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감상) 광염소나타 /김동인
2008. 1. 1. 14:24ㆍ마음의 양식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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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염 소나타
김동인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可能性) 뿐은 있다― 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찜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 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서,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 것을 아시오?"
"네, 새삼스러이 연구할 문제도 아닐 걸요."
"자, 여기 어떤 상점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마침 주인도 없고 사환도 없고 온통 비었을 적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신사가 ― 그 신사는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는 점잖은 사람인데― 그 신사가 빈 상점을 들여다보고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 통 비었으니깐 도적놈이라도 넉넉히 들어갈 게다. 들어가서 훔치면 아무도 모를 테다. 집을 왜 이렇게 비워 둔담……. 이런 생각 끝에 혹은 그 ―그 뭐랄까, 그 돌발적(突發的) 변태 심리로서 조그만 물건 하나(변변치도 않고 욕심도 안 나는)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있습니다. 있어요."
어떤 여름날 저녁이었었다. 도회를 떠난 교외 어떤 강변에, 두 노인이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기회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명한 음악 비평가 K씨였었다. 듣는 사람은 사회 교화자의 모씨였었다.
"글세, 있을까요?"
"있어요. 좌우간 있다 가정하고, 그러한 경우에 그 책임은 어디 있습니까?"
"동양 속담 말에, 외밭서는 신 끈도 다시 매지 말랬으니, 그 신사가 책임을 질까요?"
"그래 버리면 그뿐이지만, 그 신사는 점잖은 사람으로서, 그런 절대적 기묘한 찬스만 아니더라면 그런 마음은커녕 염도 내지도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찌 됩니까?"
"……."
"말하자면 죄는 <기회>에 있는데 <기회>라는 무형물은 벌을 할 수가 없으니깐, 그 신사를 가해자로 인정할 수밖에는 지금은 없지요."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의 천재라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기회>가 없으면 영구히 안 나타나고 마는 일이 있는데, 그 <기회>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천재>와 <범죄 본능>을 한꺼번에 끄울러 내었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하여야겠습니다. 축복하여야겠습니까?"
"글쎄요."
"선생은 백성수라는 사람을 아시오?"
"백성수? ―자 ― 기억이 없는데요."
"작곡가(作曲家)로서 그―"
"네. 생각납니다. 유명한 ―'광염 소나타'의 작가 말씀이지요?"
"네.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 뭐 발광했단 말이 있었는데―"
"네. 지금 ××정신 병원에 감금돼 있는데, 그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할게 들으시고, 사회 교화자(社會敎化者)로서의 의견을 말씀해주십쇼."
―내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백성수의 아버지도 또한 천분 많은 음악가였습니다.
나와는 동창생이었는데 학생 시대부터 벌써 그의 천분은 넉넉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작곡과(作曲科)를 전공하였는데, 때때로 스스로 작곡을 하여서는 밤중에 혼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뜻하지 않게 일어나게 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밤중에 울리어 오는 야성(野性)적 선율에 몸을 소스라치고 하였습니다.
그는 야인(野人)이었습니다. 광포스런 야성은, 때때로 비위에 틀리면 선생을 두들기기가 예사이며, 우리 학교 근처의 술집이며 모든 상점 주인들은, 그에게 매깨나 안 얻어맞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야성은 그의 음악 속에 풍부히 잠겨 있어서, 오히려 그 야성적 힘이 그의 예술을 빛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그 야성은 다른 곳으로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술― 술― 무서운 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술잔이 그의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을 먹고는 여편네들에게 행패를 하고, 경찰서에 구류를 당하고, 나와서는 또 같은 일을 하고……. 작품? 작품이 다 무엇이외까? 술을 먹은 뒤에 취훙에 겨워, 때때로 피아노에 앉아서 즉흥(卽興)으로 탄주를 하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 힘과 야성(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발견할 수 없던), 그건―보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각각 제 길 닦기에 바쁜 사람이라, 주정꾼의 즉흥악을 일일이 베껴 둔다든가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때때로 술을 삼가기를 권고하였지만, 그런 야인에게 친구의 권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술? 술은 음악이다!"
하고는 하하하하 웃어 버리고 다시 술집으로 달아나곤 합니다.
그러한 칠팔 년이 지난 뒤에 그는 아주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이 안 들어가면 그의 손은 떨렸습니다. 눈에는 눈꼽이 끼었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술만 들어가면 그는 그 광포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붙잡고는 입에 술을 부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데나 누워서 잡니다.
