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현인 표절의혹으로 고소당한 적 있다
2008. 4. 19. 06:14ㆍ연예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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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4월 13일 작고한 가수 현인(83·본명 현동주)이 표절로 고소당한 사실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달밤''굳세어라 금순아'등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가수 현인은 1957년 작곡가 김광수씨에 의해 절도 및 작곡권 침해로 고소당하였는데 이주식 검사에 의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1957년 조선일보 4월10일 기사에 "낙엽이 나부끼는 쓸쓸한 가을 밤에"로 시작되는 낙엽이라는가곡은 원래 김광수씨가 작곡한 "가을밤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당하게 절취하여 현인이라는 이름으로 오아시스 레코드 회사에 매곡하였다고 한다.그 후 수차례 취소할 것을 권고했음에도 아무런 반성이 없어 고소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후 이표절 시비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 수가 없다.김광수씨가 취하를 한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 합의를 본 것인지 ..........
아마도 당시 표절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이나 전문가가 없어 결국 흐지부지 되었을 공산이 크다.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음대 교수를 꿈꿨으나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려 대중가수로 나섰던 가수 현인 그는 한국 가요 1세대로 떠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내세워 '신라의 달밤'‘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히트시켰다. 훤칠한 키와 외모, 그리고 호방한 성품으로도 인기 높던 그는 1·4 후퇴 실향의 애환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 9·28 수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을 비롯, ‘고향만리’ ‘비내리는 고모령’ ‘인도의 향불’‘불국사의 밤’ 등 숱한 히트곡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가수 현인과 그의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현인는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에서 무대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에 돌아와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최고 히트곡으로 꼽히는 이 노래에서 그는 구성진 우리 가락 위에 경쾌한 이국적 색채가 가미된 창법으로 해방으로 들떠 있던 당시 대중정서를 자극했다. 삽시간에 치솟은 인기로 어디를 가나 꽃다발로 뒤덮인 무대 위에서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
이 곡은 한편으로 해방 후 본격적인 레코드사로 박시춘과 유호가 중심이 된 '럭키레코드사'의 첫 대규모 히트곡이었으며 이어서 1948년에도 같은 레코드사에서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럭키 서울' 등을 내리 히트시켰다.
해방의 환희를 반영한 '럭키 서울'은 아주 활기에 찬 노래였으며 해방 후 처음으로 가요에 영어 단어가 등장한 곡이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 앞에서 1.4 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린 금순이를 찾아 헤매며 부르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는 1953년 발표되어 당시 38선을 넘어온 수많은 피난민들의 애환을 실감 있게 그려내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이 노래는 취입할 당시 한쪽 벽이 무너진 스튜디오에서 가마니로 방음장치을 한뒤 녹음했고 물자가 없어 고물레코드를 녹여 주문물량을 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곡 역시 박시춘이 만들었다. 피난 시절 흥행성적이 좋았던 쇼 무대 중에서 김화랑이 주관한 악극단 '호화선'도 이 곡을 테마로 악극을 상연해 당시 부산극장은 연일 만원사례였다고 한다.
그의 안경, 콧수염 그리고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 무렵 누구에서도 볼 수 없는 로맨티시즘을 규정했다. 독특한 진동음은 강렬한 인상을 남겨 세인들은 가수 흉내만 냈다하면 그를 소재로 올리곤 했다. 그 소리가 주는 이국(異國)성은 멕시코 민요를 개작한 '베사메 무초'로 한층 배가되었다. 이 노래와 함께 라틴 음악도 물밀 듯 국내에 들어왔다.
1990년대 말에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했던 현인은 1천여 곡을 노래한 업적을 평가받아 KBS가요대상 공로상(1990),제30회 가수의 날 특별공로대상(1996),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대상(문화훈장,1999)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2년 4월 당뇨합병증을 얻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후 해마다 여름이면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서 현인가요제가 열리고 곳곳마다 노래 제막비를 세우는등
현인 추모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번의 결혼과 수없이 많은 인기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희망을 노래한 대중예술가 현인! 비록 그는 떠났지만 샹송과 탱고등 외국곡을 처음 알리고 또 대중가수로서 큰 족적을 남긴 그의 발자취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을 것이다
'신라의 달밤''굳세어라 금순아'등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가수 현인은 1957년 작곡가 김광수씨에 의해 절도 및 작곡권 침해로 고소당하였는데 이주식 검사에 의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1957년 조선일보 4월10일 기사에 "낙엽이 나부끼는 쓸쓸한 가을 밤에"로 시작되는 낙엽이라는가곡은 원래 김광수씨가 작곡한 "가을밤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당하게 절취하여 현인이라는 이름으로 오아시스 레코드 회사에 매곡하였다고 한다.그 후 수차례 취소할 것을 권고했음에도 아무런 반성이 없어 고소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후 이표절 시비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 수가 없다.김광수씨가 취하를 한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서로 합의를 본 것인지 ..........
