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4. 22. 13:22ㆍ연예가 이야기
1960년대 후반 내가 살던 마을에는 TV가 한 집 밖에 없었다.초가지붕이 걷히고 스레트지붕으로 개량하며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기껏해야 라디오가 문명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이었을 때 TV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기함 그 자체였다.그 당시 라디오에서 최고의 인기는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이었는데 TV가 출현하면서 부터 사람들의 관심도 드라마로 쏠리게 되었다.
당시 TV가 있던 집은 동네에서 제일 큰 고물상을 하는 친구네 집이었는데 드라마 아씨와 여로가 시작될 쯤이면 TV를 시청하려는 동네 사람들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사람을 웃기는 것에 관심이 많은 나는 쇼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때 당시에 비실비실 배삼룡 막둥이 구봉서 후라이보이 곽규석 ,뿌빠라빠빠 뿌빠빠 서영춘, 땅달이 이기동 ,뚱녀 백금녀가 TV에 나오는 시간이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친구를 꼬드겨 보곤했었다.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후라이보이 곽규석이었는데 그의 시원한 목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원맨쇼를 특히 좋아했다.특히 1960년대 중반 동양방송(TBC)의 가요, 춤, 코미디를 결합한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쇼쇼쇼'는 정말 촌구석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오락거리가 흔치않았던 흑백TV시절 서민들에게 웃음을 주고 즐거움을 주던 말 그대로 안방극장이었는데 진행자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은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프로그램의 인기몰이에 견인차 역할을 했었다.당시 그의 인기는 요즘 유재석, 강호동은 비교할 바가 못되었다. 그의 별명인 후라이보이는 프라이(fry: 튀김요리)보다는 '거짓말하다'의 비속어로 '후라이 까다'를 차용한 것이라 생각된다.'후라이 까다"라는 비속어 속에는 약간의 과장과 거짓으로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겠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된다.''쇼쇼쇼''는 ''쇼쇼쇼'' 주제가가 나오면서 무용단의 캉캉춤이 시작되고 멀리서 뛰어나오는 후라이보이가 카메라 앞에 와서 멈춰 서면서 골프스윙을 맨손으로 한 번하면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오프닝을 시작하고 가수 김상희 최희준 패티김 윤복희의 노래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꽁트에는 후라이보이 곽규석에 장고웅, 양영일, 세 사람이 꽁트를 하곤했다. 주로 세태풍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가끔 특집일 땐 후라이보이 혼자 마임을 보여주기도 했다.그의 입담에 어른들도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신다고 했었다.
그는 특히 성대모사에 달인 원맨쇼의 일인자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록 인기가 대단했고 '막둥이' 구봉서와 콤비를 이루며 1970년대 텔레비전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명콤비 구봉서와 라면 회사 광고에 함께 출연해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1957년 〈후라이 보이 아워〉·〈다이얼 Y를 돌려라>〈군 위문 열차〉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영화 〈후라이 보이 박사 소동〉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능숙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춘 명 사회자로 더 유명했다.
1964년부터 동양방송(TBC)의 〈쇼쇼쇼〉를 11년 간 진행한 것을 비롯해 〈KBS배 전국노래자랑〉, 문화방송(MBC)의 〈청춘 만세〉·〈토요일 밤에〉 등 많은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명성을 떨쳤다.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해(?) 외국의 유명연예인이 오면 국적불문하고 사회를 도맡아 했고 총소리, 대포소리, 기차소리 못내는 소리가 없었던 원맨쇼의 개척자! 그런 그가 한우물을 파지 않고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면서 삶에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구 이야기를 듣고 결정했는지 모르지만 1970년대 초 갑자기 종합광고대행사를 차렸다가 운영이 안돼 부도나고 졸지에 채무자가 된 후라이보이는 일본으로 도피하게 되면서 그때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어려서 부터 성가대를 다녔던 후라이보이는 이때 종교에 귀의할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돌아온 그가 훌쩍 미국으로 떠난 뒤 목사가 되었다는 풍문이 전해졌지만 1981년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공연을 통해 우리 곁으로 돌아왔을 때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밝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었다. 그때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헤롯왕을 현재 문화부장관인 유인촌이 빌라도를 가수 윤복희가 막달라 마리아를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 교회에 성가대를 하면서도 장로님들이 대표기도를 할 때 "하나님 아버지, 저희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성가대석에 앉아서 마음 속으로'아니, 저, 저, 저 노인네가. 내가 왜 죄인인가? 자기가 죄를 지었으면 '이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할 것이지 왜 죄없는 나까지 도매금으로 죄인이라고 하는가?'라고 몹시 기분나빠 했다는 후라이보이........ 한때 최고의 코미디언에서 도망자로 그리고 목사로 인생의 기막힌 반전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지금도 유년을 생각할 때면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잠시나마 잊게해준 인생 최고의 청량제였던 그의 몸짓과 입담이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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