사실 아까운 천재였습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때때로 그의 천분을 생각하고 아깝게 여기는 한숨이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그 장래가 무서운 한 천재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어떤 양가의 처녀를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애까지 뱄습니다. 그러나 그 애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아깝게도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유복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백성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수가 세상에 출생되었다는 풍문만 들었지, 그 애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는 그 애의 소식이며 그 애 어머니의 소식은 일체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는 것보다, 그 집안의 일은 우리의 머리에서 온전히 잊어버리우고 말았습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 년이면 산천도 변한다 하는데 삼십 년 사이의 변천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좌우간 그 동안에 나는 내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K라 하면 이 나라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음악 비평가가 아닙니까. 건실한 지도적 비평가 K라면, 이 나라의 음악계의 권위며, 이 나의 한 마디는 음악가의 가치를 결정하는 판결문이라 하여도 옳을 만치 되었습니다.
많은 음악가가 내 손아래에서 자랐으며, 많은 음악가가 내 지도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재작년 이른 봄 어떤 날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조용한 밤중의 몇 시간씩을 ○○예배당에 가서,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집으로서, 조용한 밤중에 기둥에서 뚝뚝하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고 들리지 않는, 말하자면 나 같은 괴상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돈을 주면서 들어가래도 들어가지 않을 음침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명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다른 데서 구하기 힘들도록 온갖 것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외따르고 조용하고 음침하며, 간간이 알지 못할 신비한 소리까지 들리며, 멀리서는 때때로 놀란 듯한 기적(汽笛) 소리도 들리는 …… 이것 뿐으로도 상당한데, 게다가 이 예배당에는 피아노도 한 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오르간은 있을지나 피아노가 있는 곳은 쉽지 않은 것으로서, 무슨 흥이나 날 때에는 피아노에 가서 한 곡조 두드리는 재미도 또한 괜찮았습니다.
그날 밤도(아마 두 시는 지났을 걸요) 그 예배당에서 혼자서 눈을 감고 조용한 맛을 즐기고 있노라는데, 갑자기 저편 아래에서 재재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눈을 번쩍 뜨니까 화광이 충천하였는데, 내다보니까 언덕 아래 어떤 집에 불이 붙으며 사람들이 왔다갔다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불붙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일어서는 불길이며, 퍼져 나가는 연기, 불씨의 날아나는 양, 그 가운데 거뭇거뭇 보이는 기둥, 집의 송장, 재재거리는 사람의 무리,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과연 시도 될지며 음악도 될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네로>가 불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비파를 들고 노래를 하였다는 것도 음악가의 견지로 보면 그다지 나무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그 때에 그 불을 보고 차차 흥이 났습니다. ……<네로>를 본받아서 나도 즉흥으로 한 곡조 두드려 볼까,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불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덜컥덜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 문이 열리며, 웬 젊은 사람이 하나 낭패한 듯이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놀란 사람같이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더니, 그래도 내가 있는 것은 못 보았는지, 저편에 있는 창안에 가서 숨어 서서, 아래서 붙은 불을 내려다봅니다. 나도 꼼짝을 못 하였습니다. 좌우간 심상스런 사람은 아니요, 방화범이나 도적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꼼짝을 못 하고 서 있노라니까 그 사람은 한창 정신없이 서 있다가 한숨을 쉽니다. 그리고 맥없이 두 팔을 느리우고 도로 나가려고 발을 떼려다가 자기 곁에 피아노가 놓인 것을 보더니, 교의를 끌어다 놓고 그 앞에 주저앉고 말겠지요. 나도 거기는 그만 직업적 흥미가 끌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보자하고 있노라니까, 뚜껑을 열더니 한 번 뚱하고 시험을 해 보아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다시 뚱뚱 하고 시험을 해 보겠지요. 이 때부터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씩씩거리며 몹시 흥분된 사람같이 몸을 떨다가 벼락같이 양손을 <키이> 위에 갖다가 덮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 C샤프 단음계(短音階)의 알레그로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만 흥미로서 그의 모양을 엿보고 있던 나는 그 알레그로가 울리어 나오는 순간 마음은 끝까지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야성(野性)적 음향이었습니다. 음악이라 하기에는 너무 힘있고 무기교(無技巧)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니라기에는 거기에는 너무 괴롭고도 무겁고 힘있는 <감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반의 종소리와도 같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음침하게 하는 음향인 동시에,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치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
아아, 그 야성적 힘과 남성적 부르짖음, 그 아래 감추어 있는 침통한 주림과 아픔, 순박하고도 아무 기교가 없는 표현!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악가의 본능으로서 뜻하지 않게 주머니에서 오선지(五線紙)와 연필을 꺼내었습니다. 피아노의 울리어 나아가는 소리에 따라서 나의 연필은 오선지 위에서 뛰놀았습니다.