아마도 당시 표절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이나 전문가가 없어 결국 흐지부지 되었을 공산이 크다.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음대 교수를 꿈꿨으나 현대사의 격랑에 휩쓸려 대중가수로 나섰던 가수 현인 그는 한국 가요 1세대로 떠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내세워 '신라의 달밤'‘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히트시켰다. 훤칠한 키와 외모, 그리고 호방한 성품으로도 인기 높던 그는 1·4 후퇴 실향의 애환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 9·28 수복의 기쁨을 노래한 ‘럭키 서울’을 비롯, ‘고향만리’ ‘비내리는 고모령’ ‘인도의 향불’‘불국사의 밤’ 등 숱한 히트곡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가수 현인과 그의 노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현인는 일본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천진에서 무대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에 돌아와 1947년 '신라의 달밤'을 발표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해방 후 최고 히트곡으로 꼽히는 이 노래에서 그는 구성진 우리 가락 위에 경쾌한 이국적 색채가 가미된 창법으로 해방으로 들떠 있던 당시 대중정서를 자극했다. 삽시간에 치솟은 인기로 어디를 가나 꽃다발로 뒤덮인 무대 위에서 '신라의 달밤'을 불렀다.
이 곡은 한편으로 해방 후 본격적인 레코드사로 박시춘과 유호가 중심이 된 '럭키레코드사'의 첫 대규모 히트곡이었으며 이어서 1948년에도 같은 레코드사에서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만리' '럭키 서울' 등을 내리 히트시켰다.
해방의 환희를 반영한 '럭키 서울'은 아주 활기에 찬 노래였으며 해방 후 처음으로 가요에 영어 단어가 등장한 곡이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 앞에서 1.4 후퇴 때 흥남 부두에서 잃어버린 금순이를 찾아 헤매며 부르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는 1953년 발표되어 당시 38선을 넘어온 수많은 피난민들의 애환을 실감 있게 그려내 공전의 인기를 끌었다.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이 노래는 취입할 당시 한쪽 벽이 무너진 스튜디오에서 가마니로 방음장치을 한뒤 녹음했고 물자가 없어 고물레코드를 녹여 주문물량을 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곡 역시 박시춘이 만들었다. 피난 시절 흥행성적이 좋았던 쇼 무대 중에서 김화랑이 주관한 악극단 '호화선'도 이 곡을 테마로 악극을 상연해 당시 부산극장은 연일 만원사례였다고 한다.
그의 안경, 콧수염 그리고 특유의 떨리는 목소리는 그 무렵 누구에서도 볼 수 없는 로맨티시즘을 규정했다. 독특한 진동음은 강렬한 인상을 남겨 세인들은 가수 흉내만 냈다하면 그를 소재로 올리곤 했다. 그 소리가 주는 이국(異國)성은 멕시코 민요를 개작한 '베사메 무초'로 한층 배가되었다. 이 노래와 함께 라틴 음악도 물밀 듯 국내에 들어왔다.
1990년대 말에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했던 현인은 1천여 곡을 노래한 업적을 평가받아 KBS가요대상 공로상(1990),제30회 가수의 날 특별공로대상(1996),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대상(문화훈장,1999) 등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2년 4월 당뇨합병증을 얻어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그후 해마다 여름이면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서 현인가요제가 열리고 곳곳마다 노래 제막비를 세우는등
현인 추모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세번의 결혼과 수없이 많은 인기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우울한 시대에 서민의 희망을 노래한 대중예술가 현인! 비록 그는 떠났지만 샹송과 탱고등 외국곡을 처음 알리고 또 대중가수로서 큰 족적을 남긴 그의 발자취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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