 때 늘 바우에게 성적으로 머리를 눌려 오던 분풀이를 하려는 듯이 뻐기며 다니는 것이다. 바우에게는 그 꼴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꽃 피는 남산으로 방향을 돌려서 버스는 떠난다. 가로수 그늘.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 온다. 그리고 잠시 언덕 너머가 떠들썩하더니 호랑나비 한 마리가 피로한 나래로 갈팡질팡 날아와 밤나무 가지에 야트막하게 앉는다. 바우는 그 나비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잠깐 그 호사스런 모양, 찬란한 빛깔을 들여다보다가 도로 날려 보내려 할 즈음, 언덕 위로 동네 아이들의 머리가 불쑥불쑥 나타나며 뒤미처 경환이가 나비 잡는 채를 휘두르며 뛰어내려 온다. 경환이는 바우가 앉아 있는 밤나무 그늘로 들어서며,

“너, 호랑나비 어디로 날아가는 거 봤니?”

하고는 바우 손에 잡혀 있는 나비를 보고는 반색을 한다.

“나 다우.”

하고 으레 줄 것으로 알고 손을 내미는데 바우는 그 손을 툭 쳐 버리고 몸을 돌린다.

“넌 무슨 까닭으로 어린애들을 몰고 다니며 앰한 앰한 : 아무 잘못이 없는. 애매한.

나비를 못살게 하는 거냐?”

“뭐?”

하고 경환이는 뜻하지 않은 말에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는,

“누가 장난으로 잡는 거냐. 학교서 숙제를 냈어. 동물 표본을 만들어 오라구.”

“장난 아니믄, 벌써 너 나비 잡기 시작한 지가 며칠이냐. 그동안에 못 잡아도 백 마리는 잡았겠구나. 그거 다 동물 표본 만들고도 모자라서 또 잡는 거냐?”

“모두 못쓰게 잡았으니까 그렇지. 날개가 상하구.”

하다가는 경환이는 변색을 하고 한 발자국 다가서며,

“넌 남이 나빌 잡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 건방지게.”

“나두 상관할 만해서 그런다.”

“무슨 상관야.”

“너 때문으로 해서 담부턴 나비 구경을 못하게 되겠으니까 허는 말이다.”

하고 바우는 경환이 얼굴을 마주 노리다가,

“니가 동물 표본을 만들기에 나비가 필요하다면 난 그림 그리는 데 필요한 나비야. 너만 위해서 생긴 나비는 아니지.”

그러나 경환이는 “흥!”하고 코웃음을 친다. 바우는 한층 음성을 높여 계속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에게 잡된 유행가는 너 왜 가르치는 거냐. 부르고 싶으면 네가 부르지.”

이 말엔 매우 괘씸한 모양, 경환이는 낯을 붉히며 대든다.

“이 동네서 나 하는 거 시비할 사람 없어. 건방지게 왜 이래.”

하는 그 말속엔 분명 자기는 마름 마름 : 땅 임자와 그 땅에 농사짓는 소작인 사이에서 땅 임자 일을 대신하는 사람.

집 외아들로서 지위가 높은 몸, 너 같은 소를 뜯기는 놈에게 시비를 받을 몸이 아니라는 빈정거림이 있다. 바우는 썩 비위가 상해서, “흥!” 하고 마주 코웃음을 치고 그리고 좀 더 골을 올리려고 두 손가락에 날개를 접어 쥔 나비를, ‘이것 너 줄까.’ 하는 시늉으로 경환이 등을 향해 두어 번 겨누다가는 그대로 공중으로 날려 버린다. 나비는, 방향이 없이 어지러이 한 바퀴 맴을 돌더니 언덕 아래로 높았다 낮았다 날아간다.

경환이는 갑자기 몸을 날려 그 나비를 쫓아간다. 그러다가 나비가 아래 논 가운데로 날아가자 뒤돌아서 바우를 무섭게 한번 눈을 흘겨보고, 그리고 돌 하나를 집어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송아지를 때리고는 언덕 아래로 달아났다.

그러나 경환이의 심술은 이것만으로 고만두지 않았다.


송아지에게 먹을 만치 풀을 뜯기고 언덕 아래로 몰고 내려와 수수밭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바우는 다시금 놀랐다. 개울 건너 바우네 참외밭에서 경환이란 놈이 나비 잡는 채를 휘두르며 날뛰고 있다. 그까짓 송장나비를 잡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닐 텐데 경환이는 그 나비를 쫓아 구두 신은 발로 지금 한창 참외가 열기 시작하는 넝쿨을 함부로 질겅질겅 밟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하다. 나비를 잡는 척 참외밭으로 몰아넣고 침외 넝쿨을 결딴내는 것이리라. 바우는 눈이 뒤집혔다. 더욱이 그 참외밭은 장차 햇곡식 나기 전까지의 바우 집 식구들의 식량을 거기다 예산하고 있는 것이요, 바우 자기도 잘 열면 책 한 권쯤 사 달라려고 벼르고 있던 터다. 바우는 나는 듯 개울을 건너 뒤로 쫓아가 한 번 등줄기를 우리고 우리고 : 힘껏 때리고.

나서,

“임마, 눈 없어? 이거 못 봐?”

하고 낭자한 그 자취를 손으로 가리키며,

“넌 남의 집 농사 결딴내두 상관없니, 임마.”

그러나 경환이는,

“우리 집 땅 내가 밟았기로 무슨 상관야.”

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 ‘피이.’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그러나 사실 기가 막히기는 바우다.

“우리 집 땅?”

하고 ‘허 참.’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고,

“땅은 너희 집 거라두 참외 넝쿨은 우리 집 거 아니냐. 누가 너희 집 땅을 밟는대서 말야? 우리 집 참외 넝쿨을 결딴내니까 말이지.”

그러나 경환이는 머리에 썼던 운동 모자를 벗으며 한 발자국 다가선다.

“너희 집 참외 넝쿨은 그렇게 소중히 알면서, 어째 남이 나비 잡는 건 훼방을 노는 거냐. 나두 장난으로 잡는 건 아냐.”

“장난이 아닌지는 몰라도 넌 나비를 잡는 거고 우리 집 참외 넝쿨은 거기서 양식도 팔고 팔고 : 사고. 곡식을 사는 것을 판다고도 한다.

그래야 할 것이거든. 그래, 나비가 중하냐, 사람 사는 게 중하냐.”

바우는 팔을 저어 시늉하며 어느 것이 소중하냐고 턱을 대는데 경환이는,

“나두 거기 학교 성적이 달린 거야.”

하고 ‘피이.’ 하고 업신여기는 웃음을 짓더니,

“너희 집 집안 살림을 내가 알게 뭐냐.”

하고 같은 웃음으로 좌우를 돌아본다. 개울 건너 길가에 동네 아이들이 모여 서 있고 그 뒤로 지게를 진 어른들도 서 있다. 바우는 낯이 화끈 달았다.

“뭐, 임마.”

하고 대뜸 상대의 멱살을 잡고,

“그래서 남의 참외밭 결딴내는 거냐. 나빈 우리 집 참외밭에만 있구, 다른 덴 없어, 임마.”

경환이는 멱살을 잡히고 이리저리 목을 저으며,

“이게 유도맛을 보지 못해 이래. 너 다 그랬니. 다 그랬어.”

하고 으르다가 날래게 궁둥이를 들이대고 팔을 낚아 넘겨 치려 하나 원체 나무통처럼 버티고 섰는 바우의 몸은 호리호리한 경환의 허릿심으로는 꺾이지 않았다. 도리어 바우가 슬쩍 딴죽을 걸고 밀자 경환이 자신이 쿵 나둥그러졌다. 그러나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설 때 경환이는 손에 돌을 집어 들고 그리고 얼굴에 울음을 만들고는,

“이 자식아, 남 나비 잡는 사람, 왜 때리고 훼방을 노는 거냐. 왜.”

하고 비겁하게 돌 든 손을 머리 위로 쳐들어 겨누는 것이다. 결국 이때껏 아이들 등 뒤에 입을 벌리고 서서 보고만 있던 동네 어른 하나가 성큼성큼 개울을 건너와 사이를 뜯어 놓았다. 그리고 경환이를 참외밭 밖으로 이끌어 나간 것으로 끝났으나, 경환이가 손목을 이끌려 가면서 연해 뒤를 돌아보며, ‘어디 두고 보자’고 벼르던 그 말이 허사가 아니었다.

바우가 자기 집 장독간 앞에서 벌통을 들여다보고 앉았는데 경환이 집에서 부엌 심부름을 하는 계집아이가 왔다. 바우는 까닭없이 가슴이 성큼했다.

“바우 어머니 집에 있수?”

하고 계집아이는 안방과 부엌을 기웃거리다가 마당에 섰는 바우를 보고,

“너 우리 집 서울 학생 때렸니?”

하고 쳐다보다가 대답이 없으니까,

“너, 야단났다. 우리 집 아씨가 막 역정이 나서 너의 어머니 불러오래, 얘.”

마침 우물에서 돌아오는 바우 어머니를 보고 계집아이는 다시 한번 그 말을 하고 함께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난 잘못한 거 없으니까.’

하면서 바우는 가슴이 두근거리었다. 일없이 뒤꼍으로 갔다, 마당으로 나왔다 하며, 어머니가 돌아올 때를 기다리면서 조마조마해한다.

먼저 아버지가 뒷밭에서 돌아왔다.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아버지는 기색이 좋지 못하다. 호미를 마당 가운데 던지더니 아버지는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참외밭에서 누구하구 싸웠니?”

바우는 벌통 앞에 돌아앉아서 말이 없다.

“너두 눈 있거든 참외밭에 좀 가 봐. 넝쿨 하나고 성한 게 있나. 임마, 그 밭에 도지 도지 : 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그 대가로 해마다 내는 벼. 도조.

가 얼만지 아니? 벼로 열 말야. 참외는 안 돼두 낼 것은 내야지. 그리고 허구한 날 먹을 건 먹어야지. 그런 걱정은 없구, 임마, 참외밭에서 싸움이 뭐냐, 싸움이.”

바우는 벌통 앞에서 일어서며 볼멘소리로,

“누가 싸웠나, 경환이가 나빌 잡는다고 참외밭에서 막 넝쿨을 밟길래 말린 거지.”

그러나 아버지는 한층 음성을 거슬렸다.

“내가 뭐랬어. 참외밭 근처서 멀리 떠나지 말고 지키랬지. 그놈의 그림책 이리 내놔라. 그 것만 잡고 앉았으면 정신없다가 참외밭을 결딴내는 것두 몰랐지, 임마.”

하고 그 그림책을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뒤꼍으로 가며 아버지는 혼잣말로 서울 가서 공부한 것이 나비 잡는다고 남의 집 참외밭 결딴내는 거냐고 중얼중얼 울타리에서 호박잎을 따고 있다. 아마 부러진 참외 넝쿨을 그것으로 이어 보려는 것이리라. 조금 후 아버지는 호박잎을 따 가지고 나오며,

“너의 어머니 어디 갔니?”

그러나 바우는 경환이 집에서 어머니를 불러 갔다는 말은 아니 나왔다. 묵묵히 바우는 대답이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묻지 않아도 좋았다. 바로 그 어머니가 상기한 얼굴로 대문을 들어섰다.

어머니는 다짜고짜로 바우에게로 달려가 등줄기를 우리고는,

“자식이 어떻게 했으면 어미 망신을 그렇게 시키니. 어서 나비 잡아 가지고 가서 빌어라, 빌어.”

그리고 아버지를 향하고는,

“당신도 가 보우. 바깥사랑에서 부릅디다.”

아버지는 어리둥절하여 바우와 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어떻게 된 일야, 응.”

그러나 어머니는 바우를 향해서만 또,

“남 나빌 잡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지 어줍잖게 왜 다니며 훼방을 노는 거냐.”

“누가 훼방을 놀았나. 남의 참외밭에 들어가 그러길래 못하게 말린 거지.”

“아, 니가 밤나무 골 언덕에서 손에 잡았던 나비까지 날려 보내며 뭐라구 그랬다는데 그래.”

그리고 어머니는 경환이 집 안주인이 꾸중꾸중하더라는 것, 그리고 바우가 나비를 잡아 가지고 와서 경환이에게 빌지 않으면 내년부턴 땅 얻어 부칠 생각을 말라더란 말을 옮기며 또 바우에게,

“어서 나비 잡아 가지고 가서 빌어라, 빌어.”

아버지는 연해 끙끙 땅이 꺼지는 못마땅한 소리로 뒷짐을 지고 마당을 오락가락하며 무섭게 눈을 흘겨 바우를 본다. 그리고 바우는 어머니가 등을 미는 대로 부엌으로 뒤꼍으로 피하다가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담 밑에 붙어 서서 움직이지 않는 바우를 어머니는 쫓아나와 다조진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고 안 가면 어떡헐 셈이냐. 땅 떨어져도 좋겠니. 너두 소견이 있지.”

그러나 바우는 어슬렁어슬렁 길로 나가더니 우물 앞 정자나무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동네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앉았는 것을 넋을 놓고 들여다보고 섰다. 장기가 두 캐가 끝나고 세 캐가 끝나고 모였던 사람이 헤어져도 바우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바우는 다만 자기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그러니까 누구에게든 머리를 굽힐 까닭이 없다는 고집이 정자나무통만큼 뻣뻣할 뿐이었다.

해가 저물었다. 지붕 너머 집 굴뚝에도 연기가 오르고 그리고 그 연기가 졸아든 떄에야 바우는 슬슬 눈치를 살피며 대문을 들어섰다. 그러나 건넌방 쪽에 눈이 갔을 때 바우는 크게 놀랐다. 아궁지 앞에 위하던 그림 그리는 책이 조각조각 찢기어 허옇게 흩어져 있다. 바우는 그 앞에 이르러 멍청히 내려다보고 섰는데 등 뒤에서 아버지 음성이 났다.

“임마, 남은 서울 학교 다녀서 다 나비도 잡고 그러는 건데 건방지게 왜 다니며 훼방을 노 는 거냐, 훼방을.”

그리고 바우가 그림 그리는 것과 그것은 아랑곳없는 일일 텐데 아버지는,

“담부턴 내 눈앞에 그 그림 그리는 꼴 보이지 말어라. 네깟 놈이 그림 그걸루 남처럼 이 름을 내겠니, 먹고 살게 되겠니.”

하고 돌아서 문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서며 아버지는,

“나빈 잡아갔지?”

하고 다져 묻는다. 바우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하다. 아버지는 기가 막힌 듯 잠시 건너다보기만 하다가 언성을 높였다.

“이때껏 나가서 뭐 했어. 임마, 간 봄에 늙은 아비가 땅 얻어 부치느라고 갖은 애 다 쓰던 것을 네 눈으로도 보았지. 가뜩한데 너까지 말썽일 게 뭐냐. 어서 가서 빌지 못하겠어.”

아버지는 담뱃대 끝으로 바우의 수그린 머리를 찌를 듯 겨눈다. 그러는 대로 바우는 무춤무춤 피할 뿐 조금도 걸음을 옮기려지 않는다.

“그래도 네 고집만 셀 테냐. 그럴라거든 아주 나가거라. 아주 나가.”

하고 아버지는 빗자루를 들고 나섰다. 이런 때 어머니가 방에서 나와 그걸 빼앗아 던져 버리고,

“가서 빌기만 허면 뭘 하우. 나빌 잡아가야지. 그리고 지금은 어두워서 잡겠수. 내일 잡아 가라지.”