등불도 없는지라, 손짐작으로. …… 좀 급속도로 시작된 빈곤, 거기 연하여 주림, 꺼져가는 불꽃과 같은 목숨, 그러한 것을 지나서 한참 연속되는 완서조(緩徐調)의 압축된 감정, 갑자기 튀어져 나오는 광포(狂暴), 거기 연한 쾌미(快味), 흥소(哄笑) ― 이리하여 주화조(主和調)로서 탄주는 끝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 속에 나타나 있는 압축된 감정이며 주림, 또는 맹렬한 불길 등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그 처참함이며 광포성은 나로 하여금 아직 <문명>이라 하는 것이 은택에 목욕하여 보지 못한 야인(野人)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탄주가 다 끝이 난 뒤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음악의 소양이 있는 사람일 것 같으면, 이제 그 소나타를 음악에 대하여 정통(正統)으로 아무러한 수양도 받지 못한 사람이, 다만 자기의 천재적 즉흥 뿐으로 탄주한 것임을 알 것입니다. 해결(解決)도 없이, 감칠도화현(減七度和絃)이며 증육도화현(增六度和絃)을 범벅으로 섞어 놓았으면 금칙(禁則)인 병행오팔도(竝行五八度)까지 집어넣은 것으로서, 더구나 스케르쪼는 온전히 뽑아 먹은 ―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무식하다면 무식하달 수도 있는 자유 분방한 소나타였습니다.
이때에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삼십 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은 백 ○○였습니다. 그의 음악으로써, 만약 정통적 훈련만 뽑고 거기다가 야성을 더 집어넣으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음악가의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 듯한 그 힘과 방분스런 표현과 야성(野性) ― 이것은 근대 음악가에게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습니다.
그 소나타에 취하여 한참 정신이 어리둥절해 앉았던 나는, 고즈너기 일어서서 피아노 앞에 가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습니다. 한 곡조를 타고나서 아주 곤한 듯이 정신이 없이 앉아 있던 그는, 펄떡 놀라며 일어서서 내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네 몇 살 났나?"
나는 그에게 이렇게 첫 말을 물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한 나로서는 이런 말밖에는 갑자기 다른 말이 생각 안 났습니다. 그는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고 있는 내 얼굴을 한 순간 쳐다보고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습니다.
"배 고프나?"
나는 두 번째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시끄러운 듯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달빛이 비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아, K선생님 아니세요?"
하면서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노라고 하니깐,
"사진으로는 늘 뵈었습니다마는 ……"
하면서 다시 맥없이 나를 놓으며 머리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 ― 그가 머리를 돌이키는 순간, 달빛에 얼핏 나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뜻밖에, 삼십 년 전에 죽은 벗 백 ○○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아, 자네 이름이 뭐인가?"
"백성수……"
"백성수? 그 백○○의 아들이 아닌가. 삼십 년 전에 자네가 나오기 전에 세상 떠난……"
그는 머리를 번쩍 들었습니다.
"네? 선생님 어떻게 아세요?"
"백○○의 아들인가? 같이두 생겼다. 내가 자네의 어르신네와 동창이네. 아아― 역시 그 애비의 아들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며 머리를 숙여 버렸습니다. 나는 그날 밤 그 백성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곡상 온갖 법칙에는 어그러진다 하나, 그만치 힘과 정열과 열성으로 찬 소나타를 거저 버리기가 아까와서 다시 한 번 피아노에 올라앉기를 명하였습니다. 아까 예배당에서 내가 베낀 것은 알레그로가 거의 끝난 곳부터였으므로 그전 것을 베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향하여 앉아서 머리를 기울였습니다. 몇 번 손으로 '키이'를 두드려 보다가는 다시 머리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 여섯 번을 다시하여 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피아노에서 울려오는 음향은 규칙 없고 되지 않은 한낱 소음(騷音)에 지나지 못하였습니다. 야성? 힘? 귀기(鬼氣)?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감정의 재뿐이었었습니다.
"선생님 잘 안 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연하여 고개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 시간도 못 돼서 벌써 잊어버린담?"
