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야수교 기상나팔 소리를 기다리던 이유

2009. 8. 8. 11:59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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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음 뷰에 군대 이야기로 한창 주목을 받고 있는 악랄가츠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외 펜펜님이나 털보아찌님도 재미있는 추억의 군대이야기를 속속 꺼내놓고 계시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고향생각이 나곤 한다.
내 고향은 군부대와 군인들이 많은 홍천이었는데 사방이 부대로 둘러쌓여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대가 많았다. 지금은 주변에 부대가 있으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경제논리에 길들여져 있지만 그때는 부대가 있다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당시 세뇌를 당하듯 반공교육이 엄했던 시절이라 부대가 많아 간첩이 침투할 일이 없으니 다행스럽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중 집에서 5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야수교가 있었는데 오늘은 야수교에 얽힌 추억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야수교는 야전수송교육단을 줄여서 하는 말로 군인들이 운전교육을 받는 곳이다. 이곳에서 운전을 배운 군인들이 가 부대로 배치되어 군 수송을 책임지게 되는데 근래에 HOT 멤버였던 문희준이 이곳 야수교에서 운행교육을 받기도 했다.
국민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도로가 비포장 도로라서 늘 아침 운전차량 수십대가 집앞을 지날 때면 흙먼지를 뒤짚어 쓰기 일쑤였는데 다행히 국민학교 입학 후 얼마되지 않아 포장이 되었다.
학교에 갈 때 마다 만나는 운전차량에는 운전병과 그 옆 조교가 타고 있고 차 뒤에는 빨간 깃발로 수신호를 하는 사병이 타고 있었는데 가다가 운전을 잘못해서 조교에게 삽자루와 괭이자루로 구타를 당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다.
또 간혹 수신호를 하던 사병이 던져주던 건빵 한 봉지에 감격했던 기억도 있고 또 건빵을 주지 않는다고 팔뚝질을 해대며 '군바라...군바라...'하고 놀리기도 했었다. 군바리는 군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었는데 그때는 남이 그렇게 부르니 그냥 따라 부르곤 했었다.
한번은 발길질을 하던 친구의 검정고무신이 날아가 차 뒤 트렁크에 실렸는데 그 고무신을 찾으려고 학교가 끝난 후 운전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량을 향해 고무신 한짝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찾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야기 속의 야수교는 현재 공터로 남아있는데 이곳에서 이번에 동홍천 양양간 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기상 나팔소리를 기다리는 아이들 왜?

야수교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아침 기상나팔 소리다. 부대에서  워낙 가깝다 보니 부대안에서 하는 일들도 자연스럽게 알곤 했고 특히 점심무렵 틀어주는 확성기에서는 군가가 흘러나와 나도 모르게 가사와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또 간혹 위문열차 공연이 오면 마을 사람들도 쇼를 볼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통로였었다.
당시 동네 아이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형들이나 동생들 모두 새벽이면 부대 근처에 모여 숨죽이고 기상 나팔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당시부대 담벼락의 두면이 냇가와 닿아있었는데 부대내에 쓰레기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큰 웅덩이를 파놓고 그곳에서 소각하곤 했다.
그리고 기상 나팔소리가 들리고 부대 담벼락이 열리며 쓰레기를 가득 든 군인들이 쏟아져 나오면 쏜쌀같이 달려가 쓰레기를 덮치곤 했다.
군대 내에 있는 PX에서 나온 병들이 쓰레기와 함께 쏟아지곤 했는데 아이들이 한결같이 노리던 것은 바로 빈병이었다.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 많았고 용돈이라는 것은 명절 때 세배를 다녀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던 때라 따로 용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부대에서 나오는 빈병이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얼마나 경쟁이 심했던지 종이 속에 숨겨진 빈병을 서로 잡고 실랑이를 벌이면 주변에 있던 초병이 총을 겨누며
"이놈들, 꼼짝마......움직이면 쏜다....."
하며 겁을 주곤 했다. 그러면 그중 겁이 많은 아이가 먼저 손을 놓고 물러서곤 했다.
군인들도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아이들이 귀찮을 만도 한데 고향에 있는 동생처럼 생각하는지 달려드는 아이들을 내치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추억의 군것질

이렇게 모은 병들은 고물상을 하는 친구네 집을 갖고 가는데 병에 따라서 1원에서 5원가량을 받곤했다.
친구는 맘에 안드는 사람은 자꾸 가격을 깍으려고 했고 맘에 드는 친구들은 제값을 쳐주곤 했는데 그때 둘러대던 말들이 이것은 구가다요 저것은 신가다였다.
병의 밑둥지를 보거나 주둥이를 보면서 이야기 하는데 들어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다른 형들은 사격장에 몰래 들어가 탄피를 캐오기도 했고 몰래 부대로 들어가 차량 부품을 훔치기도 했지만 그런 일들은 너무나 위험했고 실제로 커다란 탄피를 돌로 두드리다 전신화상을 입거나 고물을 훔치다 잡혀 곤장을 맞거나 초소에서 훔친 물건을 들고 벌을 서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모아서 생긴 돈들은 대부분 군것질을 하는데 사용되었다. 당시 만화방에서 먹던 어묵이나 동네 상점에서 사먹던 눈깔사탕과 쫀듸기 그리고 뽀빠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흰색으로 두둘두둘하게 둘러쌓인 과자안에 땅콩이 들어있던 것은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군것질 꺼리였다.
지금은 추억의 장소였던 야수교가 인근의 다른 곳으로 이전을 빈터만 남아있는데 고향에 들릴 때 마다 그곳을 둘러보곤 한다.
당시 부대 앞에는 면회오는 사람들을 위한 여인숙들이 즐비했는데 지금도 집은 그대로 있거나 음식점으로 변했다.
고향에 들리면 그때 야수교 앞 여인숙이었던 간판도 없는 막국수 집에서 시원한 막국수를 먹으며 옛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글을 읽는 분중에 이곳 홍천읍 결운리에 있던 야수교에서 근무했던 분이 계신다면 그때의 추억 한 토막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추억 속에 남아있는 야수교........대학에 다닐 무렵 고향에 갔을 때 부대에서 신나게 흘러나오던 나미의 노래'빙글빙글'이 야수교의 추억 맨끝자리에 아직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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