그리고 어머니는 바우의 등을 밀며,

“어서 올라가 저녁이나 먹어라.”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보며,

“저런 놈 저녁은 먹여 뭘 해. 아주 내쫓으라니깐 그래.”

하고 자기가 먼저 문 밖으로 나간다. 어머니는 그 아버지가 들어오기 전에 어서 저녁을 먹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바우는 섰는 자리에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가 달랠수록 더 짜증만 낸다. 한종일 아버지, 어머니에게 애매한 미움을 받고 또 그림책을 찢기고 한 그 억울한 감이 가슴 속에 벅차 다른 무엇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이다. 건넌방 모퉁이서 바우는 아버지와 얼굴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어제와 다름없는 그 얼굴 그 음성으로 부엌에서 아침을 짓는 어머니를 향해 소리쳤다.

“오늘도 저놈이 제 고집만 세우고 나빌 잡아가지 않거든 밥 주지 말어.”

그리고 바우를 향해서는,

“오늘은 나빌 잡아가지고 가 봐야 허지, 그러지 않으려거든 영 집에 들어올 생각 말어라, 임마.”

그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자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와 작은 음성으로 바우를 달랜다.

“아버지 속상하시게 하지 말고 오늘은 나빌 잡아가지고 가 봐라. 땅이 떨어지거나 하면 너는 좋겠니. 생각해 봐라.”

바우는 여전히 말이 없다. 어머니는 그것을 바우가 순종하는 뜻으로 여긴 모양, 부엌에서 아침을 차리기에 분주하였다.

“얼른 밥 차려 줄게 먹고 나가 봐.”

그러나 바우는 어머니가 밥상을 날라 오기 전에 자기가 먼저 슬며시 집 밖으로 나갔다. 밥을 열 끼를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 경환이 앞에 나비를 잡아가지고 가서 머리를 숙이기는 무엇보다 싫었다. 아들의 그만한 체면쯤 보아줄 줄 모르고 자기네 요구만 고집하는 아버지가, 그리고 어머니까지 바우는 무척 야속했다. 노여웠다.

바우는 동구 밖 아랫마을로 가는 길가 축동, 버드나무 그늘 밑을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기며 걷는다. 아침부터 요란스레 매미는 울고 그리고 속상하게 눈에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풀 위로 너훌거리는 나비다. 바우는 그 나비를 피해 가는 듯 문득 걸음을 바꿔 뒷산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바우는 일상 하던 버릇으로 풀을 베어 널고, 그 위에 벌렁 나둥그러져 하늘을 쳐다본다. 집에서보다 갑절 어버이에게 대한 야속함과 노여움이 사무친다.

‘아버지 말대로 정말 집을 나오고 말까. 그러면 아버지도 뉘우칠 때가 있겠지. 그리고 서울 같은 도회 가서 어떻게 고학이라도 해 볼까.’

바우는 정말 그렇게 해 볼 것처럼 벌떡 일어선다. 그리고 걸음 걸리는 대로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간다. 산 중턱쯤 이르렀다. 건너다보이는 맞은편 언덕을 너머 모밀밭 두덩에 허연 사람의 그림자가 엎드렸다 일어섰다 하며 무엇을 쫓는 모양으로 움직인다.

‘흥! 경환이 저놈이 또 나비를 잡는구나.’

하고 바우는 입가에 업신여기는 웃음을 짓는다. 산을 또 좀 내려와 바라볼 때 경환이로 본 그것은 어른이 분명했다.

‘흥, 경환이란 놈이 저의 집 머슴을 시켜 나비를 잡게 하는구나.’

그리고 바우는 또 한번 같은 웃음을 웃는다.

바우는 산을 내려와 맞은편 언덕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모밀밭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는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경환이 집 머슴으로 본 사람은 남 아닌 바로 자기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농립 농립 : 농립모의 준말. 여름에 농사일을 할 때 쓰는 밀․보리짚 따위로 만든 모자.

을 벗어 들고 나비를 쫓아 엎드렸다 일어섰다 하며 그 똑똑치 못한 걸음으로 밭두덩을 지척지척 돌고 있다.


바우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고 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언덕 모래 비탈을 지르르 미끄러져 내려가며 그렇게 빠른 속력으로 지금까지 잠기어 있던 어두운 마음에서 벗어나, 그 아버지가 무척 불쌍하고 정답고 그리고 그 아버지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이든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고, 바우는 울음이 되어 터져 나오려는 마음을 가슴 가득히 참으며 언덕 아래 모밀밭을 향해 소리쳤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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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
세상 구석구석 따스하고 소소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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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발

윌리엄 위마르크 제이콥

william wymark jacobs / English(영국) / 1863~ 1943

비가 내리는 스산한 저녁이었다. 하지만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벽난로에 불을 한껏 피워놓은 집안의 작은 거실은 아늑했다. 이글대는 불빛이 체스를 두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었다.

갑자기 게임을 역전시킬 좋은 수가 생각났다고 여긴 아버지가 왕의 위치를 용감하게 옮겨 놓았다. 벽난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던 백발의 아내가 그 쓸떼없고 위험한 수를 보고 참견을 하자,

“저 바람소리 좀 들어 봐라.”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화이트 씨가 그것을 자식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딴소리를 했다. “듣고 있어요.아버지.”

아버지의 의도를 눈치챈 듯 아들 허버트가 체스판의 상황을 샅샅이 분석한 뒤 미소를 머금더니 이내 손을 쭉 뻗으며 소리쳤다. “장군이요!”

아무래도 그 친구가 오늘밤에 도착하기는 힘들 것 같구나.“

어디다 두어야 할지 난처해진 아버지는 여전히 엉뚱한 쪽으로 아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 “체스 두는 사람 어디 가셨나?”

허버트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이건 최악이군, 그래.”

화이트 씨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분통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고, 길은 온통 진창이야. 이건 정말 최악의 사태야. 집이 떠내려갈 판인데 도대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그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잖아.”

“그만 하세요,여보.” 그의 아내가 남편을 달래주었다.

“아마 이번에는 당신이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아내와 아들 사이에 오가는 회심의 미소를 목격하고 아버지가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다 멈칫하고는 회색 턱수염을 아래로 쓸어내리며 쑥스러운 미소만 지어 보이고 있다가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이제야 도착했군.”

무거운 발자국 소리에 이어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버지는 때 맞춘 손님의 방문에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둘러서 문으로 달려간 아버지가 손님을 맞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날씨에 대해서 몇 마디 투덜거리자 그 소리를 듣고 부인이 쯧쯧 하고 혀를 차며 동정했다. 화이트 씨가 키가 크고 억세 보이는 남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작고 반짝이는 두 눈에 혈색이 붉은 남자였다. “상사 모리스입니다.”

모리스는 가족들과 악수를 나눈 다음 자신에게 주어진 난로가 의자에 앉더니 화이트 씨가 위스키와 큰 잔을 꺼내고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는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세 번째 잔을 비우자 모리스는 눈을 더욱 반짝거리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주위에 둘러앉은 가족은 먼 곳에서 온 자기 방문객의 말에 큰 호기심을 느꼈다.

모리스는 널찍한 어깨를 벌리며 자기가 경험한 야생 세계, 용감무쌍한 행동, 전쟁, 전염병, 특이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십일 년이란 긴 세월이었지.”

화이트 씨가 아내와 아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헤어질 무렵에는 도매상에서 일하는 꺽다리 젊은이였는데 말이야.지금 이 친구를 한번 보라구.”

“그 동안 많이 다치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화이트 씨의 아내가 공손하게 말했다.

“나도 인도에 한 번 가보고 싶어.” 화이트 씨가 말했다.

“그저 한 번 둘러봤으면 해서 말이야.”

그 상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더니 빈 잔을 내려놓고 나서 가벼이 한숨을 쉰 뒤 다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인도에 가면 오래된 사원을 둘러볼 수 있고 고행자나 마술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화이트 씨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며칠 전 나에게 말하다가 만 원숭이 발인가 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듣고 싶네, 모리스.‘

“아무것도 아니야.” 상사는 요청이 끝나기가 무섭게 잘라 말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지.” “원숭이 발이라구요?”

화이트 씨의 아내가 호기심에 차서 끼어 들었다.

“예, 굳이 말하자면 그저 요술 비슷한 어떤 건데요.”

상사가 무심코 말해버렸다.

둘러앉은 가족 모두 모리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방문객은 아무 생각 없이 빈 잔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가 다시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화이트 씨가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미이라처럼 말라붙은 그저 작은 발에 불과할 뿐이죠.“

그는 자기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어서 내밀어 보였다. 화이트 씨의 아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뒤로 물러났지만 아들이 그것을 받아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에 뭐 특별한 것이라도 있는 건가요?”

“이 발에는 한 늙은 수행자가 불어놓은 주문의 힘이 들어있죠.”

상사가 말했다. “인도에 대단히 성스러운 수행자 한 사람이 교만에 가득찬 우리가 잘 믿으려 하지 않 는 운명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것을 만들었답니다.

그 운명을 방해할 경우에는 커다란 슬픔을 맛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원숭이 발은 이것을 소유한 세 번째 사람에게까지만 효과를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세 가지씩의 소원을 빌 수 있고 그 소원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가 매우 진지하게 말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그가 못마땅해했다.

“그런가? 그럼 자네도 세 가지 소원을 빌어 보았나?”

화이트씨가 교묘하게 한마디 던졌다.

상사는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화이트 씨에게 기분이 상한 듯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난 이미 세 가지 다 빌었지.”

얼룩 투성이인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럼 정말로 그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졌나요?”

화이트 씨 부인이 끼어 들었다. “물론이죠.”

상사가 말하고는 자신의 튼튼한 이빨을 유리잔에 부딪쳤다.

“소원을 빈 다른 사람도 있나요?” 부인이 계속 물고 늘어졌다.

“처음 이것을 소유한 한 남자가 세 가지 소원을 이루었지요.”

상사가 말을 이었다.

“그 남자가 빈 두 가지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릅니다만 그의 마지막 소원은 죽음이었죠. 그리고 제가 이 발의 새 주인이 된 겁니다.”

상사의 어조는 매우 무거웠으며 모두가 말을 잊은 채 침묵이 흘렀다.

“만일 자네가 세 가지 소원을 이미 이루었다면 이제 자네에게는 이게 필요 없겠군, 모리스.” 드디어 화이트 씨가 말문을 열었다.

“왜 아직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 상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상에 맡기겠네. 사실 이 물건을 팔아 버릴 생각도 했었지. 하지만 정말 팔고 싶지는 않아. 이미 이 요물 때문에 불행한 일들이 많이 생겼어. 게다가 내 말을 믿고 이것을 사려는 사람도 없을 테지. 사람들은 그저 이상한 이야기로 여길 거야. 생각해보게. 이 물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말이 진실인지를 먼저 시험해 본 다음에 돈을 내려고 하지 않겠나.”

“만일 자네가 세 가지 소원을 더 빌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화이트 씨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모르겠네.”

상사가 답했다. “모르겠어.”

그는 그 발을 집어들고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에 넣어서 흔들어 보더니 갑작스레 불이 있는 쪽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화이트씨가 가벼운 비명 소리를 지르며 잽사게 몸을 나려서 그 발을 낚아챘다.

“태워버리게!” 상사가 엄숙하게 타일렀다.

“모리스, 자네가 이것을 원치 않는다면 나에게 주면 되지 않는가.”

“자네에게 이걸 줄 수는 없네.” 그 친구가 완고하게 말했다.

“내가 분명 그것을 불 위에 던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만일 자네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를 탓하지는 말게. 자네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다시 그것을 불 위에 던져 버리는 게 좋을 거야.”

화이트 씨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새로운 보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쓰면 되지?”

“오른손에 그것을 쥐고 큰 소리로 소원을 빌면 되네. 하지만 내가 한 경고를 절대 잊지 말게.” “꼭 아라비안 나이트 같군요.”

화이트 씨의 부인이 일어나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러 가면서 말했다.

“내 팔이 네 개가 되도록 한번 빌어보지 그래요.”

남편이 그 말을 듣고 주머니에서 그 요물을 꺼내가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상사는 다급해진 얼굴을 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상사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에게 꼭 필요한 경우라면, 현명한 소원을 빌기 바라네.”

화이트 씨가 그것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저녁 식사를 위해 의자를 제자리로 옮기고 친구를 식탁으로 안내했다. 저녁 식사 도중에는 얼마 동안 아무도 그 요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세 명은 자리에 앉아서 그 군인이 인도에서 겪은 경험담을 들으며 완전히 도취되었다.

손님은 마지막 기차 시간에 딱 맞추어서 일어났다. 배웅을 하고 문을 닫으며 허버트가 말했다.

“군대 생활에 대한 얘기의 반은 거짓말이고 나머지 반은 허풍이라고 하던데 그 상사님의 말을 듣고 나니 실감이 나네요. 보아 하니 그 원숭이 발에 대한 이야기도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걸요, 이 물건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여보, 모리스에게 그 물건의 대가로 뭘 주었나요?”

아내가 남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그냥 몇 푼 쥐어 주었지.” 얼굴이 좀 붉어진 남편이 말했다.

“안 받으려고 하는 걸 내가 억지로 쥐어 주었지. 그 친구가 나한테 그 요물을 버리라고 다시 한번 충고하더군.”

“그의 말이 사실인가봐요.” 허버트가 흥분한 척하며 말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행복해지겠네요. 우선 황제가 되게 해달라고 빌어보세요. 어머니에게 꼼짝 못하고 지내시지 않게 말이죠.”

의자 덮개를 들고 화이트 씨 부인이 쫓아가자 허버트는 식탁을 따라 도망을 쳤다. 어머니와 아들의 술래잡기가 진행되는 동안 화이트씨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그 말을 꺼내어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사실 내가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가 천천히 말했다.

“마치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기라도 한 기분이야.”

“어머니는 이 집안이나 깨끗이 치워 달라고 빌면 좋으시겠지요? 그렇죠?” 허버트는 두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쫓아오는 어머니에게 항복하며 말했다. “한 이백 파운드 정도 달라고 빌면 어떨까요?”

애들처럼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자신에게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화이트 씨는 그 부적을 쳐들었다. 사뭇 엄숙한 척하던 아들은 어머니의 윙크를 받은 후 피아노로 가서 당선자 발표 직전에 쓰는 긴장감 넘치는 효과 음악을 연주했다. “나에게 이백 파운드를 달라.”

화이트씨가 한 마디 한 마디 명확하게 외쳤다.

아들이 그 말을 이어 받아 우렁차게 팡파레를 연주하다가 아버지의 몸서리치는 비명을 듣고 멈추었다. 아내와 아들이 재빨리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이게 움직였어!”

기겁을 하고 원숭이의 발을 바닥에 던져버린 화이트 씨가 혐오스러운 눈빛을 하고 외쳤다.

“내가 소원을 비니까 이게 내 손안에서 뱀처럼 꿈틀거렸단 말이야.”

“그런데 돈은 안 보이는데요.”

허버트가 그 말을 집어 식탁에 내려 놓으면서 말했다.

“제가 장담하는데 돈은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당신의 상상이었을 거예요.”

아내는 남편이 걱정이 되어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괜찮아. 하여튼 우리가 피해 본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어.”

그들은 다시 벽난로가에 모여 앉았다. 바깥의 바람은 전에 없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화이트 씨는 위층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밤이 되어 노부부가 위층으로 올라갈 때가지 이상하고 침울한 침묵이 세 사람을 내리 눌렀다.

“침대 위에 큰 돈자루가 있을지도 몰라요, 아버지.”

허버트가 밤 인사를 드리며 한 말이다.