나는 그를 밀어놓고 내가 대신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까 베낀 그 음보를 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베낀 곳부터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염(火炎)! 화염! 빈곤, 주림, 야성적 힘, 기괴한 감금당한 감정! 음보를 보면서 타던 나는 스스로 흥분이 되었습니다. 미상불 그때는 내 눈은 미친 사람같이 번득였으며 얼굴은 흥분으로 새빨갛게 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즉, 그 때에 그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떠 밀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하여 앉았습니다. 의자에서 떨어진 나는, 그 자리에 앉은 대로 그의 양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밀쳐 버린 다음에 그 음보를 들고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그의 얼굴!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지면서 눈은 미친 사람과 같이 빛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음보를 홱 내어 던지며 문득 벼락같이 그의 두 손은 피아노 위에 덮치었습니다. 의 광포스런 소나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폭풍우같이, 또는 무서운 물결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숨막히게 하는 그 힘, ― 그것은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게서 보지 못하던 광포스런 야성이었습니다. 무섭고도 참담스런 주림, 빈곤, 압축된 감정, 거기서 튀어져 나온 맹염(猛炎), 공포, 홍소― 아아, 나는 너무 숨이 답답하여 뜻하지 않고 두 손을 홱 내저었습니다.
그날 밤이 새도록 그는 흥분이 되어서 자기의 과거를 일일이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에 의지하면 대략 그의 경력이 이러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밴 뒤에 곧 자기의 친정에서 쫓겨 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가난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양이 있고 어질은 그의 어머니는 품팔이를 할지언정 성수는 곱게 길렀습니다. 변변치는 않으나마 오르간 하나를 준비하여 두고, 그가 잠자려 할 때에는 슈베르트의 <자장가>로서 그의 잠을 도왔으며, 아침에 깨일 때는 하루종일을 유쾌히 지내게 하기 위하여 도랜드의 <세컨드 발츠>로서 그의 원기를 돋구었습니다.
그는 세 살 났을 적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오르간을 장난하여 보았습니다. 이 오르간을 장난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근근히 돈을 모아서 그가 여섯 살 나는 해에 피아노를 하나 샀습니다. 아침에는 새소리, 바람에 버석거리는 포플라 잎, 어머니의 사랑, 부엌에서 국 끓는 소리, 이러한 모든 것이 이 소년에게는 신비스럽고도 다정스러워, 그는 피아노에 향하여 앉아서 생각나는 대로 <키이>를 두드리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이 소학과 중학도 마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음악에 대한 동경은 그의 가슴에 터질 듯이 쌓였습니다. 중학을 졸업한 뒤에는 이젠 어머니를 위하여 그는 학업을 중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공장의 직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진 어머니의 교육 아래서 길러난 그는, 비록 직공은 되었다 하나 아주 온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집착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비록 돈이 없어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은 못 받을 망정, 거리에서 손님을 끄느라고 틀어 놓은 유성기 앞이며, 또는 일요일날 예배당에서 찬양대에서 노래에 젊은 가슴을 뛰놀리던 그였습니다. 집에서는 피아노 앞을 떠나 본 일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비상한 감흥으로 오선지(五線紙)를 내어놓고 음보를 그려 본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만치 뛰놀던 열정과 터질 듯한 감격도 음보로 그려 놓으면 아무 긴장도 없는 싱거운 음계가 되어 버리고 하였습니다. 왜? 그만치 천분이 있고 그만치 열정이 있던 그에게서, 왜 그런 재와 같은 음악만 나왔느냐고 물으실 테지요. 거기 대하여서는 이따가 설명하리다. 감격과 불만, 열정과 재, ― 비상한 흥분과 그 흥분에 반비례되는 시원치 않은 결과, 이러한 불만의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문득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자양과 약값, 그의 몇 해를 근근히 모았던 돈은 차차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안락한 생활이 되기만 하면, 정식으로 음악에 대한 교육을 받으려고 모아 두었던 저금은 그의 어머니의 병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내가 그 예배당에서 만나기 전 해 여름 어떤 날 그의 어머니는 도저히 회복할 가망이 없는 중태에까지 빠지게 되었습니다
[작가 약력]
생년월일 : 1900년 10월 2일
사망 : 1951년 1월 5일
학력 : 메이지가쿠인대학교
데뷔 : 약한자의 슬픔 (1919년)
저서 : 배따라기 · 감자, 운현궁의 봄, 붉은 산, 양녕과 정향, 수양대군
화제 : 김동인문학비 동상(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김동인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可能性) 뿐은 있다― 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찜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 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서,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기회(찬스)라 하는 것이, 사람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하는 것을 아시오?"
"네, 새삼스러이 연구할 문제도 아닐 걸요."
"자, 여기 어떤 상점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마침 주인도 없고 사환도 없고 온통 비었을 적에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가던 신사가 ― 그 신사는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는 점잖은 사람인데― 그 신사가 빈 상점을 들여다보고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아요? 통 비었으니깐 도적놈이라도 넉넉히 들어갈 게다. 들어가서 훔치면 아무도 모를 테다. 집을 왜 이렇게 비워 둔담……. 이런 생각 끝에 혹은 그 ―그 뭐랄까, 그 돌발적(突發的) 변태 심리로서 조그만 물건 하나(변변치도 않고 욕심도 안 나는)를 집어서 주머니에 넣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있습니다. 있어요."
