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35년 이발사 지금이 가장 힘들어

2008. 9. 24. 16:59세상 사는 이야기

저녁무렵 단골 이발소에서 머리를 깍고 왔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머리가 더부룩해서 거추장스럽고 바람이 불면 산발이 되는 통에 머리를 길게 기를 수가 없었는데 추석 전후로 바쁜일이 생겨서 늦어졌다.
예전에는 미용실을 하는 처제가 가까운 곳에 살아 머리 깍을 고민을 하지 않고 살았는데 처제가 이사를 가고 난 후에는 머리 깍을 때마다 고민이 많았다.특히 머리는 한번 그곳에서 자르고 나면 다른 곳으로 옮기기 쉽지 않기 때문에 내 스타일 대로 해주는 곳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예전에는 목욕탕에 있는 이발소건 미용실이건 가리지 않고 깍았는데 한해 한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무 곳에서나 깍기 싫어졌다.그래서 다니는 곳이 요즘 내가 다니는 이발소인데 경력 35년된 사장님은 이곳에서 자라 이곳에서 평생 이발사를 하셨다고 한다.그런데 갈 때 마다 손님이 없어 깍는 내가 다 미안할 때가 많다.나이가 60대 중반인 사장님은 지금 이곳으로 온지는 9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곳은 변두리지만 예전 IMF 이전에는 시내에서 호황을 누릴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30평되는 넓은 곳에 안마와 마사지를 해주는 아가씨들도 있었고 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 당시 시설을 얼마나 잘 갖추었느냐에 따라 시에서 3등급으로 분류를 해주고 가격도 ABC 등급에 따라 많게는 5천원에서 만원까지 차이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당시 A급 이발소가 5만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런 곳에 가본 경험이 없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서울에서는 퇴폐이발소가 유행처럼 번졌지만 이곳은 퇴폐이발소처럼 운영하지 않아도 손님들이 꾸준했다고 한다.
물론 이곳에서도 음성적으로 퇴폐이발소를 운영하다 적발되는 사람도 있었고 또 문을 닫고 다시 다른 곳에서 차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곳이 고향인데 불법적인 방법이나 퇴폐이발소를 운영한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천직인 이발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그런데 어느 해인가 부터 동해안에 고기들이 잡히지 않으면서 경기가 위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동해안 명물인 명태가 씨가 마르면서 지역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고 한다. 
그것은 이발소 뿐만 아니라 전체 상경기를 위축시켰고 업종마다 폐업하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한다.
워낙 탄탄하게 단골 손님을 확보하고 있던 사장님은 그 속에서도 굳세게 이발소를 운영했는데 1997년 12월에 터진 IMF로 손님이 급격히 줄어 더 이상 시내에서 운영할 여력이 없어 변두리로 이발소를 옮겼다고 한다. 비싼 임대료와 아가씨를 두고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할 수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단골들이 알고 찾아와서 그런대로 영업이 잘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미용실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더니 남자들 까지 미용실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발소 손님은 나이든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몇해전 부터 가격이 자율화되어 가격도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사장님.....이발가격이 이발소 마다 8천원 받는 곳도 잇고 15000원 받는 곳도 있어 무려 배 이상 차이가 나는 곳도 있다고 한다.(물론 서비스를 어떻게 해주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했다) 사장님은 그 중간인 12000원을 받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조립식 건물인데 12평정도에 손님이 이발할 수 있는 의자가 3개 있지만 나머지 두 개는 그리 큰 쓸모가 없다고 한다.
하루에 손님이 많아야 10명 어떤 때는 한 명도 없을 때가 있다고 한다.
요즘은 특히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기름값이 폭등하는등 서민경제의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오는 사람들 마다 모두 살기가 점점 어렵다고 푸념하는 사람 뿐이라고 한다.
배운 것이 남 머리 깍아주는 이발사고 평생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으니 움직일 수 있을 때 까지는 이발소를 해야하지 않겠냐는 사장님.......
이야기를 나눌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손님인 나나 주인인 이발사 모두 매한가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