“그리고 옷장 속에서 귀신이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돈을 숨기는 걸 보고 있을지도 몰라요. 헤헤헤.”

허버트는 거실의 어둠 속에 혼자 앉아서 죽어가는 불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그 불 속에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 마지막 얼굴은 너무나 무섭고 마치 원숭이처럼 생겨서 허버트를 놀라세 했다. 그 얼굴은 점점 더 선명해졌다. 허버트는 어색하고 불안한 웃음을 터트리며 식탁 위에 있는 물컵에 담긴 물을 구 불 위에 부어 버렸다. 그는 원숭이 발을 집어서 다시 한번 보고는 두려움에 몸을 조금 흠칫하며 손을 옷에 닦고 침실로 올라갔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는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가로질러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식탁에 앉은 허버트는 어젯밤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던 것을 떠올리고는 멋쩍게 웃었다. 어제와는 달리 거실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선행을 베푸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주름지고 더러운 그 작은 발은 아무렇게나 찬장 위에 던져져 있었다.

“아마 늙은 군인들은 다 그 모양인가 보죠.”

화이트 씨의 부인이 말했다.

“우리가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지! 요새 세상에 소원이 이루어지는 뭐라구요? 아니 설사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어떻게 이백 파운드가 당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단 말이죠? 말도 안 된다구요.” “갑자기 돈벼락이 아버지 머리 위로 떨어질지도 모르죠.”

허버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모릭스 말이 그 일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했어. 그러니 실제로 소원인 성취되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야.”

“예, 그럼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 돈에 손대지 마세요.”

허버트가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 물건이 아버지를 자린고비로 바꾸어 버릴까봐 걱정되는 걸요.”

화이트 씨의 부인이 웃으면서 문까지 아들을 배웅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이 큰길로 나간 것을 본 후 남편의 순진함에 어느 정도는 유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오후에는 갑자기 우체부가 문을 두드리자, 혹시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인가 하고 문으로 달려나갔다가 우체부가 전해준 재봉사의 지급 청구서를 받아들고는 역시나 하며 퇴역 상사의 술버릇을 다시 한번 입에 올렸다. “하버트가 퇴근 후에는 아마 더 재미있는 말을 할 거예요.”

“믿기 힘들다는 건 알아.” 화이트 씨가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내 손안에서 움직인 것은 분명해, 맹세코 사실이야.”

“그랬다고 당신이 생각한 거겠죠.” 머리가 흰 부인이 달래듯 말했다.

“생각한 게 아니라 그게 움직였다니깐, 난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게 정말 움직였단 말이야…… 어쨌건 무슨 상관이야.”

아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바깥문 밖에 있는 한 남자의 의심스러운 행동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남자는 무언가 결단을 내리기 힘든 듯 망설이면서 집 주위를 한참 동안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머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백 파운드를 떠올리며 그녀는 낯선 사람의 외모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 사람은 고급스러운 옷에 광택이 나는 새 비단 모자를 쓰고 있었다. 문 쪽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물러서기를 서너 번 반복하더니 드디어 그는 바깥문을 제치고 들어와 정원을 가로질러 집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부인은 손을 뒤로 해서 잽싸게 끈을 풀어 앞치마를 벗은 후 의자의 방석 밑에 팽개쳐 버렸다.


그녀는 어딘지 불편해하는 낯선 방문객을 거실로 안내했다. 그는 들키지 않게 조심스레 부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부인은 정돈되지 않은 거실이며 잔디를 깎을 때나 입는 옷을 입고 있는 남편의 옷차림에 대해 손님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쉽게 방문객이 용건을 꺼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방문객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침묵했다.

“저는, 저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드디어 그가 말문을 열더니 몸을 구부려 바지 주머니에서 한 조각의 천을 꺼내었다.

“저는 모앤 메긴스 회사에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내는 숨이 넘어갈 듯했다.

“허버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무슨 문제죠? 뭐예요?”

남편이 끼어들었다.

“여보, 여보, 진정하라고.” 그가 서둘러 아내를 진정시켰다. “여기에 앉아. 알지도 못하면서 경솔하게 앞서가면 안되지.”

“당신이 무슨 나쁜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은 아닐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럴 일이 뭐 있겠습니까.”

아버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손님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만......” 그 방문객이 입을 열었다.

“우리 애가 다쳤나요?” 어머니가 성급히 대답을 요구했다.

손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죄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심각하게 다쳤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없어졌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들을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그녀는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다가 손님의 마지막 말에 담긴 불길 한 의미를 생각해내고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애써 피하려는 손님의 모습에서 그 의미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아챘다. 숨을 멈춘 채 아직까지도 무슨 영문이지 모르고 있는 남편쪽으로 몸을 돌려 떨리는 늙은 손을 남편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긴 침묵이 계속되었다. “기계에 걸렸습니다.”

방문객은 낮은 목소리로 자세히 상황을 설명했다.

“기계에 걸렸다구요?”

화이트 씨가 멍해져서 말하더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사십 년 전 아내에게 구애하던 때처럼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허버트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천천히 그 방문객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화이트 씨가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어요.” 손님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일어나서 천천히 창문쪽으로 걸어갔다.

“저희 회사를 대표해서 귀댁에 일어난 큰 불행에 대해 우리의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단지 고용인으로서 지시 받은 대로 하기 위해 온 것뿐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노부인은 남편만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마치 옛친구가 놓고 간 요물이 처음으로 일을 저질렀다고 확신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앤 메긴 회사는 이 일에 대해 전혀 책임이 없음을 밝혀 드립니다,”

손님은 계속해서 말했다.

“회사에게는 아무런 의무가 없지만 아드님의 장례식을 고려해서 일정 정도의 위로금을 드리고자 합니다.”

화이트 씨는 갑자기 아내의 손을 떨구었다. 두려움에 떨며 그 방문객을 쳐다보던 그는 마른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물었다.

“얼마죠?” “이백 파운드입니다.”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다. 남편은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맹인이 된 것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더듬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노부부는 집에서 이 마일쯤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거대한 새 공동 묘지에 아들을 묻은 뒤 어두운 침묵에 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모든 장례 절차가 너무도 빨리 끝나 버려서 처음엔 그것이 끝난 줄도 모르고 그 다음 절차를 기다리고 서 있다가 식이 끝난 것을 겨우 알아차리고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떤 것이 남아 있어서 돌아오는 노부부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 길이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 며칠이 지나서 기다림은 체념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거의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고 자신들의 긴 삶이 피곤하기만 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밤중에 남편이 문득 잠이 깨어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지만 아내가 옆에 없었다. 방 안은 깜깜하기만 헸고, 한참 후에야 울다가 지친 좀 누그러진 울음소리가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남편은 일어나서 밖을 내다보았다. 아내가 거기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와. 감기 걸리겠구먼.” “우리 아들은 더 추울 거예요.”

아내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아내의 우는 소리가 멈추자 그의 눈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깜박 감겨버렸다. 침대가 따뜻했다. 남편도 너무나 지쳐있었다. 어느새 잠에 빠져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의 격한 비명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남편이 순간적으로 잠에서 빠져 나왔다.

“그 발!” 그녀아 험악하게 외쳐댔다.

“그 원숭이 발!” 그녀는 허둥지둥 몸을 비틀거리며 방으로 달려왔다.

“그거 어디 있죠? 지금 당장 꺼내와요. 당신, 벌써 그걸 불에 던지진 않았겠죠?” “거실에 있는 선반 위에 올려놓았잖아.”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물었다. “그런데 왜 그걸 찾는 거지?”

부인은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정신 나간 사람인 양 남편에게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이제서야 그 생각이 떠올랐어요.” 아내는 미친 사람처럼 떠들었다.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왜 당신도 그 생각을 못한 거죠?”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직 남아 있는 두 가지 소원 말이에요. 우리는 한 가지 소원만 빌었잖아요.”

“아니, 그걸로도 아직 충분하지 않단 말이야?”

남편이 사나운 표정으로 아내에게 쏘아댔다. “충분치 않아요”

그녀는 의기 양양하게 외쳤다.

“한 가지 소원을 더 빌 거예요. 빨리 가서 그것을 가져오세요. 그리고 우리 아들이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고 빌어요!”

그 말을 듣고 남편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팔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젖히면서 남편이 소리쳤다.

“당신 이제 완전히 돌아버렸군!” “가져 오세요, 여보, 제발요.”

아내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어서 빨리 가져오세요. 그리고 소원을 빌어요. 내 아들, 내 아들!”

남편은 성냥에 불을 붙여 촛불을 켜고 그 때까지도 방은 내리누르고 있는 어둠을 몰아냈다. “여보, 좀 자도록 해 봐.”

불안해진 남편이 아내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당신은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

“우리의 첫 번째 소원이 분명히 이루어졌잖아요. 이제 당신의 말을 모두 믿겠어요.” 늙은 아내가 열을 내며 남편을 설득시키려 했다.

“두번째 소원도 반드시 이루어질 거예요.”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어.” 남편이 말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가서 어서 그걸 가져오세요. 빨리 소원을 빌어야 해요.”

아내가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에요, 가서 어서 그걸 가져오세요. 빨리 소원을 빌어야 해요.”

아내가 소리를 질러댔다.

표정을 누그러뜨린 남편이 아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서서 두 손을 꼭 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 애가 죽은 지 이미 열흘이나 지나 버렸어. 생각해 보라고 게다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그 애의 주검을 찾으러 갔을 때 옷 빼고는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단 말이야. 만일 그 애가 다시 살아났는데 당신이 그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면 그 때는 또 어떻게 할 거야? 제발 진정해.”

“우리 아들을 다시 살려 내세요.”

아내가 울먹이면서 남편을 문이 있는 쪽으로 끌고 갔다.

“당신은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키운 자식을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내에게 억지로 떠밀려 방문을 나선 남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계단을 조심스레 걸어 내려갔다. 더듬거리며 조금씩 앞으로 가다가 거실에 이르렀다는 느낌이 들자, 벽난로가 잇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 요물은 그 쪽에 있었다. 화이트 씨는 채 소원을 빌기도 전에 금세라도 아들이 되살아나올 듯한 두려움 때문에 거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문으로 가는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화이트 씨는 숨을 멈추고 벽을 더듬어보았다. 싸늘한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드디어 떨리는 손 끝에 식탁이 만져졌다. 다시 방향을 잡은 그는 계속 벽을 따라 손을 짚어 나갔다. 화이트 씨는 자신이 뭔지 모를 힘에 이끌려 불길한 물건을 손에 쥔 채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내의 얼굴이 전과 달라져 있었다. 상기된 얼굴은 한껏 부풀어오른 기대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에 그렇게 생기가 도는 것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에 가득찬 남편의 지금 심정에는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의 눈에는 두려움이 역력했다.

“이제 소원을 빌어요!” 아내가 외쳤다.

“이건 분명히 어리석고 사악한 짓이야.” 남편이 주춤했다.

“소원을 빌어요!” 아내가 울부짖었다.

남편은 요물을 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우리 아들이 다시 살아나기를 원한다.”

원숭이의 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남편이 느끼는 불길함과 두려움은 한층 더해졌다. 아내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창문 쪽으로 걸어가서 블라인드를 올리자 남편은 떨리는 몸을 의자 깊숙이 밀어넣었다.

남편은 의자에 몸을 맡기고 추위에 몸이 얼어붙을 때가지 가끔씩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는 아내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방 안을 비춰주고 있던 촛불이 촛대의 가장자리 부분까지 검게 태우더니 천장과 벽에 너울거리는 한 자락 불꽃의 그림자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남편은 그 요물이 아무런 힘도 없다는 데에 대해 형언 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침대로 몸을 옮겼다.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얼마가 더 지나자 아내도 아무 말 없이 차가운 가슴을 부여잡고 남편 옆으로 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정적은 깨며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 소리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계단에서 삐걱 소리가 났다. 찍찍거리는 쥐 한 마리가 소란을 떨면 벽을 타고 분주히 달려갔다. 암흑이 노부부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얼마동안 누워 있다가 용기를 낸 남편이 성냥갑을 꺼대 들었다. 성냥불을 붙인 뒤 촛불을 밝히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가 성냥불이 꺼져 버렸다. 그는 다른 성냥에 불을 붙이려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문에서 들려 왔다. 너무나 작아서 눈치채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소리가 현관에서 울려퍼진 것은 분명했다.

성냥갑이 그의 손을 떠나 박으로 떨어지면서 성냥개비들의 여기저기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두 번째 노크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숨도 들이마시지 못하던 화이트 씨는 쫓기듯 뒤로 돌아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문을 굳게 닫았다. 이번에는 세 번째 노크 소리가 온 집안이 울릴 정도로 크게 들려 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아내가 고함을 치면서 일어났다.

“쥐 소리야.” 남편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깜짝 놀랐네. 글쎄 쥐 한 마리가 계단에서 내 발 밑을 스쳐가지 뭐야.” 남편의 대답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아내가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집 전체를 흔들었다.

“허버트다!” 아내가 소리 질렀다. “허버트가 왔어!”

그녀는 문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먼저 문 앞을 지키고서 남편이 아내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당신, 뭘 어떻게 하려는 거야?” 목이 쉰 듯이 그가 속삭였다.

“우리 아들이 왔어요. 허버트라구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둘은 밀고 당시면서 씨름을 계속했다.

“공동 묘지가 이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거예요. 왜 나를 말리는 거예요? 나를 좀 가도록 내버려 두세요. 난 꼭 저 문을 열어야만 한단 말이에요. 부탁이에요.”

“절대 열어주면 안 돼! 제발, 제발!” 남편도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당신은 우리 아들이 두렵단 말인가요?”

남편의 간청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는 막무가내로 몸싸움을 계속하며 울어 댔다.

“가게 해줘요. 허버트야! 내가 간다. 엄마가 간다. 조금만 기다려라.”

노크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 오더니 계속 이어졌다. 아내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갑자기 몸을 비틀며 남편의 손을 뿌리쳤다. 남편으로부터 풀려난 아내는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편이 허둥지둥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아내를 뒤쫓으며 멈추라고 애원을 했다. 문을 잠그느라 채워 놓은 쇠고리가 덜거덕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문의 아래쪽 빗장도 고리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흔들리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아내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열이 오른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 놈의 빗장!” 그녀가 크게 울부짖었다.

“빨리 내려와요. 높아서 손이 잘 닿지 않아요.”

하지만 남편은 더 이상 아내를 따라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남편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손을 거칠게 더듬거리며 그 원숭이 발을 찾으려고 온 방안을 기어다녔다. 머리 속에는 온통 문이 열리고 이미 아들이라고 할 수 없는 저 괴물이 집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원숭이의 발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끔씩 반복되며 남편의 마음을 다급하게 만들던 노크소리가 이제는 그 절정에 도달한 듯 집중적으로 연속되면서 집안 구석구석 메아리쳤다. 모성애 빼고는 모든 것을 망각한 듯 보이는 아내가 조흔 생각을 떠올렸다. 의자를 끌고 와서 문을 열어줄 생각을 한 것이다. 의자가 끌리는 불쾌한 소리를 위층의 남편도 들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거의 없다. 곧이어 화이트 씨의 귀에 빗장이 삐걱 소리를 내며 뒤로 천천히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는 원숭이 발을 찾아냈다. 그리고 조금의 주저도 없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소원을 빌었다.