어떤 여름날 저녁이었었다. 도회를 떠난 교외 어떤 강변에, 두 노인이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기회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유명한 음악 비평가 K씨였었다. 듣는 사람은 사회 교화자의 모씨였었다.
"글세, 있을까요?"
"있어요. 좌우간 있다 가정하고, 그러한 경우에 그 책임은 어디 있습니까?"
"동양 속담 말에, 외밭서는 신 끈도 다시 매지 말랬으니, 그 신사가 책임을 질까요?"
"그래 버리면 그뿐이지만, 그 신사는 점잖은 사람으로서, 그런 절대적 기묘한 찬스만 아니더라면 그런 마음은커녕 염도 내지도 않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찌 됩니까?"
"……."
"말하자면 죄는 <기회>에 있는데 <기회>라는 무형물은 벌을 할 수가 없으니깐, 그 신사를 가해자로 인정할 수밖에는 지금은 없지요."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사람의 천재라 하는 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기회>가 없으면 영구히 안 나타나고 마는 일이 있는데, 그 <기회>란 것이 어떤 사람에게서, 그 사람의 <천재>와 <범죄 본능>을 한꺼번에 끄울러 내었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저주하여야겠습니다. 축복하여야겠습니까?"
"글쎄요."
"선생은 백성수라는 사람을 아시오?"
"백성수? ―자 ― 기억이 없는데요."
"작곡가(作曲家)로서 그―"
"네. 생각납니다. 유명한 ―'광염 소나타'의 작가 말씀이지요?"
"네.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 뭐 발광했단 말이 있었는데―"
"네. 지금 ××정신 병원에 감금돼 있는데, 그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할게 들으시고, 사회 교화자(社會敎化者)로서의 의견을 말씀해주십쇼."
―내가 이제 이야기하려는 백성수의 아버지도 또한 천분 많은 음악가였습니다.
나와는 동창생이었는데 학생 시대부터 벌써 그의 천분은 넉넉히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작곡과(作曲科)를 전공하였는데, 때때로 스스로 작곡을 하여서는 밤중에 혼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뜻하지 않게 일어나게 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밤중에 울리어 오는 야성(野性)적 선율에 몸을 소스라치고 하였습니다.
그는 야인(野人)이었습니다. 광포스런 야성은, 때때로 비위에 틀리면 선생을 두들기기가 예사이며, 우리 학교 근처의 술집이며 모든 상점 주인들은, 그에게 매깨나 안 얻어맞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야성은 그의 음악 속에 풍부히 잠겨 있어서, 오히려 그 야성적 힘이 그의 예술을 빛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그 야성은 다른 곳으로 발전되고 말았습니다.
술― 술― 무서운 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술잔이 그의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술을 먹고는 여편네들에게 행패를 하고, 경찰서에 구류를 당하고, 나와서는 또 같은 일을 하고……. 작품? 작품이 다 무엇이외까? 술을 먹은 뒤에 취훙에 겨워, 때때로 피아노에 앉아서 즉흥(卽興)으로 탄주를 하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 힘과 야성(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서 발견할 수 없던), 그건―보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각각 제 길 닦기에 바쁜 사람이라, 주정꾼의 즉흥악을 일일이 베껴 둔다든가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은 그의 장래를 생각하여 때때로 술을 삼가기를 권고하였지만, 그런 야인에게 친구의 권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술? 술은 음악이다!"
하고는 하하하하 웃어 버리고 다시 술집으로 달아나곤 합니다.
그러한 칠팔 년이 지난 뒤에 그는 아주 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술이 안 들어가면 그의 손은 떨렸습니다. 눈에는 눈꼽이 끼었습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술만 들어가면 그는 그 광포성을 발휘하였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붙잡고는 입에 술을 부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는 장소를 불문하고 아무데나 누워서 잡니다.
사실 아까운 천재였습니다. 우리들 사이에는 때때로 그의 천분을 생각하고 아깝게 여기는 한숨이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그 장래가 무서운 한 천재가 있었다는 것은 몰랐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는 어떤 양가의 처녀를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애까지 뱄습니다. 그러나 그 애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아깝게도 심장마비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유복자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백성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성수가 세상에 출생되었다는 풍문만 들었지, 그 애 아버지가 죽은 뒤부터는 그 애의 소식이며 그 애 어머니의 소식은 일체 몰랐습니다. 아니, 몰랐다는 것보다, 그 집안의 일은 우리의 머리에서 온전히 잊어버리우고 말았습니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 년이면 산천도 변한다 하는데 삼십 년 사이의 변천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좌우간 그 동안에 나는 내 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K라 하면 이 나라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음악 비평가가 아닙니까. 건실한 지도적 비평가 K라면, 이 나라의 음악계의 권위며, 이 나의 한 마디는 음악가의 가치를 결정하는 판결문이라 하여도 옳을 만치 되었습니다.
