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만보기에 숨어있는 사연

2008. 12. 29. 20:39세상 사는 이야기

며칠 전이다.급히 인감도장을 쓸 일이 생겼는데 서랍을 뒤적여도 보이지 않았다. 서랍이라는 서랍은 모두 뒤적이다 독일형 책상의 문 안쪽에 있는 작은 서랍에서 인감도장을 찾았다. 그런데 그 속에 뜻하지 않은 물건을 발견했다. 아주 작은 만보기였는데 이 만보기에는 아주 뜻깊은 사연이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여행중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난생처음 인터뷰라는 것을 하셨고 감사의 선물로 만보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7년전의 일이었다. 해마다 농사일이 끝난 겨울방학 때면 늘 어머니는 내게 오셨다. 여행을 좋아하시지만 농사일 때문에 오시지 못하다 여행삼아 내게 오시곤 했는데 틈나는 대로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을 다녔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아들의 차를 타고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와 김세레나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어머니가 흥얼거리는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백미러로 보이는 어머니는 가사를 모두 알고 계신 듯했다.
7년전 그해 겨울에도 어머니와 함께 양양의 낙산사를 둘러보고 다음날은 가족과 함께 통일 전망대를 갖다 오는 길에 화진포에 들렀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과 이기붕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화진포의 성으로 이름이 바뀐 김일성 별장을 보게 되었다.이곳은 김일성이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를 찾았던 곳이라고 한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있는데 당시에는 통일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안에는 볼것이 많지 않아 20분정도 걸렸는데 관절염 때문에 오래 걷지 못하는 어머니를 부축해 김일성 별장 안을 돌아보고 나올 때였다. 갑자기 카메라가 우리 가족과 어머니의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놀라서 흠칫거리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어머니께 인터뷰 요청을 하였다.
"이곳에서 촬영중인 사람들은 일본의 NHK 방송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지금 다큐멘터리를 제작중입니다."
"이곳에 오신 분들 중에 나이가 드신 분들의 인터뷰를 촬영하려 하는데 도와주세요"
순간 어머니는 잔뜩 긴장하시면서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자
"어머니, 그냥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셨는지 그리고 이곳을 보고나니 어떤지만 짧게 말씀해주시면 되요..."
그러자 함께 갔던 두 아들 녀석이 인터뷰를 하라고 할머니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마지못해 인터뷰에 응하게된 어머니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고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밀자 한 마디도 하지 못하셨다.
몇 번을 시도하다 안돼 옆에 있던 내가 어머니께 조언을 해드렸다.
'아들네 집에 왔다 이곳에 와보니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것이 참 좋네요...이곳에 이승만과 김일성 별장이 한곳에 있다는 것도 참 신기하네요.." 몇 번 연습을 하고 다시 촬영을 하려고 카메라를 켜면 석고상처럼 떡 굳는 어머니....주변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 다른 대안이 없던 스태프들은 결국 종이를 써서 읽게 했고 몇번의 시도 끝에 어머니는 인터뷰를 마칠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별장을 내려가려고 하자 한 사람이 작은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당시에 받았던 만보기.......NHK 방송국에서 선물용으로 제작한 듯 NHK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며 내민 선물을 열어보니 정말 앙증맞은 만보기 였다.
선물의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셨던 어머니는 만보기에 대해 설명을 듣고는 선뜻 작은 아들에게 만보기를 건네셨다.
"OO아, 앞으로 이것으로 운동을 열심히 하렴....살을 빼야 할머니가 맛있는 음식도 많이 해주지....알았지?.."
작은 아들이 입이 귀에 걸렸다. 만보기를 흔들어도 보고 주머니에 넣고 뛰어도 보고 정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인터뷰에 응한 것보다 선물로 받은 만보기 때문에 집에 와서도 한바탕 웃음 소나기가 쏟아졌다.
고무줄 머리띠에 만보기를 매달고 헤드뱅잉을 하기도 하고 허리춤에 차서 1분에 누가 더 많이 뛰는지 시합도 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작은 아들은 늘 만보기와 함께 살았는데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살도 많이 빠졌다.
몇년 후 아들이 "아빠도 이제 살좀 빼셔야겠어요"하며 건네준 만보기.......한동안 허리 띠에 차고 다니다  건전지가 다되어 서랍에 넣어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던 만보기를 다시 보자 어머니 생각이 났다.
1년전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면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집에 오셔서 여행도 하고 맛난 음식을 드시며 잠시나마 행복하셨을 텐데....만보기를 보니 괜시리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