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서 깍두기를 만났습니다.

2008. 3. 23. 18:11세상 사는 이야기

예전에 폭력영화에 나오던  조폭이나 야쿠자를 혼자 있을 때 만나면 기분이 어떨까요?
글쎄요 직접 당해보지 않아서 모르시겠다고요?. 이번에 말로만 듣던 상황을 직접 경험했는데 정말 오금이 저리더군요.
벌써 2주 정도 지난 것 같네요. 일요일 오후 예고도 없이 아내가 서울을 가자고 하더군요.평소에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가는데 한가할 때 다녀와야 할 것 같다면서 서두르더군요.보통 한 달에 두 세번 정도 서울을 가는데 늘 나는 운전만 하고 일은 아내 혼자서 하지요. 일요일이면 나들이 나왔던 차들이 밀려서 되도록 피하자고 해도 오늘은 꼭 가야한다니 할 수 없이 가기로 했지요 .

한 시간 반 정도 가다 늘 들리는 단골집에 들러 청국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서울까지 가는데 4시간이 걸리더군요.평소보다 1시간 30분 정도 더 걸린듯 합니다. 평소 9시 전이면 도착해서 볼일을 보는데 오늘은 10시가 넘어서 도착했네요.아내는 일을 보기 시작하고 나는 늘 가던 남성전용 24시 사우나 방으로 가 잠을 청했습니다. 잠을 자야 다시 내려갈 때 졸지 않고 운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24시 사우나라는 곳이 맘 편히 잠잘 곳은 못됩니다.코를 고는 사람들과 술 먹고 떠드는 사람 전화통화하는 사람 등등 ...예민한 사람은 도저히 숙면을 취할 수 없는 곳이지요. 그래서 저는 아예 귀마개를 갖고 다닙니다. 

다행히 그날은 일요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더군요. 핸드폰을 진동으로 하고 주머니에 넣고 잠을 자다 보니 정확하게 2시에 뱃살이 부르르 떨리네요.일어나 씻고 남대문으로 갈 준비를 하려고 수면실에서 지하 사우나탕으로 내려갔는데 아무도 없네요.
40분정도의 여유가 있어 탕안에 들어가 있는데 옆에서 물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똑....똑.....똑....사람이 많을 때는 전혀 들을 수 없는 작은 물소리가 혼자 있을 때는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 것일까요.기분이 싸해져서 씻고 나가려고 탕을 나오는데 밖에서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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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장한 체격에 온몸에는 문신이 가득합니다.딱 보니 깍두기입니다.머리가 아득해지더군요.예전에 조폭마누라 ,비열한 거리에서 보았던 전신에 용문신을 새긴 사람과 똑같았습니다.목 아래 가슴부터 엉덩이 아래 다리까지 용이 온몸을 휘감았습니다. 그야말로 푸르딩딩 살아있는 청룡이었습니다.보라는 듯이 가슴을 씰룩거리는데 그때마다 용이 굼틀꿈틀 거리는데 영화에서 혹은 뉴스에서 보아온 깍두기에 대한 선입견이 나를 바짝 긴장시키더군요.목욕탕에 문신을 새긴 사람은 출입금지라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는 아닌가보네....아니면 몰래 들어온 건가?.슬그머니 샤워장쪽으로 가서 몸을 씻고 있는데, 둘이 냉탕안으로 풍덩 들어가더니 수영을 합니다.술을 마셨는지 얼굴과 몸이 빨갛습니다.오늘은 수금이 잘 되었다는둥,한 곳은 대출받아 갚는다고 했고 다른 곳도 예상보다 빨리 끝나서 술 한 잔 더하자는 말도 들립니다. 둘이 친구인지 문신도 똑같습니다.아마 한 공장에서 찍어낸 용인가 봅니다.혼자 있을 때 보다 더 두려워 지기 시작하더군요.겉으로는 '참나 내가 뭐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쫄을 필요가 있나?'
하면서도 속으로는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비누로 몸을 씻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저쪽에서
"아저씨,이리 좀 와 봐요?'
한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순간 아이들 놀이처럼 얼음이 되어 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 사람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한다. 이리 좀 와 보라고......
"아저씨,부탁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슈"
속으로는 '어라 이녀석 말투봐라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것이....그리고 시간 없어서 안되겠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데 말이 안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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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의 전신에 용이 무엇이라고 이리도 절절 매는 거냐 이 한심한 놈아' 하면서도
냉탕 앞으로 가니 연신 물텀벙을 하던 두 마리 용 중에 한 용이 나에게 부탁을 합니다.
'아저씨 야랑 나랑 내기를 해야 하는데 잠시 심판을 좀 봐 주슈"
한다.
"무슨?"
" 물속에 누가 오래 잠수하나 내기를 하려고 하는데 심판을 봐줄 사람이 없어서 그러니 좀 봐 주슈"
'말끝마다 주슈 주슈 하는 것도 기분 나쁘려니와 한가하게 그런 것 심판 봐줄 시간없어'이렇게 말하고 싶은데 또 꿈틀거리는 용을 보니 목구멍이 닫혀 버립니다.
"양주가 걸린 내기니 정확히 봐 주슈"
이건 뭐 숫제 일방통행입니다.내가 그러마 이야기 한 적도 없는데 벌써 내기를 시작합니다.참나 울며 겨자먹기가 따로 없습니다.
자기들 끼리 요잇 땅 하며 들어가는데.....물 속에서 용 두 마리가 꿈틀꿈틀 거립니다.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할 것 같은 청룡 두 마리....
'내가 지금 저 용을 두려워 하는 걸까 깍두기를 두려워 하는 걸까?'
내 생각은 아랑곳 없이 깍두기 둘은 이기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꿈틀대는데 그때마다 정말 용이 물 속에서 노는 것 같습니다.한 판에 1분 남짓 3분도 안돼 게임은 일방적으로 끝나버립니다.내가 심판 볼 건더기도 없는 것을 괜히 불러놓고 뭐하는 짓인지 원........
돌아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저씨?"
하고 또 부른다. 또 얼음 하고 뒤돌아보니
"고맙수"
한다.
이런 환장할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저 말투...저 놈의 용만 아니면 그냥 나갔을 텐데....저놈의 용때문이야...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 .....쌍룡이 아닌가 ......
"아,예......."
하고 문밖으로 나서는데 왜 이리 몸에 기운이 빠지는지.....
평소에 내가 깍두기에 대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리 오금이 저리고 긴장을 했을까. 만일 길거리에서 옷을 입은 채로 나에게 물었다면 아무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을 텐데 옷을 벗은 문신을 보는 순간 내 잠재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야쿠자나 깍두기에 대한 선입견이 나의 의지를 순식간에 물렁하게 만들어 놓았나봅니다....사실 깍두기와 단독으로 대면했다고 큰 일이 난 것도 아니고 그냥 몇 마디 말로 끝난 것인데 스스로 비굴 모드로 행동했다는 것이 창피하기도 하더군요. 그렇지만 예고없이 그런 상황이 되니 별 생각이 다들더군요.만일 이유없이 시비를 걸어와서 충돌하거나 다툼이 생기면 어쩌나...잘못되면 내 가족들은 어떻하나....이 순간을 모면하면 다시 평온해질텐데.....그런 생각을 하니 자연적으로 그리 행동하게 되더군요....요즘 말로 하면 굴욕이라고 해야하나요?
그래도 다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또 똑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소심남의 생각 잘못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