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

2008. 5. 15. 09:46세상 사는 이야기

누구나 학교 다니던 시절에 생각나는 선생님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눈물나게 때로는 즐거운 기억으로 또는 악몽같은 기억 등등 각각의 기억 언저리에 남아있는 선생님.....
나는 나쁜 기억보다는 늘 가슴 저미는 선생님 한 분이 있다.
어릴 적 기억이 아니라 대학을 다닐 때 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는 틈틈히 공부를 하다가 친구가 이야기 해준 야간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낮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 늘 즐거웠다.그때가 1982년도 였는데 늘 4km 되는 곳을 걸어다니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교수님 한 분이 내게 자전거를 한 대 선물 하셨다.새 자전거가 아닌 중고 자전거였지만 눈물나게 고마운 선물이었다. 그 교수님은 교양과목 철학을 가르치시는 분이었는데 누군가 내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한 시간 남짓 걸어다니는 길을 자전거로 가니 20여분으로 등교길이 줄었다. 늘 밤길을 다니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등하교길이 즐거웠는데........
하루는 교수님 강의 시간에 칠판에 사자성어 하나를 써 놓으시고는
"오늘은 이것으로 한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하시는 것이 아닌가. 칠판에 써 놓은 글자는 바로 역지사지였다.

역지사지 [易地思之] [명사]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여 본다는 뜻

"살면서 늘 바쁜 사람들....자신들만 되돌아보기도 바쁜 생활이지만 늘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해요......이말을 하는 나도 그렇게 살아오지는 못했지만 요즘들어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내게는 <역지사지>....이것이 부족하더군요....친구나 가족이나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아닐까합니다.
잠시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언성을 높일 일도 싸울 일도 줄어들 겁니다. 또 그것이 내게도 좋은 일이고요...."

그 어떤 수업보다도 그날의 수업은 늘 내 마음 속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뭐 딱히 특별한 수업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그 표정 말투가 너무도 오랜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자전거 한 대를 선물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 씀씀이와 행동 때문이었다.
물론 선배들은 그 교수가 예전에는 깐깐했었다고 이야기 하곤 했었다.
학점도 짜고 원칙을 너무 고수해서 인간적인 면이 부족하다고....
그런데 그 교수님이 년초에 폐암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었다....학교에서는 쉬라고 했지만 이번 학기는 마치겠다며 계속 출강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병이 교수님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애쓰시는 듯 했다.
1학기를 맞추고 난 후 교수님은 퇴직하고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다고 했다.
주경야독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문병도 가지 못하다 졸업 후에 학교 행정실에 찾아갔을 때 학교 퇴직 후 1년만에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었다.
1학년 때 딱 한 학기만 강의를 들었을 뿐인데...지금도 그때의 강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그리고 그때의 사자성어
역지사지 [易地思之]가 가슴에 못이 되어 박혀있다.
1994년 김건모의 '핑계'라는 노래가 히트하였을 때 그 노래만 들으면 늘 그 교수님이 생각나곤 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얘기로 넌 핑계를 대고 있어.... 내게 그런 핑계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웃을 수 있니 ....'
스승의 날이면 늘 마음 한 곳에 따스하게 그리고 아프게 스며드는 말....역지사지......그리고 마지막 미소가 너무나 편안해보였던 선생님.........죄송합니다....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