노크 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하지만 아직 그 소리가 메아리 되어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의자가 뒤로 빠지는 소리가 위층으로 들려 왔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계단을 타고 온 집안 구석구석까지 퍼져 들어왔다. 절망한 늙은 아내의 길고도 큰 통곡 소리에 용기를 얻은 남편이 아래로 달려가서 아내의 옆에 섰다. 문 밖에도 나가 보았다. 어름거리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조용하고 황량한 도로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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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구석구석 따스하고 소소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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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偶像)의 눈물

전 상 국

학교 강당 뒤편 으슥한 곳에끌려가 머리에털나고처음인그런무서운 린치를 당했다. 끽소리 한 번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다. 설사 소리를 내질렀다고 하더라도 누구 한 사람 쫓아와 그 공포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였고 도서실에서 강당까지 끌려가는 동안 나는 교정에 단 한 사람도 얼씬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더우기 강당은 본관에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주 까마이득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재수파(再修派)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무언극을 하듯 말을 아꼈다. 그러나 민첩하고 분명하게 움직였다. 기표가 웃옷을 벗어 던진 다음 바른손에 거머쥐고 있던 사이다 병을 담벽에 깼다. 깨어져 나간 사이다 병의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그의 걷어올린 팔뚝에 사악사악 그어 갔다. 금간 살갗에서 검붉은 피가 꽃망울처럼 터져 올랐다. 기표가 그 팔뚝을 내 눈앞에 들이댔다. 핥아! 기표 아닌 다른 애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비키자 곁에 둘러선 서너 명의 구두 끝이 정강이에 쪼인트를 먹였다. 진뜩한 액체가 혀끝에 닿자 구역질이 났다. 오장이 뒤집히듯 역한 것이 치밀었다. 나는 비로소 온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거센 공포로 해서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비벼댔다. 그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 바지에서 혁대가 풀려 나간 다음 벗겨져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에 칼끝이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이 왔다. 나는 그들에게 양쪽 겨드랑이를 잡힌 채 몸부림쳤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칼끝은 상당히 오랜 시간 허벅지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살 타는 냄새를 맡았다. 칼침이 아니라 그들은 담뱃불로 내 허벅지 다섯 군데나 지짐질을 했던 것이다. 소리질러 봐, 죽여버릴 거니, 한 놈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드디어 허물어져 내리듯 의식을 잃어 갔다. 그런 몽롱한 의식 속에서 기표가 씨부려 댄 한 마디 말소릴 놓치지 않았다.


- 메시껍게 놀지 마!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이 내게 린치를 가한 이유란 단지 그것이었다. 2학년 재수파들이 나를 첫 표적으로 삼은 것은 내가 그들 눈에 메스껍게 보였기 때문이다. “유대야, 너 그대로 참을 꺼냐?” 분식집에서 만난 형우가 슬쩍 내 심중을 떠보고 있었다. 내가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는데도 그 소문은 파다했다. 소문이 쉬쉬 떠도는 며칠 동안 나는 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 소문이 학교 선생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생길 경우 십중팔구 나는 결딴이 나고 말 것이다. 기표는 그런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이였다. “그 새낀 악마다”

형우가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충동질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해 보였다. 그것은 이미 겪은 우월감 같은 오만감이었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형우의 눈에서 자기도 미지에 당해야 하는 두려움과 아울러 내게 대한 선망이 깔려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형우가 기표에게 당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것은 기표와 같은 배에 오른 우리들의 공동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 날 편반이 끝나고 키 크기에 따른 각자의 번호와 교실 좌석까지 다 정해졌을 때 새 담임이 된 김선생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66명이 운명을 함께 하는 역사적 출항을 선언한다.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가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 이 시간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배의 순탄한 진로를 헛갈리게 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전정할 때 역행 가지를 잘라버려야 하듯 여러분의 항해에 역행하는 놈은 여러분 스스로가 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1년간의 일사불란한 항해를 위해서는 서로 사랑과 신뢰로써 반을 하나로 결속하는 슬기를 보이는 일이다”


새 담임선생은 과학교사답지 않게 적절한 비유로써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에게 뭔가 불어넣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사안일 속의 1년이었던 것이다.

“고삐는 여러분 손에 쥐어져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고삐를 당겨 여러분 스스로를 제어해 주기 바란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여러분 스스로가 내 손에 그 고삐를 쥐어주는 일이다.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담임선생님은 자율이라는 낱말로 요술을 부려 우리들을 묶고 있었다. 어느 연극잡지에서 완숙한 연출가는 배우 스스로가 연출하도록 유도하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읽은 것이 생각났다. 대단한 담임을 만났다는 기대로 아이들은 가슴을 부풀이며 앉아 있었다. 14개 반에서 사오 명씩 떨어져 나와 새로이 편성된 새 반의 분위기는 사뭇 숙연했다. 나는 문득 이런 숙연한 분위기가 우습게 생각되었다. 단 며칠 못 가 형편없이 허물어질 아이들이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앉아 담임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게 우습게 보였던 것이다. 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선생님, 우리가 탄 배의 선장은 누굽니까?”

내가 불쑥 일어나서 말했다. 선장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율이라는 낱말로 우리를 묶으면서도 실상 우리들 머리 위에 군왕처럼 군림하고 싶은 그의 저의를 찔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내 느닷없는 질문에 부스럭부스럭 굳은 몸을 풀고 있었다.

“이 배의 선장이 누구냐,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의 번호와 이름은?” 담임이 얼굴 가득 미소를 잡으며 여유있게 나를 훑었다. 반격을 당한 나는 얼굴을 붉히며 엉거주춤 다시 일어나야 했다.

“35번 이유댑니다” “예수를 판 유댄가, 이스라엘 유댄가?”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얏 리, 옥유, 큰 댓자, 이유대입니다”

“좋았어. 이유대군이 오늘 이 시간부터 일주일간 2학년 13반의 임시 선장이다. 물론 일주일 뒤에는 새 선장을 뽑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두겠다. 이 배의 주인은 여러분 자신이다. 이유대 선장, 내 말의 뜻을 알겠나?” 아이들이 와하하 웃으며 박수를 쳤다. 반장하고 싶어 몸살 난 애라구요. 그렇게 소리지르는 놈도 있었다. 실로 난처한 입장이 돼버렸다. 한낱 농으로 시작한 일이 담임의 임기응변에 의해 꼼짝없이 임시 반장 감투를 쓰게 되었다. 꽁무닐 빼고 어쩌고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담임은 첫 만남을 끝냈다. 이렇게 해서 된 임시 반장이 기표의 비위를 사납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것이다. “어떤가, 약 일주일간 반장을 하면서 느낀 우리 반에 대한 소감은?” 담임선생이 가정방문을 나왔다.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과 집에서 만나는 선생의 이미지는 전연 다르게 마련이다. 학교에서보다 훨씬 부드럽게 대해주는데도 공연히 거북스럽고 몸이 찌부러든다. 그래서 우리들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담임선생에게 가정 방문을 당한 뒤로는 독빠진 뱀처럼 맥을 쓸 수 없게 된다. 가정방문을 나온 담임선생은 대개 여러가지 정보를 얻어내려 부심하게 된다.

“얘네 반 아이들의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좋아들 한답니다”

곁에서 엄마가 의례적인 아부의 말을 했고 담임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못 들은 척했다. 사실 아이들은 좋은 선생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다. 좋은 선생이란 조건없이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한 다음 그것을 가볍게 입밖으로 내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때, 유대가 그대로 반장을 맡는 게?”

이번에는 담임이 엄마의 귀를 겨냥한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전 그런 일이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내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고 엄마가 거들었다.

“그래요 선생님, 얜 반장하는 게 죽어두 싫다는군요”

뭔가 아쉬워하면서도 엄마는 내 뜻을 따라 주었다. 반장을 하면 성적이 떨어지게 마련이란 내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남 앞에 나서는 일, 남들보다 한 발짝 높은 데 선다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번거로운 일인가를 나는 엄마의 극성에 의해 중학교 3년간 반장을 하면서 절실히 체득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 무서운 구속이었다. 남을 다스리는 그런 자유보다 남에게 다스림 받는 데서 얻는 마음의 안일이 내게는 더 좋았다. 나는 고독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표 같은 애들이 누리는 지배욕 그 안쪽에 몸을 뒤틀고 있는 고독의 그림자를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본 것 같았다.

“맞습니다. 사실 유대는 반장을 하는 것보다 공부에 달라붙는 게 더 좋을 겝니다. 아깝지만 유대를 위해서 제가 양보할 수 밖에요”

우리의 담임선생은 일을 요령있게 풀어나가 재치있게 마무리하는 명수였다. 아뭏든 나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담임 선생의 논리대로라면 누군가 내 대신 희생이 되어야 한다.

“임형우, 걔가 반장으론 괜찮지?”

일주일 동안 그는 우리들을 상당히 깊게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안목은 대단했다. 반장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를 알고 있는 담임이었다. “형우라면 틀림없읍니다” 내 말의 꼬리를 잡아 엄마가 껴들었다. “형우라니? 오매, 형우하고 또 한 반이 됐냐? 선생님, 얘하고 형우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랍니다. 걔하고 늘 전교에서 일 이등을 다튔는걸요. 그룹 과외도 같은 데서 죽 함께 해 왔고…… 우리 유대가 늘 앞선 편이긴 했지만…… 그래요, 걘 반장 같은 건 잘할 거예요. 얘가 통솔력이 보통이 아녜요”

중학교 3년 동안 아들에게서 위대한 통솔력이 나타나 주기를 고대했던 엄마의 푸념이 깃든 말대로 형우는 반장이 될 만한 여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무게가 있고 때로는 교만하고 생각한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해 내는 결단력도 대단했다. 학교 당국의 지시에는 일단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임하다가도 어떤 결점이 보일 때는 무섭게 반격을 가하는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어떤가, 우리 반에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애는 없겠지?”

첫 만남에서 담임이 말한 우리들의 항해에 방해가 될 만한 그런 역행가지를 귀띔해 달라는 것일 게다. 나는 불현듯 담뱃불에 지짐질당해 아직도 진물이 줄줄 흐르는 내 허벅지를 내보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어쩌면 담임도 내 입에서 기표에 대한 얘기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1학년 때의 기표 담임이 기표가 1학년 때 한 번 유급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길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엄마 앞에서 반우를 매도하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기표, 그놈 괜찮을까?”

담임선생이 조심스럽게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내 허벅지의 상처를 내보인 것처럼 불유쾌한 기분이 되어 얼굴을 돌렸다.

“최기표라면 그 1학년 때 낙제해서 한 해 묵었다는 애 말이구나?”

엄마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알고 싶어 안달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담임선생한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러나 엄마는 가장 가까운 데 있는 내 허벅지의 담뱃불 자국을 알지 못하고 있다. 최기표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최기표가 어떤 아이인지를 진정 모르는 어른들에 대해서 내 상처를 내보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맞습니다. 걘 유급한 것도 문제지만 보통 말썽꾸러기가 아니지요. 왜, 한 눈에 이건 범죄형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얼굴이 있지 않습니까. 걔가 바로 그런 전형적인 범죄형이지요. 음침하고 포악스럽고…… 1학년 때 걔 담임을 한 선생이 그러더군요. 십년감수를 했다구요. 그러면서 나를 동정한다는 얘기였어요. 그 정도면 알쪼가 아닙니까”

“그런 애가 어떻게 여태 퇴학을 안 당했나요. 교칙이 엄하기로 이름난 학교인데……”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얼굴에 그늘을 깔았다.

“바로 그겁니다. 이놈이 원래 교활하고 지능적이어서 도대체 제적을 당할 만한 큰 일에는 직접 앞에 나타나지 않고 뒤로 쑥 빠진다 그겁니다. 엉뚱한 놈이 당하곤 하지요. 정학을 몇 번 당하긴 했지만 어떤 결정적 꼬투릴 잡을 수 없으니까 제적을 못 시키는 거지요” 기표가 무서워서, 그의 안하무인한 앙갚음이 두려워서 제적을 못 시켰다는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기표에 대해서 이처럼 깊이 파악하고 있다니---과연 기표는 이름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기표 얘기를 입에 올리는 담임은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나는 문득 이제부터 1년간 담임선생과 최기표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질 싸움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까지의 결과로 미루어 보아 최기표에게 승산이 크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의 담임선생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싸움에 임형우도 한몫 끼어들지 모른다. 그가 어떤 편에 서느냐 하는 문제도 퍽 흥미있는 문제일 것이다. 아뭏든 이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그네들 싸움을 구경한다는 것은 진정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놈들이 옛날과 달라서 선생을 우습게 알기 때문에…… ”

담임선생은 엄마와 함께 교육론을 펴고 있었다.

그랬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교사들을 한낱 껄끄러운 존재로 여길 뿐 오히려 그룹 과외선생의 완벽함에 더 매료되곤 했다. 그것은 상대적이었다. 우리들의 교사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처럼 교사들도 우리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룹 과외선생처럼 철저하게 얼굴에 철판도 깔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지배(支配)에 대한 견해의 다름이었다. 그네들이 옛날 훈장이 누렸던 권위가 고스란히 쥐어주길 바랬고 실상 그러한 권위만이 변화된 가치 속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인습적 권위에 대해서 코방귀를 날릴 수 있을 만큼 그보다 더 완벽하고 조직적인 분명한 권위의 다스림 속에 몸을 맡기길 좋아하고 있었다. 그 한가지 예로 우리 엄마는 촌지 봉투로 담임선생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그 기표라는 얘네 집에 가 보셨어요?”

무슨 얘기 끝인가 엄마가 물었다.

“아직 못 갔읍니다. 1학년 때 담임들도 걔 부모를 못 만났다더군요. 놈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은 거지요. 한양천 뚝방동네에 살고 있는 건 틀림이 없는데 번지를 제대로 알아도 집 찾아내기가 어렵다더군요. 어떤 애 얘기론 기표 아버지가 중풍으로 들어누운 폐인이래요”

담임선생은 우리 집 방문을 끝내고 다른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내게 말했다. “유대, 네 도움이 필요하다” “뭘 말입니까?”

“우리 반을 위해서 네 협조를 받고 싶다는 얘기다. 물론 나는 네가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고자질하는 그런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반 전체를 위한 너의 조언이다. 어때 협조해 줄 수 있겠지?”

나는 얼굴에 열기가 끼쳤다. 이것은 치욕이었다. 담임은 나를 자신의 첩자로 삼으려는 것이다. 1학년 때도 그랬다. 나는 담임선생이 원하는 대로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임에게 알렸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시치미떼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아이들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바지했다고 하는 자부였다. <우리>를 위해서 내 힘이 쓰여지고 있다는 기꺼움 때문에 나는 그러한 고자질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수룩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아이들에게 따돌림받았다. 나는 한낱 <우리>의 힘을 해치는 담임의 첩자였을 뿐이다. 나를 이용해 먹은 담임이 그 사실을 새 담임에게 인계하는 배신을 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나는……”

내 표정이 꽤 굳어 보였던 모양이다. 담임선생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만 나는 인간적인 면에서 네 도움이 받고 싶었을뿐이다”

“선생님, 그런 일이라면 임형우가 잘 해줄 겁니다. 선생님이 염려하는 최기표도 형우가 잘 다스려 나갈 겁니다. 내일 당장 형우를 반장에 임명하세요”

“그럴까? 네 말대로 임형우가 최기표를 잘 다스려 준다면 고맙겠지만…… 내 생각엔 최기표를 부반장에 임명하면……”

“선생님, 기표 한 개인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기표의 힘을 빼어 반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까?”

담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내 얼굴을 뻔히 치어다보다가 음모의 한 귀퉁이를 드러내 보인 무안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여러 사람에게 해가 되는 그런 힘은 아예 빼어버리는 게 좋은 거다”

기표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것에 있는지도 모르는데요--이렇게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그 대신,

“선생님, 기표는 유급생인데다 여러 번 정학을 당했잖아요. 그런 아이를 간부로 임명하면 아이들이 좋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기표가 학교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교단 위에 서서 아이들한테 애원하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누가 사자를 울 속에 넣어 길들이는 발상을 처음 했는가. 나는 내 허벅지의 상처를 결코 격하시키고 싶지 않았다.


