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잊지 못할 거지 소굴에서의 하룻밤

2010. 9. 9. 07:49세상 사는 이야기

고향하면 떠 오르는 기억들

벌써 고향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만 해도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고향에 가도 예전 그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던 커다란 미루나무도 마을 가운데 있던 공회당도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망루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중 가장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마을 곳곳에 있었던 가마터였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옹기쟁이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숱하게 드나들던 가마터.....옹기를 굽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이 불가에 모여 옥수수며 감자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돼지를 잡는 날에는 그야말로 잔치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큰불을 지피고 나면 가마 곳곳을 진흙으로 발라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는 막힌 구멍 사이로 서리를 한 콩을 구워 먹기도 하고 밤을 구워 먹기도 했습니다.

가마를 개봉하는 날에는 잘 구워진 항아리를 꺼내고 깨지거나 찌그러진 항아리들은 선별해서 깨버리곤 합니다.
가마에서 항아리를 모두 꺼내고 나면 가마 안은 그야말로 사우나실이 따로 없을 정도로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겨울이면 늘 이곳은 동네 거지들의 소굴이 되곤 했습니다.

가마터가 있던 곳을 생각하면 바로 거지들이 떠오를 정도로 세 개의 가마에는 늘 거지들이 득실거렸는데 마을 사람들이 쫓아내려고 해봤지만 혹시 해꼬지할까 모르는 척 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거지들도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마를 구을 때에는 다리밑으로 이사를 가곤 했습니다.

나중 가마굴이 사라지기 전에는 kbs TV 문학관 황순원의 '독 짓는 늙은이'의 촬영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 발로 거지 소굴로 들어간 까닭은?

아마 5학년 때인 열두살 때 였습니다.
그 해 겨울 방학 때 아버지께 심하게 혼나고 집 밖으로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사형제였던 우리 집은 늘 힘든 농사일을 도와야 했는데 가끔 일하기 싫은 날에 친구들과 읍내로 나가 만화방을 찾곤 했습니다.
만화방에서 시원한 어묵과 국물을 마시며 만화를 보다 보면 금새 어두워지곤 했죠.

그렇게 집안 일을 하지않고 무단 이탈한 날 아버지에게 싸리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사정없이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그래도 일을 왜그리 하기 싫고 만화는 왜 그리 재미있었는지 일주일에 세번 읍내를 나간 죄로 결국 아버지에게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부모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집안 일도 도울 줄 모르는 놈은 필요 없으니 나가 이녀석아..."

추운 겨울 무작정 쫓겨나 울타리 옆에서 한참 울고 있어도 집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더군요.
불같은 아버지의 불호령에 어머니나 형도 도움을 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요.
결국 맨발로 오돌오돌 떨면서 찾아간 곳이 집에서 가까운 가마굴이었습니다.

입구에서 한참을 머뭇거리다 추위를 참지 못하고 가마굴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습니다.
가마 속에는 벽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거지들이 앉아있고 가운데는 숯불이 된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습니다.
영화 거지왕 김춘삼에 나오는 것처럼 정해진 서열대로 차례로 앉아 있었는데 가장 자리에는 나와 같은 또래의 아이도 몇 명 있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었더니 맨 위쪽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묻더군요.

"너 집에서 쫓겨 났구나 그렇지?"
"잠시 몸을 녹인 후 집으로 돌아 가거라.."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 보는 듯 했습니다.

"지금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 한테 또 맞아요 아버지가 엄청 화가 많이 나셨거든요"
"아저씨 오늘 하루만 여기 있게 해주세요 녜?"

그러자 마지못해 가마니 하나를 내어주더군요.
사실 그때만해도 동네에 거지들이 워낙 많았고 학교에도 넝마주이들이 종종 들어오곤 했었습니다.
또 정월 대보름이면 거지 옷을 입고 오곡밥을 얻으러 다녔던 기억이 있어 거지가 무섭기 보다는 더럽다는 생각이 더 많았습니다.

온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매서운 겨울 칼바람

이상한 것은 가마굴 끝자리에 앉아 불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스님들이 앉아서 기도를 하는 것처럼 조용해서 나도 그냥 묵언수행(?)을 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떠들면 배가 쉬고프다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하나 둘 바닥에 누워 잠이 드는데 난생 처음 꺼끌꺼끌한 짚을 깔고 잠을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가마니를 덮고 자는 사람, 거적을 덮고 자는 사람, 그리고 누더기를 걸친 채 그냥 자는 사람, 개중에는 피곤한지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고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니 매서운 칼바람이 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집 나가 고생해봐야 안다...

잠을 설친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동냥을 다녀왔는지 바가지에 밥과 반찬이 가득 담겨 있더군요.
항아리 접시에 조금씩 덜어 배급을 해주는데 수저가 없어 손으로 감자가 섞인 보리밥을 먹는데 차가워서 잘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꾸역꾸역 입에 넣고 씹고 있는데 밖에서 누가 부르더군요.
가마굴 밖으로 나가 보니 어머니가 서계셨습니다.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반가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거지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아버지는 네가 가마굴에 갈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단다.."

당시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줄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집 나가 고생해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아버지의 교육 방법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팔순이 넘어 기력이 쇠잔해진 아버지....
추석에 다시 뵐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다급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