많은 음악가가 내 손아래에서 자랐으며, 많은 음악가가 내 지도로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재작년 이른 봄 어떤 날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조용한 밤중의 몇 시간씩을 ○○예배당에 가서, 명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덕 위에 홀로 서 있는 집으로서, 조용한 밤중에 기둥에서 뚝뚝하는 소리밖에는 아무 소리고 들리지 않는, 말하자면 나 같은 괴상한 성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돈을 주면서 들어가래도 들어가지 않을 음침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명상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다른 데서 구하기 힘들도록 온갖 것을 가진 집이었습니다. 외따르고 조용하고 음침하며, 간간이 알지 못할 신비한 소리까지 들리며, 멀리서는 때때로 놀란 듯한 기적(汽笛) 소리도 들리는 …… 이것 뿐으로도 상당한데, 게다가 이 예배당에는 피아노도 한 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오르간은 있을지나 피아노가 있는 곳은 쉽지 않은 것으로서, 무슨 흥이나 날 때에는 피아노에 가서 한 곡조 두드리는 재미도 또한 괜찮았습니다.
그날 밤도(아마 두 시는 지났을 걸요) 그 예배당에서 혼자서 눈을 감고 조용한 맛을 즐기고 있노라는데, 갑자기 저편 아래에서 재재 하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눈을 번쩍 뜨니까 화광이 충천하였는데, 내다보니까 언덕 아래 어떤 집에 불이 붙으며 사람들이 왔다갔다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불붙는 것을 바라보는 맛도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일어서는 불길이며, 퍼져 나가는 연기, 불씨의 날아나는 양, 그 가운데 거뭇거뭇 보이는 기둥, 집의 송장, 재재거리는 사람의 무리,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과연 시도 될지며 음악도 될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네로>가 불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비파를 들고 노래를 하였다는 것도 음악가의 견지로 보면 그다지 나무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도 그 때에 그 불을 보고 차차 흥이 났습니다. ……<네로>를 본받아서 나도 즉흥으로 한 곡조 두드려 볼까,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불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갑자기 덜컥덜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예배당 문이 열리며, 웬 젊은 사람이 하나 낭패한 듯이 뛰어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무엇에 놀란 사람같이 두리번두리번 사면을 살피더니, 그래도 내가 있는 것은 못 보았는지, 저편에 있는 창안에 가서 숨어 서서, 아래서 붙은 불을 내려다봅니다. 나도 꼼짝을 못 하였습니다. 좌우간 심상스런 사람은 아니요, 방화범이나 도적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꼼짝을 못 하고 서 있노라니까 그 사람은 한창 정신없이 서 있다가 한숨을 쉽니다. 그리고 맥없이 두 팔을 느리우고 도로 나가려고 발을 떼려다가 자기 곁에 피아노가 놓인 것을 보더니, 교의를 끌어다 놓고 그 앞에 주저앉고 말겠지요. 나도 거기는 그만 직업적 흥미가 끌렸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나 보자하고 있노라니까, 뚜껑을 열더니 한 번 뚱하고 시험을 해 보아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다시 뚱뚱 하고 시험을 해 보겠지요. 이 때부터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씩씩거리며 몹시 흥분된 사람같이 몸을 떨다가 벼락같이 양손을 <키이> 위에 갖다가 덮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 C샤프 단음계(短音階)의 알레그로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만 흥미로서 그의 모양을 엿보고 있던 나는 그 알레그로가 울리어 나오는 순간 마음은 끝까지 긴장되고 흥분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야성(野性)적 음향이었습니다. 음악이라 하기에는 너무 힘있고 무기교(無技巧)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이 아니라기에는 거기에는 너무 괴롭고도 무겁고 힘있는 <감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야반의 종소리와도 같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고 음침하게 하는 음향인 동시에, 맹수의 부르짖음과 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 돋치게 하는 무서운 감정의 발현이었습니다.
아아, 그 야성적 힘과 남성적 부르짖음, 그 아래 감추어 있는 침통한 주림과 아픔, 순박하고도 아무 기교가 없는 표현! 나는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음악가의 본능으로서 뜻하지 않게 주머니에서 오선지(五線紙)와 연필을 꺼내었습니다. 피아노의 울리어 나아가는 소리에 따라서 나의 연필은 오선지 위에서 뛰놀았습니다.