춘계 교내 체육대회를 위해서 우리는 정해진 체육복 외에도 마스게임용 추리닝 한 벌을 사야 했다. 협동심과 조화 속의 미를 창조하는 데 그것은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툴툴거리는 아이도 몇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들도 그것을 모두 준비했다. 그러나 우리 반에 단 둘뿐인 재수파들은 끝내 그것을 사 입지 않았다. 담임이 말했다. “두 사람 때문에 반의 일사불란한 결속이 깨질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집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담임이 두 사람 것을 준비했다. 받아주면 고맙겠다”

한 아이가 기표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기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임선생이 그 추리닝을 기표와 또한 아이의 책상 위에 놓은 다음 교실을 나갔다.

담임선생이 교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기표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그 추리닝을 찢기 시작했다. 너덜너덜 조각난 추리닝을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 다른 한 아이가 기표처럼 그렇게 추리닝을 찢었다. 기표가 반의 총무를 맡고 있는 정수라는 애한테 다가갔다.

“야, 네 추리닝 나 줄 수 없냐?”

정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수 뒤의 애한테도 같은 말을 했다.

“쟤도 나처럼 돈이 없어 못 사 입었다. 네꺼 좀 얻자. 줄래?”

정수 뒤에 앉은 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 반 66명은 마스게임용 추리닝을 다 사 입었다.


우리가 볼 때 기표는 구제불능이었다. 그의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기보다 선천적인 어떤 포악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냉혈동물처럼 피가 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뱀처럼 작고 징그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활한 자들이 가끔 보이는 그런 거짓 착함마저도 나타나 보일 줄 몰랐다. 철저하게 악할 뿐이었다. 평생을 두고 사랑이라는 낱말로 미화될 수 있는 행동거지를 해 보일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그는 자신의 그런 포악성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표정은 항상 독기를 음울하게 깔고 있어 맞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학교 때부터 기표를 알고 지내온 아이들(대부분 3학년이거나 졸업했다)은 기표가 그처럼 철저하게 나쁜 애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애라고 말하는 일도 없었지만 아무도 기표를 욕하지 않았다. 피해를 직접 받은 애들마저도 기표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길 꺼려하는 거야. 악에 대한 공포 때문이지.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옳지 않음을 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표에 대한 공포는 그에게 린치를 당할 때뿐이었다. 내가 린치를 당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것은 앙갚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또한 그처럼 무자비한 린치를 당했으면서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힘이 그에게 있는 것 같았다. “형!” 동급생이면서도 우리들은 2학년에 재학하는 유급생 20여 명을 꼭 공대했다. 재수파들이 그렇게 대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공대하면서도 입이 껄끄럽지 않은 것은 재수파를 이끌고 있는 기표의 위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 체육복 좀 빌려 줘라”

재수 없는 아이가 유급생인지 모르고 말을 함부러 놓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럴 때 그 아이는 영락없이 얻어터졌다. 일의 특징을 따지지 않는 게 기표가 행하는 악의 특징이었다.

- 명칭, 조직의 목적, 모임의 횟수를 모두 대라구!

교실에서의 집단 구타 사건으로 그들이 걸려들었을 때 학생주임은 전말서를 내밀며 소리쳤다. 기표들은 1학년 때부터 음성 써클로 지목되어 수차례 조사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주임은 번번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나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파는 우리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이었을 뿐이다.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목적이나 정기적인 모임 같은 게 없었다. 동물 영화를 보면 밀림을 달리는 맹수 떼들은 한 리더를 중심해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간다. 그들도 그랬다. 그냥 기표를 중심해서 그들은 모였고 계획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발적인 악이 그들에 의해서 저질러졌을 뿐이다.

기표는 교실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의 담배 은닉처는 고호의 자화상이 있는 액자 뒤쪽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그는 액자 뒤쪽을 더듬어 담배를 꺼냈다. 미션 계통의 학교라 일주일에 몇 번씩 있는 채플 시간을 통해 교목이 인간 양심의 타락을 개탄했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기표는 주번을 대신해서 교실에 남아 담배를 피거나 아이들 도시락을 먹어 버리는 일을 했다. 그는 적어도 하루 두 개의 도시락을 축냈다. 아무도 그것을 항의하지 않았지만 기표 또한 미안해하는 표정이나 사과의 말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기표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학교 골목을 절뚝거리며 나오던 그 고통스럽고 긴 시간 내가 생각한 것은 기표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악마의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가 통할 만한 집안의 어떤 형에게 말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 맞아. 신이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악마란 바로 네가 말한 놈처럼 착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악마지.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속으로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


5월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오후 반장인 임형우가 드디어 재수파한테 당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처럼 근본이 포악한 기표마저도 형우의 얘기라면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그처럼 형우는 모든 아이들의 인심을 살 줄 알았다. 형우의 성실성이, 남을 위해 자기를 던질 줄 아는 의협심이, 그의 천성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외모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다른 반 선생들의 호감을 샀다. 형우는 특히 기표에게 잘 해주었다. 아우가 형을 대하듯 스스럼없이 사랑해 주었다. 그렇다고 기표에게 특혜를 얻어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유독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다른 아이들이 기표에 대해 갖는 그런 공포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5월 고사에 이르러 형우가 결정적 실수를 했다.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형우가 반에서 성적이 괜찮은 몇몇 아이를 모았다. “두 사람을 조금씩 도와주자” 그가 제의했다.

“이번 시험을 잘 못 보면 또 낙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나쁜 낙제 제도 때문에 그들이 구제불능의 상태에 놓이도록 방관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물론 공부를 잘 못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으로 그들을 추궁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한심한 상태의 아이들이다”

“결국 동정하자는 거군” 어떤 아이가 말했다.

“인간을 구제한다는 것은 값싼 동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투고 싶지 않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돕자는 거냐?”

먼저 아이가 물었다. “조금씩만 돕자” “결국 부정 행위를 하란 말이냐?” “그렇다. 커닝이 교칙에 위반된다고 해서 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다. 나는 다만 너희에게 부탁했을 뿐이다”“걸렸을 때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내가 시켜서 했다고 해라”

우리는 형우의 단호한 어조에 감명받았다.

“걔들이 우리들의 도움을 거부하면?” 어떤 애가 그런 우려성을 내놓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4월 고사에서 내가 약간 시도해 보았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다”

나는 형우의 눈꼬리에 매달린 교활해 뵈는 웃음을 보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냐? 기표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냐?” “유대, 네 말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답을 않겠다” “대답해라. 대답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내가 빈중거리는 투로 다그쳤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옳은가는 네 자신이 생각해도 된다” “네 의협심을 존중한다”

내가 간단히 손을 들어버리자 형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이왕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이 일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최소한 반장인 내가 기표의 환심을 사려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라.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은 이 일이 내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결 기표가 모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형우의 말을 믿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얘기도 그의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4월 중순께 기표가 3학년 형을 구타한 일로 벌을 받게 됐을 때 학급 전원이 서명해서 기표를 구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처럼 우리는 형우의 지시에 따라 세심한 계획을 짜고 시험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무슨 과목은 누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준다는 등 그들이 또다시 유급하지 않을 정도의 점수를 올리기 위해 우리들은 빈틈없이 준비했다. 남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마음에 이다지 큰 기꺼움을 준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3일간 계속되는 중간고사 첫날이었다. 기표와 대각으로 앉게 된 정수가 자리의 이점을 이용해서 답안지를 바른쪽 허리께로 내리밀어 기표가 보기 좋게 해 주었다. 첫시간에 기표가 정수의 그러한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퇴장할 수 있는 30분이 되자 제일 먼저 답안지를 놓고 나갔을 뿐이다. 시간이 끝나고 답안지를 거둔 아이의 말에 의하면 기표의 답안지는 거의 백지에 가까왔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둘째 시간은 영어였다. 총무를 맡은 애가 시간 중간쯤에 문제 번호와 답을 쓴 커닝페이퍼를 몇 사람 손을 거쳐 기표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기표가 벌떡 일어나 감독선생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떤 새끼가 이걸 나한테 전해 왔읍니다”

그는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한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제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사방을 휘이 적의 깊게 노려봤다. 악한 자의 간특한 미소가 입가에 고물고물 기어다녔다.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은 마음 너그럽기로 이름난 영어교사였다. 그는 기표가 내놓은 종이쪽지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말했다.

“누가 이런 메모지를 지금 저 학생한테 전달했나?”

문제 풀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이 한번씩 고개를 들었다간 다시 문제로 돌아갔다. “누군가?”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떤 개새끼야?” 이번에는 기표가 자리에 앉은 채 으르렁거렸다.

“선생님, 제가 그랬읍니다” 반장인 임형우가 벌떡 일어섰다. 감독선생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아닙니다. 그건 제가 썼읍니다” 불쑥 딴 자리에서 또 한 애가 일어섰다. 총무를 맡아보는 애였다. “아닙니다. 제가 그랬읍니다”

다른 아이 하나가 또 일어섰다. 함께 모의를 했던 아이 중의 하나였다. “접니다” 또 다른 놈이 일어섰다. 접니다. 접니다. 사방에서 우루루 아이들이 일어섰다. 허, 허허, 허허허……감독선생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기표의 얼굴이 노오랗게 질렸다.

“자, 모두 앉아요” 감독선생이 뭔가 사태를 파악한 듯 이삼십 명의 아이들을 자리에 앉도록 지시했다. 아이들이 다 자리에 앉은 다음, 그 나이 많은 감독선생이 말했다. “오늘 이 일은 전연 없었던 것으로 해 두기로 한다.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이쪽지를 가지고 나왔던 사람의 곧은 정신이나 우정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여러분 모두의 결의는 대단히 훌륭했다” 일은 이런 방향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기표를 살폈지만 그는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끝 시간인 세째 시간도 별일없이 끝났다. 종례가 끝나고 청소 시간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다.

“유대야, 담임이 아까 오라고 한 사람 빨리 교무실로 오래”

한 애가 내게 말을 전해 왔다. 종례가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던 담임이 복도에서 나를 불러내어 청소가 다 끝난 뒤 나와 반장 그리고 정수를 교무실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함께 교무실로 가려고 찾으니 반장도 정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동장으로 내려서는 계단 휴게실까지 가 보았다. 거기도 그들은 없었다. 교무실에 먼저 가 있겠거니 하고 계단을 올라서는데 정수가 학교 후문있는 데서 뛰어오면서 손짓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반장은 어디 갔나?” 담임선생은 그날 끝낸 화학시험지의 답안지를 정리하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저희들만 왔읍니다” 나는 정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곁에 선 정수의 숨소리는 아직도 고르지 않았다. “응, 됐어, 너희들 둘이 해도 되겠지”짐작했던 대로였다. 우리는 담임선생님의 채점기계로 호출된 것이다. 답안지를 든 담임선생님을 따라 우리는 화학실로 올라갔다. “나 화학실에 있다고 사환애한테 알려뒤라. 밖에서 전화올 게 있다” 복도에서 담임이 말했다. 내가 아래층 교무실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들 사이에 넙찍이라고 불리는 사환 계집애가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님 화학실에 계셔. 무슨 일 있으면 그리 연락하라고!” 넙쩍이가 고개를 들지 앉은 채, 알았어---했다.

우리는 담임선생님과 함께 아이들의 답안지에 ○×해 나갔다. 맞은 것 틀린 것, 좋은 답 나쁜 답, 착한 놈 나쁜 놈…… 우리들이 동그라미 하나 더 치면 그 아이는 5점이 올라갈 수 있었다.

“야, 느덜 오늘은 속도가 느리구나”

담임의 말이 사실이었다. 우리는 다른 때와 달리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정수나 나나 매한가지였다. 정수는 눈에 띄게 허둥거리고 있었다. 나 역시 답안지의 내용이 자꾸 헛갈렸다. 적어도 일곱 명쯤의 재수파들 속에 형우가 무릎을 꿇고 와들와들 떨고 있을 것이다. 명치를 찌르는 주먹, 정강이뼈를 겨냥한 구둣발 세례, 피가 꽃망울처럼 솟아오르는 기표의 팔뚝, 허벅지를 태우는 살 냄새…… 하나, 두우울, 세에-엣, 네에-엣, 다아…… 아악. 소리질러 봐, 죽여버릴 거니! 석공이 돌을 다듬듯 완벽한 솜씨로 그들은 형우의 육체와 영혼을 주장질시키는 일에 탐닉하고 있을 것이다. 형우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수가 담임에게 일러바쳐 지금쯤 자기를 구원해 주러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그들에게 도도한 자세를 보일 것인가, 나는 짐짓 정수의 눈을 찾았다. 나를 바라보는, 정수의 눈이 애원하듯 타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네가 말해! 그런 뜻의 눈짓을 내가 보냈지만 목덜미를 더욱 벌겋게 달구며 고개를 꺾었다.

“너희들이 잘해 주어서 올해는 퍽 수월하게 넘어갈 것 같구나”

담임선생은 채점을 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잘해 주는 것 같단 말이야. 느이들이 아다시피 우리 반이 2학년 전체에서 제일이거든. 지난 춘계 체육대회 때 종합 우승이며 이번 이사분기 납부금 실적도 단연 으뜸이고……”

나는 실소하며 정수의 눈을 찾았다. 그러나 정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직 한 권에서 반도 넘기지 못한 채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실소했다. 담임선생이 지금 형우가 처하고 있을 상황을 안다면 어떤 표정으로 바뀔 것인가.

“참 알 수 없는 일은 최기표가 듣던 것과는 달리 양처럼 순하다 그거야. 몇 번 말썽이 있긴 했지만 그까짓 거야 별 거 아니지. 어떻든 그놈도 본성은 착한 놈인데 가정 형편이 못한가 보더라”

담임선생은 자기가 부리는 채점기계의 묵묵한 작업에 눈을 보낸 채 자못 흐뭇한 표정이었다. “다 담임선생님께서 잘 지도해 주신 덕분이죠 뭐” 내가 시치미를 떼면서 말하자,

“아닌게 아니라 나로서도 그 동안 너희들이 이해 못할 애로사항이 많았다. 인간을 교육한다는 것이 새삼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됐고, 또한 그런 어려움 속에서 교육하는 보람도 얻을 수 있었던 거지”

정수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번지르르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알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는 몹시 괴로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형우가 재수파들한테 끌려 학교 뒷산 으슥한 곳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내게 전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사실을 나한테 얘기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면 담임선생한테 그 사실을 쉽게 알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자신의 판단이 빗나간 데 대한 당혹감으로 그는 떨고 있는 것이다. - 임마, 느덜이 생각한 것처럼 난 담임선생님의 첩자가 아냐. 나는 다시 정수의 눈에 맞춰 눈싸움을 벌였다. 정수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이 녀석이 발광을 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학년 때 나는 해중이란 아이가 기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일을 알고 있었다. 그 애 역시 재수파였다. 다섯 놈이 캠핑을 나가 여학생 하나를 결딴냈다. 피해자 측에서 사생결단하고 덤벼 일이 크게 번졌다. 당한 애가 인상을 말했기 때문에 범위는 대번 좁혀져 재수파들이 학생부실에 불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사코 잡아뗐다. 하루 내내 족쳐도 헛일이었다. 여학생과 대면을 시키겠다고 해도 만나게 해달라고 날뛰었다. 그때 그들 재수파 중의 한 아이 어머니가 학교에 나타난 것이다. 그네는 학생부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기표를 손가락질했다. 저 놈, 저 놈이 우리 해중일 맨날 불러냈지! 우리 해중일 망치는 놈이 바로 저 놈이라우! 모두 기표를 바라보았다. 기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해중이를 돌아다보았다. 이 새끼야 내가 느네 엄마 말대로 널 맨날 불러냈냐? 소름이 끼치도록 낮고 매서운 추궁이었다. 말해라, 이 녀석아, 왜 사실대로 말 못하는 게야? 해중이 엄마가 퍼댔다. 말해! 기표가 씹어 뱉듯 말했다. 해중이가 느닷없이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기 시작했다. 엄마, 기표는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왔어. 우리 집도 모른단 말이야. 선생님, 접때 그 일은 제가 했어요. 딴 학교애들하고 그랬단 말예요.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학생부실 시멘트벽에 머리를 두어 번 부딪쳤다. 해중이가 병원으로 들려간 뒤 학생부 선생이 함께 조사를 받던 놈들한테 물었다. 해중이 말이 사실이냐? 기표가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그 썅새끼--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애들도 모두 기표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중이가 스스로 학교를 물러난 것으로 일은 끝나 버렸던 것이다. “아직 멀었냐?”

