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전 교사직 제의를 포기한 이유

2010. 4. 6. 09:40세상 사는 이야기

요즘 자고나면 터지는 교육비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따갑다
학교장·장학사·행정실장 등 51명과 수도권 전·현직 학교장 157명이 학교 운영에 직간접으로 간여하면서 수학여행 등 단체행사 과정에서 '뒷돈'을 받아 챙긴 혐의에 대해 경찰이 본격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 교육의 수장이었던 공정택 전교육감이 서울시교육청 간부들로부터 5900만 원을 상납받고 부정승진을 지시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촉발된 교육비리는수도권에서만 208명 규모로 건국 이래 최대 교육비리가 밝혀진 가운데 전국적으로 확산될 기미가 엿보이고 있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 마다 생각나는 가슴 아픈 기억이 하나있다.
순위고사가 처음 생기면서 교사 임용에 어려움을 겪던 내게 경기도에 있던 사립 00여고에서 교사직 제의가 들어온 것을 거절했던 기억이었다. 아니 거절이 아니라 스스로 포기한 것이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25년전 대학을 졸업할 때 처음 순위고사가 생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바로 전년 동기들은 대부분 교사 발령을 받았는데 가정 형편 때문에 늦게 야간 대학에 입학한 나는 순위고사가 생기면서 교사 임용을 보장 받지 못하게 되었다.
졸업한 연도에 교사로 풀리지 못하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생각이 든 나는 어려운 살림에 대학을 보내준 부모님 낯을 볼 면목이 없어 졸업 후에도 고향에 가지 않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 대학 진학을 포기한 형님이 군제대 후 영농후계자 자금을 지원 받아 한우 사육을 시작했을 때였는데 내 등록금 때문에 귀중한 소 한 마리 판 다음 해 정부에서 복합영농 명목으로 외국산 소 7만두를 도입하면서 소값이 폭락해 결국 한우 사육을 포기한 것은 지금도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170여만원하던 소값이 100만원으로 떨어졌는데 소값 폭락으로 농민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곤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학을 다녀야 했던 나는 늘 마음이 가시방석이었다.
교육학과에 입학한 나는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밤에는 걸어서 학교를 오가곤 했다.
당시 부모님은 교육학과를 졸업하면 당연히 교사로 임용될 것으로 생각하고 계셨는데 대부분의 선배들이 모두 교사 임용을 받아 나 역시도 당연히 교사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순위고사가 생기면서 동기생중 두 명만이 교사 임용을 받고 나와 나머지 동기생들은 임용되지 못해 결국 사립고교를 들어가거나 다른 직장을 찾아야 했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계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형님을 통해 내가 처한 상황을 알고는 나를 부르셨다.
"형한테 들어보니 교사가 되는 것이 쉽지 않게 되었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예,,,죄송합니다. 올해는 나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교사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거냐?"
"예...사립고등학교 교사로는 갈 수 있다는데 무척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내 동창중에 사립고등학교에서 교감을 하는 친구가 있는데 부탁을 해봐야겠다.."
아버지와 만난 후 일주일 후에 아버지로 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생겼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얼마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쉬쉬했지만 형님을 통해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기부금 천만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형편이 넉넉했다면 별 고민없이 교사직 제의를 받아 들였을지도 모르지만 3년 터울의 아들 사형제 교육시키느라 등골이 휜 부모님께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얹어 드릴 수는 없었다.
결국 교사가 되어 갚으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혼자 직장을 구하겠다며 고향을 떠났고 그후 학습지 교사 학원 강사를 거쳐 오랜동안 학원을 운영하다 10년전 모두 접었다.
지금도 고향에 들리면 팔순 아버지가 가끔 묻곤 하신다.
"그때 교사가 되었으면 고생을 덜했을텐데....안 그러냐?"
아마도 아버지 마음 속에는 그때 그돈을 마련해주지 못해 아들이 더 고생을 했다는 생각을 두고두고 하신듯하다.
나는 평생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 밖에 없는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