등불도 없는지라, 손짐작으로. …… 좀 급속도로 시작된 빈곤, 거기 연하여 주림, 꺼져가는 불꽃과 같은 목숨, 그러한 것을 지나서 한참 연속되는 완서조(緩徐調)의 압축된 감정, 갑자기 튀어져 나오는 광포(狂暴), 거기 연한 쾌미(快味), 흥소(哄笑) ― 이리하여 주화조(主和調)로서 탄주는 끝이 났습니다.
더구나 그 속에 나타나 있는 압축된 감정이며 주림, 또는 맹렬한 불길 등이 사람의 마음에 주는 그 처참함이며 광포성은 나로 하여금 아직 <문명>이라 하는 것이 은택에 목욕하여 보지 못한 야인(野人)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탄주가 다 끝이 난 뒤에도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조금이라도 음악의 소양이 있는 사람일 것 같으면, 이제 그 소나타를 음악에 대하여 정통(正統)으로 아무러한 수양도 받지 못한 사람이, 다만 자기의 천재적 즉흥 뿐으로 탄주한 것임을 알 것입니다. 해결(解決)도 없이, 감칠도화현(減七度和絃)이며 증육도화현(增六度和絃)을 범벅으로 섞어 놓았으면 금칙(禁則)인 병행오팔도(竝行五八度)까지 집어넣은 것으로서, 더구나 스케르쪼는 온전히 뽑아 먹은 ― 대담하다면 대담하고 무식하다면 무식하달 수도 있는 자유 분방한 소나타였습니다.
이때에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삼십 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은 백 ○○였습니다. 그의 음악으로써, 만약 정통적 훈련만 뽑고 거기다가 야성을 더 집어넣으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 음악가의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었습니다. 귀기(鬼氣)가 사람을 엄습하는 듯한 그 힘과 방분스런 표현과 야성(野性) ― 이것은 근대 음악가에게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습니다.
그 소나타에 취하여 한참 정신이 어리둥절해 앉았던 나는, 고즈너기 일어서서 피아노 앞에 가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습니다. 한 곡조를 타고나서 아주 곤한 듯이 정신이 없이 앉아 있던 그는, 펄떡 놀라며 일어서서 내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네 몇 살 났나?"
나는 그에게 이렇게 첫 말을 물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한 나로서는 이런 말밖에는 갑자기 다른 말이 생각 안 났습니다. 그는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달빛을 받고 있는 내 얼굴을 한 순간 쳐다보고 머리를 돌이키고 말았습니다.
"배 고프나?"
나는 두 번째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시끄러운 듯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달빛이 비친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아, K선생님 아니세요?"
하면서 나를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노라고 하니깐,
"사진으로는 늘 뵈었습니다마는 ……"
하면서 다시 맥없이 나를 놓으며 머리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 ― 그가 머리를 돌이키는 순간, 달빛에 얼핏 나는 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뜻밖에, 삼십 년 전에 죽은 벗 백 ○○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아, 자네 이름이 뭐인가?"
"백성수……"
"백성수? 그 백○○의 아들이 아닌가. 삼십 년 전에 자네가 나오기 전에 세상 떠난……"
그는 머리를 번쩍 들었습니다.
"네? 선생님 어떻게 아세요?"
"백○○의 아들인가? 같이두 생겼다. 내가 자네의 어르신네와 동창이네. 아아― 역시 그 애비의 아들이다."
그는 한숨을 길게 쉬며 머리를 숙여 버렸습니다. 나는 그날 밤 그 백성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비록 작곡상 온갖 법칙에는 어그러진다 하나, 그만치 힘과 정열과 열성으로 찬 소나타를 거저 버리기가 아까와서 다시 한 번 피아노에 올라앉기를 명하였습니다. 아까 예배당에서 내가 베낀 것은 알레그로가 거의 끝난 곳부터였으므로 그전 것을 베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피아노를 향하여 앉아서 머리를 기울였습니다. 몇 번 손으로 '키이'를 두드려 보다가는 다시 머리를 기울이고 생각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 여섯 번을 다시하여 보았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피아노에서 울려오는 음향은 규칙 없고 되지 않은 한낱 소음(騷音)에 지나지 못하였습니다. 야성? 힘? 귀기(鬼氣)?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감정의 재뿐이었었습니다.
"선생님 잘 안 됩니다."
그는 부끄러운 듯이 연하여 고개를 기울이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 시간도 못 돼서 벌써 잊어버린담?"