담배를 피운 다음 책상에 앉아 잠시 졸고 난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느 정말 오늘 왜 이렇게 늦냐?” 우리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때, 90점 이상 많이 나오냐?” “하나도 없는데요”

“참 느덜 공부 안해 큰일났다” 그때 화학실 문이 열렸다. 넙쩍이 아가씨가 거기 서 있었다. “왜, 나한테 전화 왔냐? 여자지”

그러나 넙쩍이 아가씨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가 아녜요. 선생님 빨리 내려가 보세요. 야단났어요”

담임선생님이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정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유대야, 말하는 건데 그랬다” “난 네가 말할 줄 알았지”

“아까 네가 말랬잖아? 난 네가……” 정수는 금방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듯 얼굴을 우그려뜨렸다.

“기표가 안 좋아할껄, 고자질하는 거 말이야” “그렇지만형우가……”

“아마 형우도 원하지 않았을 거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니?”

“응, 형우는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당하길 원했거든”

정수가 무슨 얘기냐는 듯 나를 보았지만 나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죽진 않았을 거다” 우리들이 답안지를 정리해 들고 교무실을 내려왔을 때는 교무실은 넙쩍이 아가씨 혼자 있었다.

“김선생님이 빨리 한강병원으로 오라고 하던데요”

“무슨 일이래요?” “어떤 아줌마가 아까 막 달려와서 학생들이 뒷산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해 학생주임선생님이 가봤더니요, 2학년 13반 반장이 혼자 뒹굴고 있더래요”

우리들은 학교에서 가까운 한강병원까지 단 한 마디 말도 않은 채 달려갔다. 죽지 않았을 거다. 나는 뛰면서 생각했다. 기표가 사람을 죽일리가 없지. 기표는…… 형우는 응급실 의자에 엉거주춤 누워 있었다. 형우가 외관상 멀쩡해 보이는 데 대한 한 가닥 실망이 스쳤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형우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임시로 잡아맨 넓적다리의 붕대위엔 꽃송이처럼 선명한 핏자국이 피어올랐다. 우리를 발견한 형우가 재빠른 동작으로 손가락 하나를 퉁퉁 부은 제 입술에 댔다가 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유대야, 너 형우네 집 전화번호 알지?” 학생주임과 함께 서 있던 담임이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나는 시치미를 떼며 형우의 표정을 살폈다. 형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선생님, 제발 저를 그냥 돌아가게 해 주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단 말씀에요” “임마, 여길 나가기 전에 사실대로 대란 말이다”

학생주임이 다그쳤다. “말씀드릴 수 없읍니다. 제가 잘못한 일로 싸웠는데 왜 친구들을 괴롭혀야 합니까” “임마, 넌 싸우지 않았어. 본 사람이 그랬어, 네가 몰매를 맞더라고”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먼저 그 아이한테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싸웠던 겁니다”

“그게 누구냔 말이다” “말할 수 없읍니다”

“너 정말……” 학생주임이 혀를 내둘렀다. “너 정말 학교를 허수아비로 아는 거냐? 학교 다니기 싫어?” “저는 처벌을 달게 받겠읍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말할 수는 없읍니다”

담임선생은 얼굴에 그늘을 깐 채 팔짱을 끼고 한 편에 묵묵히 서 있었다. 우리반의 일사불란한 항해를 거슬린 자가 누굴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야말로 우리들 손에서 고삐를 낚아채어 거머쥐고 목을 옥죄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유대, 넌 알 거다, 형우를 때린 놈들이 기표네 패라는 걸 말이다”

“형우가 그렇게 말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건 틀림이 없다. 기표 놈이 아니곤 그런 짓을 할 놈이 없다”

담임은 헐떡거렸다. 양같이 순하게 길들여졌다고 확신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 형우가 뭘 잘못했다는 걸까요?” 내가 짐짓 떠보았다. “형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잘못하기는커녕 형우가 그놈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는지 넌 모를 게다”

담임선생님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기표에 대한 협오감으로 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표를 미워하다니. 나 역시 담임선생에 대한 적대감으로 몸을 떨었다. “뭡니까, 선생님. 형우가 기표를 위해서 무얼 했단 말입니까?” 내 반감 짙은 어투에 놀랐는지 담임선생은 좀 멈칫했다. 그러나 곧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임마, 나는 다 알고 있어. 기표가 저질러 온 짓 말이다. 유대, 너도 기표한테 당했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그놈들 부정행위를 거들어 준 것도 알고 있다” 그랬겠지. 나는 속으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서웠다. 어른들의 음흉스러운 심뽀, 알면서도 모른 체 시치미를 뗀 그 저의는 무엇인가. 형우는 우리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이 돼 버렸다. 예상 안한 건 아니지만 그 여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3학년에도, 1학년 하급생들도 2학년 13반 반장 임형우가 입에 올랐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고도 끝내 그 상대를 입에 올리지 않으므로 해서 형우의 존재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기표가 그 사건 다음 날부터 내리 사흘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도 재수파들은 학생부에 불려 가지 않았다.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담임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기표를 찾기 위해 뚝방 동네를 연 이틀이나 헤맨 사실도 학교에 널리 알려졌다. 기표가 학교에 나온 날 담임은 조회시간에 간단히 말했다. “최기표군은 그 동안 피치 못한 가정사정으로 결석했다. 앞으로 다시는 결석이 없을 것으로 안다” 항상 빳빳하게 쳐들고 앉았던 기표의 고개가 잠깐 숙여지는가 싶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상한 조짐이었다.

형우가 병원에서 퇴원을 해 2주일만에 학교에 나왔다. 악수 세례가 쏟아지고, 등을 두드리고, 체육시간에는 헹가래까지 시키려고 했지만 형우가 도망을 쳤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숨죽여 기표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친 아이들은 섬뜩한 느낌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나는 후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형, 우리 미술시간에 라면 먹으러 갈까?”

내가 말을 건넸다. 우리들은 가끔 후동교사 뒷담을 넘어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사 먹은 다음 감쪽같이 들어오곤 했다. 재수파들이 그 전문이었던 것이다. “필요없어”

기표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뱉았다. 그는 국어책을 읽고 있었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다른 반 애들이 말했다.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올 때마다 임형우의 일화가 예로 들어지면서, 학우를 아끼고 의리로써 지켜 준 참다운 우정과 반의 결속을 위해 담임선생님과 함께 남모르게 애써 온 그 숨은 이야기가 술술 펼쳐지더란 것이다. 교정에 모여선 아이들도 입에 입에 형우의 얘기로 만발했다.

“우리들이 커닝을 도와준 것이 기표의 비위를 상하게 한 모양이지?” 병원에 있을 때는 남의 눈을 생각해 못 물어본 걸 하교길 둘만의 자리가 됐을 때 내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글쎄 그런 것 같았다” 형우가 짐짓 좌우를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그때 그 일, 담임선생님이 시켜서 한 거지?”

내가 넘겨짚자 형우가 한 순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언제고 밝히고 싶었던 것이라 나는 다시 다그쳤다. “그렇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문제를 담임선생님과 의논한 건 사실이다”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냐?”

“아니다. 담임선생님이 기표를 나한테 일임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기표를 구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겠지. 형우야, 넌 지금 네가 기표를 구원했다고 보니?”

“아직 완전히는…… 그러나 멀지 않았다”

나는 웃어 주었다. “기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형우, 네가 구원해 주고 있다고 말이야” “그것은 기표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무슨 뜻이냐?” “우리가 무서워했던 건 기표가 아니라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재수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조직은 없어졌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냐?”

“내가 병원에 있을 때 그 애들이 모두 나한테 사과하러 왔었다. 하나 하나 서로가 모르게 다녀갔다” “기표두 왔었니?” 내가 헐떡이면서 물었다.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런 놈한테 사과도 받고 싶지 않다” 그럴 테지. 나는 후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래, 다른 애들이 너한테 사과를 했다고 해서 재수파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일 거야” “물론 겉으로야 그대로 남아 있겠지.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빨 뺀 뱀이나 다름없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라고” 형우와 갈라서야 하는 길목에 와 있었다. 나는 형우네 집쪽으로 따라 가며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냐?”

형우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표는 다 아는 것처럼 가난한 집 애다. 거기다가 그 부모가 다 병들어 누워 있다. 시집간 기표 누나가 대주는 돈으로 겨우겨우 먹고산댄다. 기표 동생이 셋이나 있다. 기표 바로 밑의 동생이 버스 안내원을 해서 생활비를 보탰는데 요즘 무슨 일로 해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아뭏든 생활이 말두 아니란 거야. 재수파들이 매달 얼마씩 모아 생활비를 보태줬다는 거야. 집에서 돈을 뜯어낼 수 없는 애들은 혈액은행에 가 피를 뽑아 그 돈을 내놓았다는 거다”

“그렇게 해 달라고 기표가 강요한 건 아닐 텐데”

“마찬가지다. 재수파들은 기표가 무서웠다는 거야”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는 걸” “그렇지 않아”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혈색이 더 좋아진 형우가 자신있게 말했다.

“이제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될 거다”

형우가 손을 흔들고 자기집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유능한 반장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씁쓸한 느낌이 가슴을 스쳤다.

담임의 예언대로 기표는 결석을 하지 않았다. 형우와 기표 사이에도 이렇다할 마찰이 없이 여름방학이 지났다. 교실에서 도시락이 없어지는 일도 드물었다. 물론 재수파들이 기표를 찾아 교실에 들락거리는 횟수는 잦았지만 아이들은 그닥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기표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담임선생이 가끔 기표에게 학급사무를 맡기는 게 눈에 띄었다. 기표가 별 표정없이 그런 일을 맡아 했다. 그날도 기표는 담임선생의 지시에 의해 체육부실에 내려가 우리 반 아이들의 체력검사 통계를 내고 있었다. 그럴 시각 담임선생이 말했다.

“66명이 탄 우리배는 순풍을 맞아 참으로 순탄한 항해를 하고 있다. 다 여러분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알려줄 한 얘기는 반장이 해 줄 것이다. 다만 담임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남의 일 아닌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담임선생이 교단에서 내려서고 그 대신 반장 임형우가 사뭇 엄숙한 표정으로 단 위에 섰다.

“담임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친구 하나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 그 친구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를 잡은 형우는 언젠가 하교길에서 내게 들려 준 기표네 가정 형편을 반 아이들한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형우의 혀였다. 나한테 얘기를 들려줄 때의 그런 적대감은 씻은 듯 감추고 오직 우의와 신뢰 가득한 말로써 우리의 친구 기표를 미화하는 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기표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정경이며 기표 어머니의 심장병, 그러한 부모들을 위해서 버스 안내원을 하던 기표 여동생의 눈물겨운 얘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기표네 식구들의 배고픔이 눈에 보이듯 열거되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결코 겉에 나타내지 않고 묵묵히 학교에 나온 기표의 의지가 또한 높게 치하되었다. 더구나 그런 가난 속에서 유급을 했기 때문에 1년간의 학비를 더 마련해야 했던 그 고통스러운 얘기도 우리 가슴에 뭉클 뭔가 던져 주었다.

“나는 얼마전 기표가 버스 안내원을 하던 여동생을 몹시 때린 일을 알고 있읍니다. 그 여동생은 몸이 약해 버스 안내원을 그만두었던 것인데 생활이 더 어렵게 되자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 나가기로 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여동생이 앞으로 어떤 무서운 수렁에 떨어져 내릴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읍니다”

반 아이들은 사뭇 숙연한 자세로 형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우는 기표네 가정 사정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기표의 허상을 빈곤이라는 그 역겨운 것의 한 자락에 붙들어 맨 다음 벌거벗기려 하는 것 같았다. 기표는 판자집 그 냄새나는 어둑한 방에서라면 가락을 허겁지겁 건져 먹는 한 마리 동정받아 마땅한 벌레로 변신되어 나타났다.

“한 가지 또 알려 줄 게 있읍니다. 그것은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위해서 이제까지 남이 모르게 도와 온 우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표의 가까운 친구들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재수파라고 불러 온 아이들입니다. 우리들이 무시해 온 그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우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달 용돈을 저축하고 또는 방학 때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해서 받는 돈으로 기표를 도와 온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매달 자신의 귀한 피를 뽑아 그 돈을 내놓기도 했읍니다. 한 달에 피를 세 번이나 뽑았기 때문에 빈혈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던 사람도 있읍니다. 사회에서 구원받지 못한 가난을 우정으로써 구원하려 한 그들이야말로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협동과 봉사--기여 정신의 산 증인들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학교에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이 텅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있읍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배고파 보지 못한 우리들의 우매함이었읍니다. 남의 찬 도시락을 훔쳐먹어야 했던 우리의 가난한 이웃을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지냈읍니다. 나는 반장으로서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사과하는 뜻에서 나는 오늘이라도 우리의 친구 기표를 돕는 일에 앞장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깊은 감동의 강물이 모두의 가슴 한 가운데를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교단으로 다가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한 장을 꺼내어 교탁 위에 놓았다. 반장도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이들이 조용한 술렁거림 속에서 모두 돈을 찾아 들었다.

“오늘 돈이 없는 사람은 내일 가져오는 게 어떻습니까?”

한 아이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제안하자 모두, 그럽시다--소리쳤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모일간지 편집부국장을 지내는 학부형이 우리 반에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반장이 그 학부형을 만나러 갔다. 그 신문사 기자가 학교에도 여러 번 다녀갔다. 며칠 뒤에 신문 미담란에 우리 반 얘기가 크게 다뤄졌다. 박스 기사였다. 기표의 갸륵한 효성에서부터 재수파들의 우정어린 피뽑기와 급우들로부터 시작된 친구돕기 운동이 전교적으로 파급되어 이룩한 성과가 자세하게 났다. 기표의 여동생 얘기도 끼어 있어 그 기사를 읽은 우리들의 콧등이 새삼 찡 했다. 기사 멘 위에 담임선생과 반장, 그리고 기표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교장선생님 지시에 의해 그 기사는 각 교실 후편 게시판에 붙이게 돼 있었다. 그 신문 기사가 나가고부터 월요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사회각계에서 보내오는 성금과 위문편지를 최기표에게 전달했다. 담임선생님도 종례 때면 기표에게 편지 여러 장을 건네며, “거기 여학생 편지도 많이 있으니까 혼자 몰래 보라구” 아이들이 와하하 웃었다. 기표가 얼굴을 벌겋게 달구며 편지 다발을 책상 속에 넣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실로 화기애애한 반이 되었던 것이다. “기표 얘기가 영화로 된다며?” “그렇대. 재수파들을 중심으로 한 얘긴데 TV에 나오는 제3교실 같은 거겠지” 어디서 나온 얘긴지 기표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제 아이들은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호칭하는 아이도 드물었다. 아무나 곁에 가서 말을 걸 수가 있었고 때로는 어깨도 쳤다.

