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면이 낙서장으로 변한 동해신묘

2008. 8. 27. 22:37사진 속 세상풍경

양양 낙산사에서 낙산대교로 가다 낙산 프레야 우측 조산리에는 동해신묘라는 사당이 있다.
울창한 송림사이로 보이는 동해신묘는 강원도 기념물 73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으로  동해신묘는 고려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이 동해의 용왕신에게 태평성대와 풍농풍어를 기원하던 사당으로 기록에 의하면 동해신묘 제례는 나라의 중요한 제례로 임금님이 제례에 필요한 향과 축을 보냈다고 한다. 건물 뒤편에는 강원도 관찰 강원도 관찰사 남공철이 쓴 동해신묘중수기사비가 남아있으며, 현재에도 각종 행사 시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제례를 지내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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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것이 동해신묘 사당이다. 사당 안에는 추차장이 없는데 차량을 통제하지 않고  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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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는 동해에 있는 용왕신을 모신 사당을 일걷는 말로 고려 공민왕 19년 (1370) 강릉 안인포에 설치되었다가 성종 2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조선초기의 중사(국가적 제사를 대중소로 나누었는데 그중 중간 크기의 제사)로 제정되었다고 한다.이후 1800년대 강원도 관찰사였던 남공철이 중수했으며 봄과 가을에 모시는 제사는 190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사주를 받은 양양군수 최종락이 동해묘의 신위를 신묘 뒤편에 묻어버리고 동해묘를 완전히 철폐해버려, 남공철이 중수 때 새겨 놓은 동해신묘중수비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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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작가
허균이 1605년에 쓴 「중수 동해용왕비문」에 의하면 경위가 밝혀져 있는데 즉 “강릉부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후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내게 글을 청하므로 나는, 우리나라 사해 용왕을 위해 사당을 세우되 지리의 중앙이 되는 곳을 가려 설치하였는데 강릉은 동해의 한 가운데이고, 정동(正東)이며 더욱이 고을 한 가운데가 상개(爽塏)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정동이라 이름 불렀으며,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지냈다.”고 한다.현재 허균이 쓴 중수동해용왕비문」은 글만 남고 비석은 없어졌고 남공철(南公轍)에 의한 「동해신묘중수기사급명(東海神廟重修記事及銘)」(1800년)만이 양양 동해신묘에 있다.<출처:장정룡,『강원도민속연구(江原道民俗硏究)』(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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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잘렸는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비석의 가운데 부분이 두동강 났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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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다시 기록해놓은 허균이 쓴 <중수동해 용왕신묘>가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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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 앞에는 숭숭 구멍이 뚫려있었다 마치 신혼 첫날밤 신랑신부를 들여다보려고 창호지를 뚫러 놓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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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안을 들여다보고 싶지만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호기심에 누군가 뚫어 놓은 창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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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린 창호문으로 용왕탱화가 보였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정초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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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 비석으로 돌아가는 길 오른쪽 벽면에는 본래 노란색 색칠이 되어있던 곳이 하얗게 바랬다. 그런데 그곳에는 온갖 낙서들이 어지럽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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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이 파이도록 깊게 새겨진 낙서들...사람이 잘 볼 수 없는 곳에만 낙서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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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도 알 수 없는 비속어가 보기 흉하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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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교실의 칠판에 낙서를 해놓은 듯 한쪽 벽면 전체가 낙서로 도배되어 있다. 꼭 이렇게 흔적을 남겨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지방 유물에 대한 보존이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누누히 지적하고 밝혀도 제대로 시정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전담부서와 전문요원의 부족과 문화재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산부족 때문에 보수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고 한다.
문화재에 대해 좀더 세심한 배려와 관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