나는 그를 밀어놓고 내가 대신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까 베낀 그 음보를 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베낀 곳부터 타기 시작하였습니다. 화염(火炎)! 화염! 빈곤, 주림, 야성적 힘, 기괴한 감금당한 감정! 음보를 보면서 타던 나는 스스로 흥분이 되었습니다. 미상불 그때는 내 눈은 미친 사람같이 번득였으며 얼굴은 흥분으로 새빨갛게 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즉, 그 때에 그가 갑자기 달려들더니 나를 떠 밀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대신하여 앉았습니다. 의자에서 떨어진 나는, 그 자리에 앉은 대로 그의 양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나를 밀쳐 버린 다음에 그 음보를 들고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아 그의 얼굴! 그의 숨소리가 차차 높아지면서 눈은 미친 사람과 같이 빛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음보를 홱 내어 던지며 문득 벼락같이 그의 두 손은 피아노 위에 덮치었습니다. 의 광포스런 소나타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폭풍우같이, 또는 무서운 물결같이 사람으로 하여금 숨막히게 하는 그 힘, ― 그것은 베토벤 이래로 근대 음악가에게서 보지 못하던 광포스런 야성이었습니다. 무섭고도 참담스런 주림, 빈곤, 압축된 감정, 거기서 튀어져 나온 맹염(猛炎), 공포, 홍소― 아아, 나는 너무 숨이 답답하여 뜻하지 않고 두 손을 홱 내저었습니다.
그날 밤이 새도록 그는 흥분이 되어서 자기의 과거를 일일이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이야기에 의지하면 대략 그의 경력이 이러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밴 뒤에 곧 자기의 친정에서 쫓겨 나왔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가난함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양이 있고 어질은 그의 어머니는 품팔이를 할지언정 성수는 곱게 길렀습니다. 변변치는 않으나마 오르간 하나를 준비하여 두고, 그가 잠자려 할 때에는 슈베르트의 <자장가>로서 그의 잠을 도왔으며, 아침에 깨일 때는 하루종일을 유쾌히 지내게 하기 위하여 도랜드의 <세컨드 발츠>로서 그의 원기를 돋구었습니다.
그는 세 살 났을 적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오르간을 장난하여 보았습니다. 이 오르간을 장난하는 것을 본 어머니는 근근히 돈을 모아서 그가 여섯 살 나는 해에 피아노를 하나 샀습니다. 아침에는 새소리, 바람에 버석거리는 포플라 잎, 어머니의 사랑, 부엌에서 국 끓는 소리, 이러한 모든 것이 이 소년에게는 신비스럽고도 다정스러워, 그는 피아노에 향하여 앉아서 생각나는 대로 <키이>를 두드리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고이 소학과 중학도 마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음악에 대한 동경은 그의 가슴에 터질 듯이 쌓였습니다. 중학을 졸업한 뒤에는 이젠 어머니를 위하여 그는 학업을 중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공장의 직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진 어머니의 교육 아래서 길러난 그는, 비록 직공은 되었다 하나 아주 온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집착은 조금도 줄지 않았습니다. 비록 돈이 없어서 정식으로 음악 교육은 못 받을 망정, 거리에서 손님을 끄느라고 틀어 놓은 유성기 앞이며, 또는 일요일날 예배당에서 찬양대에서 노래에 젊은 가슴을 뛰놀리던 그였습니다. 집에서는 피아노 앞을 떠나 본 일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비상한 감흥으로 오선지(五線紙)를 내어놓고 음보를 그려 본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만치 뛰놀던 열정과 터질 듯한 감격도 음보로 그려 놓으면 아무 긴장도 없는 싱거운 음계가 되어 버리고 하였습니다. 왜? 그만치 천분이 있고 그만치 열정이 있던 그에게서, 왜 그런 재와 같은 음악만 나왔느냐고 물으실 테지요. 거기 대하여서는 이따가 설명하리다. 감격과 불만, 열정과 재, ― 비상한 흥분과 그 흥분에 반비례되는 시원치 않은 결과, 이러한 불만의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문득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자양과 약값, 그의 몇 해를 근근히 모았던 돈은 차차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안락한 생활이 되기만 하면, 정식으로 음악에 대한 교육을 받으려고 모아 두었던 저금은 그의 어머니의 병에 다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와 내가 그 예배당에서 만나기 전 해 여름 어떤 날 그의 어머니는 도저히 회복할 가망이 없는 중태에까지 빠지게 되었습니다
[작가 약력]
생년월일 : 1900년 10월 2일
사망 : 1951년 1월 5일
학력 : 메이지가쿠인대학교
데뷔 : 약한자의 슬픔 (1919년)
저서 : 배따라기 · 감자, 운현궁의 봄, 붉은 산, 양녕과 정향, 수양대군
화제 : 김동인문학비 동상(서울 어린이대공원 야외음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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