그것은 기표가 아주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도 수줍어하는 그 아이는 그렇게 당당하던 체구마저도 왜소하게 짜부라진 채 우리가 보통 사진을 찍을 적에 <치이즈>하고 웃듯 그런 미소를 얼굴에 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미소짓는 기표의 얼굴을 보면서 일사불란한 항해를 계속했다. 담임은 더욱 깊은 이해로써 우리 반을 돌봐주었다. 반장 형우는 그 나름의 성실과 지혜로 <우리>를 위해 헌신했다. 우리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기표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얘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덩달아 들떠서 술렁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기표의 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다음날도 그는 결석했다. 무단 결석이었다. 담임선생이 한 아이를 기표네집에 보냈다. “집에도 없어. 이틀 전에 집을 나갔대”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찮은 생각들이 머리에 젖어들었다. 기표가 내리 사흘이나 결석을 한 아침나절이었다. 수업중인데 담임이 형우와 나를 찾는 쪽지가 왔다. 우리가 교무실에 내려갔을 때 담임선생은 병색이 완연해 뵈는 어떤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네는 초가을인데도 낡고 두터운 오바를 걸치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기표 친구들이구만, 시상에 이렇게 고마운 친구들이 어디 있겠누. 그런데 이눔에 자슥이……”

그네는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굽실거리며 때 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네는 우리의 손을 더듬어 쥐고 싶어했다.

“자, 이제 고만 돌아가십시오. 애들하고 의논해서 찾아보겠읍니다”

담임선생은 기표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고 나갔다. 그네는 교무실을 나가며 자꾸 아쉬운 듯 우리들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그네를 배웅하고 돌아온 담임이 의자에 소리나게 주저앉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망할 새끼가 끝까지 말썽이란 말이야”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으며 투덜거렸다

“내일 천일영화사 사람들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잖냐? 그런데 이 망할 새끼가……” 그는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들 앞에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한테 보낸 편지였다. 팬지 맨 앞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끝.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 오승희의 동화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에서 옮겨 왔습니다.

오승희 :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동화 공부를 하고, 동화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앞 주차장에 차가 듬성듬성 세워져 있다. 꼬마 아이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이제 가을이 왔나 했더니 벌써 겨울인가 보다. 아이들 옷차림이 두텁다. 아스팔트 위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매섭게 느껴진다.

집으로 올라가 현관 문을 여니 구수하고도 눌은 듯한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다. 할머니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큰 들통에서는 김이 펄펄 난다.

“할머니!”

“어라? 너 어째 이리 일찍 오냐?”

“할머니도, 참. 토요일이잖아요.”

“그렇구먼. 저게 몇 시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남?”

할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고 반찬 그릇을 주섬주섬 내놓았다. 나도 숟가락을 놓으며 물었다.

“할머니, 그런데 지금 뭘 하세요?”

“메주콩 삶는 거여. 얼추 다 된 거 같은디.”

할머니는 들통 뚜껑을 열고 속을 한번 뒤저어 보았다.

“그만 끄내야겄다. 잘 되았어.”

거실 한가운데에 함지 함지 : 네모지게 나무로 짜서 만든 그릇. 밑은 좁고 위가 넓음

가 놓여 있다. 할머니는 거기다가 콩을 들이부었다.

“너 어여 밥 먹어. 난 이것 좀 찧어야 쓰겄다 .”

할머니는 방앗공이 방앗공이 : 곡식을 담아 놓고 찧을 수 있게 움푹 들어가게 판 방아나 절구 속에든 물건을 내리찧는 공이

로 콩을 찧었다.

“절구에 찧어야 하는 건디, 원 옹색혀서 참.”

처벅처벅 찧는 소리가 난다. 밥을 먹다 말고 나는 그쪽으로 가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방아질이 재미있어 보인다.

“할머니, 나도 해볼게요.”

“아서, 니가 뭘 혀.”

“아이, 할머니, 한번 해볼게.”

방앗공이를 붙들고 떼를 쓰자 할머니는 할 수 없이 그걸 넘겨주었다. 할머니는 내가 찧는 것을 바라보며 한동안 앉아 있더니 혼잣말을 했다.

“에미가 장 관리나 제대로 할지 모르겄네. 이번 장이 잘돼야 두고두고 잘 먹을 텐데……”

“할머니, 어디 가세요?”

헐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함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번 방아질할 때는 재미있더니 찧어진 콩이 공이에 처덕처덕 달라붙자 힘이 들었다. 내가 가쁜 숨을 쉬자 할머니는 공이를 빼앗으며 말했다.

“어여 가서 밥이나 먹어. 참, 너 이것 좀 주랴?”

할머니는 공기에다 콩을 조금 덜어 주었다.

“내 어렸을 때, 이거 숱하게 집어먹었구먼. 왜 그렇게 맛있던지 엄니 몰래 야금야금 먹다가 배탈 나서 칙간 뻔질나게 드나들었재.”

나는 콩을 입에 넣었다. 밥에 넣어 먹는 콩과는 다른 맛이었다. 푹 익어 물컹거리는 것이 밤맛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그릇을 밀어 놓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엄마가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했나 보다. 엄마는 방아를 찧고 있는 할머니를 보더니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모른 체하고 계속 방아를 찧는다. 엄마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며 엄마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정말 왜 저러신다니?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말렸는데.”

엄마는 화가 나서인지 옷을 탁 팽개쳤다.

“하여간 꼭 자기 주장대로만 하시려고 한다 말이야. 해야 되겠다고 한 것은 기어코 하시고야 마니……주위 사람들 얘기는 듣지도 않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할머니가 메주를 쑤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말렸던 생각이 났다. 아파트니까 항아리 늘어놓을 데도 없고 냄새도 나니 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나는 엄마 옆에 서 있기가 불편해 내 방으로 건너왔다. 책상머리에 앉아 숙제 공책을 펴 놓지만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불만이 있을 때 가끔 나에게 푸념을 하곤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기만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 속은 뭉근하니 아파 왔다.

지난 추석 때도 그랬다.

추석날, 점심 때쯤 되니 큰고모, 작은고모네 식구들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고모, 사촌들과 어울려 벅적대며 즐겁게 지냈다. 그날 밤은 이 방 저 방, 사람들로 꽉 차서 나는 안방에서 자야 했다.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데 엄마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송편 만드시는 걸 뭐라는 게 아녜요. 적당히 하셔야죠, 적당히.”

아까부터 하던 말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조금만 하자고 하지 그랬어?”

“말씀드리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 큰 함지에 가득 반죽을 해 놓고는…… 만드는 사람이나 많으면 또 몰라. 둘이서 그것만 붙들고 하루 종일…….”

“그래서 친척들이랑 나눠 먹으면 좋은 거지 뭘.”

“뭐예요? 나 같은 사람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집에 와서 좀 쉬면 안 되는 거예요?”

엄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만둡시다. 그만둬.”

아빠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돌아누웠다.

“그거 한 가지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해. 날이면 날마다 온갖 손 많이 가는 일만 잔뜩 벌여 놓으시니…….”

엄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는 누워서 자는 체했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오래도록 깨어 있었다.

거실에서 무엇인지 무거운 것을 쿵쿵 내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밖으로 나가 보니 할머니가 널따란 나무 도마에 콩 덩어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할머니, 뭘 하세요?”

“다 찧어졌응게 인자 메주를 만들어야재.”

콩 덩어리는 도마에 닿는 부분이 판판해졌다. 할머니가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계속 내리치자, 점점 큰 벽돌 모양의 메주꼴이 잡혀 갔다. 할머니는 세 개째 메주를 만들면서 벌써 힘에 부치는지 숨이 가빠졌다. 나는 슬그머니 할머니가 잠시 내려놓은 콩 한 덩어리를 끌어다가 내리쳤다.

“야가 왜 이런디야.”

“할머니, 힘드시죠? 할머닌 잠깐 쉬세요. 제가 할게요.”

“아서, 아서. 괜히 망가뜨리기나 하지.”

“저도 잘할 수 있다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콩 덩어리는 벽돌 모양이 되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한다.

“아이고, 저리 비켜. 니가 뭘 한다고 그랴.”

엄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마지못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할머니처럼 콩 덩어리로 메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메주는 모두 열두 개였다. 할머니는 다 만든 메주를 베란다에 죽 늘어놓았다. 겉이 꾸덕꾸덕 말라야 끈에 묶어 매달 수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좁은 베란다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우리 집 베란다는 이미 항아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왔다. 그때 할머니는 시골에서 쓰던 항아리를 많이 가지고 왔다. 냉장고에 들어갈 만한 작은 것부터 내가 들어가 앉아도 될 만큼 커다란 항아리까지 여러 가지였다. 그땐 베란다에 화초가 많았다. 할머니는 가지고 온 항아리가 베란다에 다 놓아지지 않자 복도에 내놓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경비원 아저씨가 올라왔다. 복도에다 이렇게 뭘 많이 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화초들은 어느덧 하나씩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비상구로 내몰렸다.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장소는 간장 항아리나 고추장, 된장 항아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베란다에 늘어놓은 메주를 보았다.

“하지 마시라니까, 어머니는 참. 슈퍼에서 사다 먹으면 될 걸 가지고.”

할머니는 못마땅한 낯빛으로 아버지를 나무랐다.

“장은 집에서 담가야 제 맛이 나는겨.” “요즘에는 파는 된장도 맛이 괜찮다구요.”

“딴 건 몰라도 이건 안 되야. 그깟 조미료로 범벅한 것이 제대로 된 장이여? 시상이 아무리 바뀌었기로서니. 다신 그런 말 하덜 말어.” 아버지도 더 이상 대꾸를 못했다.

며칠 후, 엄마가 몸이 좀 안 좋다고 일찍 들어온 날이었다. 내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 못 박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어머니. 뭘 하시는 거예요?”

나도 밖으로 나가 보았다. 할머니가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고는 또 하나 못을 박는 것이었다. 창고 문틀 위에 나란히 못이 박혀 있었다.

“메주 매달아 놓을라고 그려.” 엄마는 한숨을 폭 쉬었다.

“어머니, 그런 데다 못을 박으시면 어떡해요?”

“매달아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그러재. 원 메주 하나 매달아 놓을 데도 없는 집구석이 어디 있다냐. 몹쓸 놈의 집구석이여.”

할머니는 못을 또 하나 들어서 박았다. 그것을 본 엄마는 입을 앙다물고 눈을 한 번 꼭 감았다 뜨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메주만 중요하고 집꼴은 아무렇게나 돼도 괜찮단 말씀이세요?”

할머니는 그제서야 돌아서서 엄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여? 집꼴? 그럼 내가 집꼴을 망치고 있단 말여? 못 몇 개 박은 게 집꼴을 망치는 거란 말여?” 할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노여워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무서웠다. 엄마가 이렇게 할머니에게 대드는 것은 처음 보았다. 엄마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메주 만들지 마시라 그랬잖아요.”

“뭣이여? 메주를 만들지 마라? 니가 지금 메주 만드는 거 돕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냐?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만들지 말란 소리만 하면 다여?”

“요즘 아파트에서 그런 거 만드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세요?”

“너는 안 먹고 살래? 아무리 아파트기로서니 사람이 할 일은 하고 살아야재. 그래, 아파트 살면 장을 다 사 먹어야 한단 말이여?”

“아유, 그만두세요. 어머닌 옛날 방식만 고집하시니.”

엄마는 돌아서서 안방 쪽으로 갔다. 할머니는 속이 상한지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불러 보았다.

“……할머니이.” 할머니는 그제서야 내 얼굴을 보더니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시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혀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여. 그렇재, 암.”

그러고는 박아 놓은 못에 메주를 걸었다. 메주는 창고 문 앞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못에 다 걸 수가 없어서 빨래 건조대에도 매달았다.

내 방으로 가다가 안방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엄마가 쪼그려 앉아 두 팔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부르지도 못하고 문을 다시 닫았다.

왜 이래야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도 좋고 할머니도 좋다. 그런데 두 분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고 괴롭다. 어떡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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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
세상 구석구석 따스하고 소소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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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동화작가
1805. 4. 2 덴마크 코펜하겐 근처 오덴세출생 ~1875. 8. 4 코펜하겐.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를 썼으며, 희곡·소설·시·여행기뿐만 아니라 몇 권의 자서전도 남겼다. 이들 여러 작품들은 덴마크 국외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화만은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많이 번역되는 작품에 속한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안데르센은 당시의 엄격한 계급 구조를 타파하고자 힘겹게 투쟁했다. 처음으로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은 코펜하겐 왕립극장의 단장인 요나스 콜린이었는데, 젊은시절 안데르센은 그곳에서 배우로 명성을 얻으려 했으나 결국 허사로 돌아갔다. 콜린은 안데르센에게 등록금을 마련해주었다. 교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학교생활은 그에게 불행한 경험이 되었지만 1828년 코펜하겐대학교에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첫번째 중요한 문학작품 〈1828, 1829년 홀멘 운하에서 아마게르 섬 동쪽 끝까지의 도보여행기 Fodrejse fra Holmens Kanal til Østpynten af Amager i aarene 1828 og 1829〉(1829)를 썼다. 이것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E. T. A. 호프만풍의 환상적인 이야기로서 출간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후 희곡으로 전환하여 2편의 희곡을 썼으나 실패했고, 노예제도의 사악함을 그린 희곡 〈흑백혼혈아 Mulatten〉(1840)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연극은 그의 분야가 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를 주로 소설가로 간주했다. 대부분의 소설은 자전적인데, 그 가운데 〈즉흥시인 Improvisatoren〉(1835)·〈O.T.〉(1836)·〈어느 바이올린 연주자 Kun en spillemand〉(1837)가 가장 유명하다.
안데르센의 첫번째 동화책 〈어린이들을 위한 옛날 이야기 Eventyr, fortalte for b'øn〉(1835)에는 〈부시통 The Tinderbox〉·〈땅딸이 클라우스와 키다리 클라우스 Little Claus and Big Claus〉·〈공주와 완두콩 The Princess and the Pea〉·〈꼬마 이다의 꽃 Little Ida's Flowers〉 등이 실려 있다. 여기에 동화 2편을 더 실어 〈동화집 Eventyr〉(1837)을 냈고, 제2권은 1842년에 완성했다. 이 2권 외에도 〈그림 없는 그림책 Billedbog uden Billeder〉(1840)을 발표했으며, 1843, 1847, 1852년에 각각 새 동화집을 냈다. 이 장르는 〈새로운 동화와 이야기집 Nye eventyr og historier〉(1858~72)이 나옴으로써 더 확장되었다.
이 동화집들은 문체와 내용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야기를 엮어가는 방식에서 진정 혁신적인 작가로서 그는 구어체 관용어와 구문을 사용함으로써 문어체 문학 전통과 결별했다. 〈눈의 여왕 The Snow Queen〉에서처럼 선(善)과 미(美)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낙관적인 믿음을 보여준 이야기들도 있지만 아주 비관적이고 불행한 결말을 그린 작품들도 있다. 그가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커다란 흥미를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어린이들의 단순한 이해력 차원을 넘어서는 느낌과 생각들을 어린이의 관점으로 자연스럽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는 이처럼 자연스레 이야기를 엮어가는 능력과 뛰어난 상상력을 민간 전설의 보편적 요소들과 결합해 수많은 문화권과도 결부되는 동화의 근간을 이룩했다.
그의 이야기들이 이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안데르센이 불행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슬픈 이야기들에는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다. 평생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느꼈고, 사람들이 그를 완전히 받아들인다고 결코 흡족해 하지 않았으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깊은 고통을 느꼈다. 1840~57년 유럽·소아시아·아프리카를 두루 여행하며 느낀 점을 기록하여 수많은 여행기를 내놓았다. 이 가운데 〈시인이 간 중동의 장터 En digters bazar〉(1842)·〈스웨덴 여행기 I Sverrig〉(1851)·〈스페인 여행기 I Spanien〉(1863) 등이 뛰어나다. 안데르센은 한 번 쓴 것을 없애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그의 일기와 수천 통에 달하는 편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1975년 엘리아스 브레드스도르프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그의 생애와 작품 Hans Christian Andersen:The Story of His Life and Work〉을 출판했다.<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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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우화 혹은 아이소피카는 고대 그리스에 살았던 노예이자 이야기꾼이었던 이솝이 지은 우화 모음집을 말한다. 이솝우화는 의인화된 동물들이 등장하는 단편 우화 모음집을 가리키는 총괄적 용어이기도 하다.

이솝우화는 친숙한 동물이 나오고 교훈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어린이 덕성교육을 위한 인기 교재로 그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1484년 윌리엄 캑스턴이 영역판을 최초로 냈고, 1692년 로저 레스토랑지 卿이 그 시대의 영어에 맞도록 고쳤다. 1668년 프랑스에서는 시인이었던 장 드 라 퐁텐는 이솝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우화 시집을 냈다.

현대영어로 된 영역본은 조지 플라이어 타운센드(1814-1900) 목사판이 잘 알려져 있다. 1998년에 올리비아 템플과 로버트 템플이 펴 낸 《The Complete Fables by Aesop》는 완전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장 원전에 충실한 이솝우화집으로 손꼽힌다. 템플에 따르면 초기 영역본들은 당시 역자의 주관에 따라 개작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한국 현대동화의 태동과 흐름>이라는 건국대학교 세미나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 이솝우화는 갑오개혁 바로 다음해인 1895년에 일본인의 도움으로 만든 최초의 신식교과서 <신정심상소학>에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7편의 이솝우화를 "새로운 이약이"라는 표제 아래 소개했다.<출처:위키백과>

[편집] 대표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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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홍은 충남 고향에서 면장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법대를 나와서 판검사가 된다는 조건으로 서울에 유학을 온다. 그는 부친의 친구 집에서 하숙을 한다. 그에게 집에서 매달 하숙비를 보내 오는데 그는 부친의 뜻과 달리 국문과에 적을 두고 문학 공부에 몰두한다. 전쟁 후에 돌아온 규홍은 창애가 돌부처처럼 머물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녀는 간질병이 있는 처녀이다. 그녀의 아비인 박노인은 지방으로 먹과 붓을 팔러 다니다 한달 혹은 두 달에 한번씩 창애를 보러 온다. 이 집에 달수와 준석이 함께 기거하고 있다. 달수는 취직을 하기 위해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절망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영원히 불행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불이라고는 지펴 본 적이 없는 방안에는 준석이가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있다. 취사 도구가 놓여 있는 한쪽 구석에는 석유 풍로와 나란히 창애가 앉아 있다. 준석은 달수에게 어렵게 대학을 다닐 필요 없이 군에 입대하라고 종용한다. 달수는 고학을 해서라도 대학을 다녀서 성공하겠노라고 거의 울상이 되어 항변한다. 규홍은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불란서와 강습을 받고 아홉 시가 훨씬 넘어서 집에 들어온다. 그는 신문과 잡지에 여기저기 투고하지만 그의 시가 어디에도 발표된 적은 없다. 최근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 혈서라는 제목의 시이다. 준석은 규홍이 시를 쓰는 데 불만이며 그가 없는 사이 그의 시를 비판하다가 달수와 논쟁을 한다. 창애는 언제나 밥을 끓이고 설거지를 하는 일 외에는 돌부처처럼 앉아 있기만 한다. 박노인은 가끔 규홍에게 자기의 딸과 결혼할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 온다. 그러면 준석은 달수더러 규홍과 창애의 결혼을 찬성하라고 강요한다. 달수는 그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지만 준석의 주먹다짐에 맥없이 무너진다. 규홍과 창애는 두 사람의 논쟁에 상관하지 않는다. 달수는 취직이 안되자 차차 자신을 이상히 여기고 이제껏 살아남은 일까지도 신기하게 생각한다.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자 규홍의 양쪽 옆에 누운 달수와 준석은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누군가가 창애와 이불을 같이 덮고 자기로 합의하나 누가 가느냐로 고심한다. 준석은 자신이 가겠다고 하며 달수는 규홍이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준석이 창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규홍은 웃기만 한다. 방학이 되어 규홍이 고향으로 내려갈 무렵 박노인의 편지가 다시 온다. 준석은 또 규홍과 창애의 결혼을 주장한다. 달수는 용기를 내서 창애가 임신한 사실을 말한다. 창애의 임신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면서 준석이 격분하자 달수는 눈물을 흘린다. 준석은 달수를 병역 기피자로 몰아 부치면서 혈서를 쓰라고 달수의 손가락을 절단한다. 선혈이 도마와 방바닥을 적시자 달수는 기절을 하고 준석은 지팡이를 짚고 어둠 속2으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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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과 덕재는 죽마고우다. 그들은 같이 꼴도 베러 다니고 어른들 몰래 담배도 나누어 피운다. 성삼은 덕재와 밤을 훔치러 갔다가 나무에 올라갈 차례에 주인인 혹부리 할아버지의 고함소리에 도망을 친 적도 있다. 이때 덕재는 불쑥 자기의 밤을 한줌 꺼내 준다. 그들은 열 두어 살쯤 났을 때 어른들 몰래 올가미를 놓아 학 한 마리를 잡은 일이 있다. 매일같이 그들은 학의 목을 쓰러 안고 등에 올라탄다. 이때 서울에서 학사냥꾼이 온다는 말을 들은 그들은 자기네의 학이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학을 날려보낸다. 시달림을 받은 학은 날지를 못 한다. 다음 순간 옆 풀숲에서 단정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자 자기네 학도2 공중으로 날아올라 멀리 날아가 버린다.

성삼은 해방 전전 해에 자신이 삼팔 이남 천태 부근으로 이사를 간다. 전쟁이 나자 지난 유월 달에 성삼은 피난을 간다. 이때 아버지가 농사꾼이 농사일을 늘어놓고 어디를 가느냐고 하는 바람에 혼자서 피난을 간다. 치안 대원이 되어 고향으로 오는 길에 뒷산 밤나무 기슭에서 성삼은 발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회상한다. 몇 사람 만난 동네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다. 밤나무를 안은 채 잠시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성삼은 임시 치안대 사무소로 쓰는 집 앞에 이른다.

여기에서 그는 포승줄에 꽁꽁 묶인 어릴 적 단짝 덕재를 만난다. 동료 대원이 농민 동맹 부위원장을 지낸 놈을 집에서 잡아왔다고 한다. 청단까지 호송하기로 한 동료 대신 성삼이 자원하여 덕재를 호송한다. 성삼은 줄담배를 피우면서 덕재 자식을 데리고 가면서 다시는 담배를 붙여 물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는 덕재에게 사람을 몇 이나 죽였느냐고 묻는다. 다시 다그치자 덕재가 성삼을 노려보면서 ‘그래 너는 몇 이나 죽였냐’고 되묻는다. 성삼은 막혔던 무엇이 풀려 내리는 것만 같아 가슴 한복판이 환해짐을 느낀다. 농민 동맹 부위원장은 빈농의 자식이어서 맡은 일이며 피난하지 않은 것은 홀아비인 아버지가 집에 병으로 누워 있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새침데기요 키가 작고 똥똥한 꼬맹이와 결혼을 해서 이 가을에 첫 얘를 낳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농사꾼이 다 지어 놓은 농사를 내버려두고 어디를 가느냐는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피난을 포기했다고 밝힌다.

고갯마루를 넘자 이번에는 성삼이 편에서 외면을 하고 걷는다. 고개를 다 내려온 곳에서 성삼은 학을 발견하고 주춤 발걸음을 멈춘다. 삼팔 완충 지대가 되어 사람들이 살지 않은 그동안에도 학들만은 전대로 살고 있다. 성삼이 불쑥 덕재에게 학사냥이나 한번 하자면서 포승줄을 풀어 준다. 덕재는 조금 전의 너는 총살감이라는 말을 생각하고 얼굴에 핏기가 걷힌다. 성삼의 기어가는 쪽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성삼이 학이나 몰아오라고 한다. 그제야 덕재는 무엇을 깨닫고 잡풀 새를 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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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독립이나 민족 자결 그리고 자유를 부르짖다가 수감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느낄 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고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깊은 잠에 취해 있던 나는 기상 소리에 화다닥 놀래어 깨어난다. 그러나 도저히 잠을 이겨내지 못하여 다시 잠에 빠져들며 마침내 우리 방문을 여는 소리가 덜컥하고 들려 올 때에야 벌떡 일어나서 점호를 받는다. 대답을 늦게 한 칠백 칠십 사호 영감은 간수 부장의 채찍을 맞고 눈물을 흘린다. 갑자기 방안의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다섯 평이 못되는 방에 처음에는 스무 사람이 있다가 차츰 차츰 불어나서 현재는 마흔 한 사람이 있으며 뜨거운 태양이 내리 쪼이면 사람들은 기진맥진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냉수 한 그릇뿐이다. 우리는 하룻밤을 삼분하여 교대로 잠을 잔다. 서서 있는 축들도 잠이 들고나도 어느덧 잠이 들었는데 가슴이 답답하여 깨어 보니 매일 밤 겪는 일이지만 내 가슴과 머리는 온통 남의 다리 아래 깔려 있다. 아침은 아직 서늘한 유월 중순이나 달력이 없어서 정확한 날짜를 알 수가 없는 나는 삼월 그믐 이후 보지 못한 바깥 세상을 보고 싶어 안타까운 심정이 된다. 나는 동료와 이야기를 하다가 곁방에서 담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암호를 보내며 곁방에서는 독립이 거의 다 되었다는 암호를 보내 온다. 문 따는 소리가 들리고 공판에 갈 사람을 불러내자 암호는 뚝 끊기며 우리 방에서도 어제 매 맞은 영감이 불려 간다. 나는 언제쯤 그 축에 끼일지 안타까워한다. 점심을 먹고 비린내나는 냉수를 한 대접 마시고 난 나는 밥그릇에 남은 밥알을 긁어서 이기기 시작하며 새까맣게 변한 밥떡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본다. 종기를 핑계삼아 진찰하러 갈 사람들의 축에 끼어 나는 안부조차 알 수 없던 아우를 만난다. 나는 진찰 받으러 가는 동안 춥다고 할 정도로 서늘함과 아우를 만난 일로 기분이 좋아지나 사람으로 득실거리는 감방과 병들을 생각하고 기분이 얹잖아 진다. 아우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간수에게 채찍질을 당한다. 재판소에서 돌아온 영원 영감이 태형 구십 도를 언도받고 공소했다고 하자 나는 공소를 취하하라고 그를 괴롭힌다. 영감이 공소 취하를 결심하자 우리가 간수에게 알리며 간수가 그를 끌어내자 자리가 넓어진다. 우리는 목욕탕에 갔다가 이십 초 동안의 목욕을 마치고 간수를 따라 감방으로 돌아온다. 몇 시간 뒤에 우리는 영원 영감의 태형 집행의 단말마의 부르짖음을 듣고 화다닥 놀란다. 어젯밤 그가 이 방에서 끌려나갈 때 칠십 줄의 늙은이가 태 맞고 살길 바라겠느냐던 말이 떠오르자 그를 내어쫓은 장본인인 나는 머리를 숙이고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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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규는 별명이 말대가리이고 판무식군에 반생을 노름판을 기웃거리면서 개평이나 뜯고 지낸다. 어느 해 출처가 모호한 돈 이 백 냥이 생기자 그날로부터 윤용규는 노름방의 출입을 뚝 끊고 살림군이 되어 재산을 증식해 나간다. 윤두껍이로 불리는 그의 아들 두섭은 취리에 밝아 약관의 나이에 살림을 잘하여 재산을 불려 나간다. 그는 계유년 삼월 보름 화적떼가 들이닥치자 바지도 입지 않은 채로 산허리로 몸을 피한다. 그러나 도망치지 못한 윤용규는 두목에게 붙잡힌다. 두목은 관가에 잡혀 있는 부하를 위해 그에게 뇌물을 써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이에 응하지 않고 육박전을 벌이다 비참하게 죽는다. 화적떼가 떠난 뒤에 집에 돌아온 윤두섭은 참혹하게 죽어 있는 부친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땅을 친다. 화적떼의 습격을 두려워 한 그는 서울로 이주한다. 서울에서도 그는 양복을 입고 권총을 든 청년에게 영수증까지 써 주고 도둑을 맞는다. 그는 부의 축척과 족보에 도금하는 일 그리고 자식을 양반과 결혼시키는 일과 군수와 경찰서장을 배출하는 일 등을 필생의 목표로 설정하면서 산다. 태식은 윤직원 영감이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시골 술에미와 관계를 가져서 본 막내둥이다. 그는 손자인 경손과 늘 싸운다. 열 여섯에 시집을 온 고씨는 31년 동안이나 시집살이를 하나 시어머니가 죽은 뒤에도 안방 차지를 하지 못한다. 그녀의 남편 윤주사는 첩을 둘이나 두고 마작을 즐긴다. 윤직원은 창을 좋아한다. 그는 동기와 함께 명창 대회를 구경하러 갔다가 지금 돌아오는 길이다. 인색한 그는 삯 문제로 인력거꾼과 실랑이를 벌인다. 인력거꾼을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서다가 집안 가솔들에게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 그 말이 상스럽기 짝이 없다. 경손이 돌아오자 할머니 고씨는 시비를 걸다가 시아버지 윤직원 영감과 싸우고 만다. 윤직원은 세계 제일인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어리석고 사회주의는 부랑당 속이라 생각한다. 대복은 양반에게 시집갔다가 과부가 되어 돌아온 윤직원의 딸 서울 아씨를 좋아하나 윤직원에게 혼이 날까 조심을 한다. 윤직원은 말동무를 해주러 오는 동기 춘심을 사랑할 궁리를 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반지를 사주기로 하고 사랑의 다짐을 받는다. 윤주사의 새 기생첩 옥화가 경손의 아버지인 종수의 상경 소식을 전하며 서울 아씨에게 이 원을 얻은 경손은 춘심을 불러내서 영화 구경을 한다. 윤직원이 군수감으로 생각하는 맏손자 종수는 고향에서 군서기를 하지만 매일 술타령이나 계집질이나 하는 방탕한 생활을 한다. 종수는 여학생과 오입하려다가 옥화를 만나 기겁을 한다. 윤주사는 큰 첩집 사랑에서 노름에 정신이 팔렸다가 경찰서장감으로 생각하는 종학의 피검전보를 받는다. 윤직원 영감은 춘심에게 반지를 사주고 흐뭇해져서 집으로 돌아오나 종학의 피검 소식을 듣고 태평천하에 왜 부랑당 같은 사회주의를 하느냐고 울부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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