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요사중 최고의 음악가족은 누굴까?

2008. 7. 8. 07:49연예가 이야기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 가족은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김시스터즈와 작은 별 가족이다.1970~80년대에 활동했던 작은 별 가족은 아빠, 엄마와 7명의 자녀와 함께 총 9명으로 구성된 한국 최초, 세계 유일의 가족 연주단이었다. 당시 5살부터 17살까지... 어린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비롯해, 플롯, 첼로, 가야금 등 50여 개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탁월한 재능과 맑은 음성으로 화제를 뿌렸었다. 당시 '요술공주 세리''아톰' ‘나의 작은 꿈’ ‘너 나의 미소’'그리운 어머니(이곡은 나중에 이상용이 진행하던 우정의 무대에서 어머니를 상봉할 때 늘 나오던 곡이었다)" 분홍빛 립스틱 등 수 많은 히트곡을 배출하며 1984년까지 활동하다 이후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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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http://cafe.daum.net/TamsGirl>

 또 하나의 그룹은 코리아나 인데 우리에게는 88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로 알려진 그룹이다. 가족이 아닌 남매로 이루어진 혼성팀으로 동양인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음반기록을 가지고 있는 코리아나는 유럽에선 아바, 두란두란, 징키스칸등과 같은 수준에서 인기있었던 팝그룹이었다. 당시의 멤버로는 이승규, 이용규, 이애숙의 3남매와 홍화자등 4명의 한국인과 미린, 레인 에노 등 2명의 필리핀 연주자를 포함한 6인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후 4명의 한국인으로만 구성되어 코리아나란 그룹명으로 활동했으며 'Dark eyes', 'Midnight love', 'I love rock & roll music','Come join us' 등 4장의 싱글은 골든 디스크를 기록했다.
또 최근에 활동중인 한스밴드가 눈에 띄는데 1998년 김한나,김한별,김한샘 세자매가 '선생님 사랑해요'라는 곡으로 데뷔해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막내 김한집이 가세해서 4남매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음악 가족중에 최고는 김시스터즈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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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1959년 9월 23일자 조선일보>

숙자자매는 당시 미국에서 대인기를 끌고 있던 김시스터를 가르키는 말이다.
김시스터즈는 '목포의 눈물'로 잘 알려진 이난영의 7남매중 세자매 영자 숙자 애자로 이루어진 음악그룹인데 처음 큰 언니인 영자가 활동하다 빠지자 셋째 숙자와 넷째 애자 그리고 외삼촌 이봉룡의 딸 민자와 팀을 이뤄 미국에 진출해서 수많은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미국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다.
김시스터즈의 아버지는 6,25 전쟁때 납북되어 처형당한 한국 뮤지컬의 개척자인 KPK 악단장 이었던 작곡가 김해송이다. 어머니 이난영의 독려에 의해 가수의 길을 걷게된 김시스터즈는 미8군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미국본토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고 나중에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스의 가세로 명실상부한 음악가족이 되었다.본래 많은 자녀를 낳아 보컬을 만드는 꿈을 갖고 있던 아버지 김해송은 이난영과의 사이에 12남매가 있었으나 아들 다섯은 병사를 하고 7남매만 남아 있었다. 이들 7남매 모두는 김해송에게 어렸을 적부터 악기와 노래 연습을 혹독할 정도로 훈련을 받았다.
미 8군에서 시작해 미국으로 진출시킨 어머니 이난영의 의지는 마침내 TV프로그램 <에드 셜리반 쇼>의 출연으로 김시스터즈의 존재를 알렸다. 위의 기사내용처럼 당시 백만명이 시청한다는 프로그램에서 여성이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미국인의 호기심을 유발시켰다. 이를 계기로 에픽 레코드에서 음반을  내게되고 <찰리 브라운>등 수록곡이 대히트 하며 타 프로그램에서의 출연경쟁으로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김시스터즈의 음악활동에 대해서 최규성 가요 칼럼리스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씨스터즈는 도미 1년 만에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냈다. 미국 전역의 1급 호텔 클럽에서 출연제의가 빗발치고 <셜리번 쇼> TV에도 33회나 출연했을 만큼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인기 배우 커크 더글러스와 존 F 케네디 미국대통령의 어머니는 골수팬이었다.

세계적인 명사와의 만남 장면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이들의 성공에 고무된 L.K.L레코드사는 미국에서 데뷔음반을 공수해 원판을 카피하여 <김시스터즈 첫 앨범>을 발매했다.

성공한 딸들은 1963년 어머니 이난영과 남동생들을 라스베가스로 초청해 5년 만에 재회했다. 형제들은 누이들의 주선으로 김브라더스를 결성하며 미국에 눌러 앉았다.

이난영은 프랑크 시나트라, 에디 피셔 등 인기절정의 당대 미국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딸들의 인기를 확인하곤 북받쳐 오르는 감격에 오열했다. 1963년 딸들의 활약을 담은 ‘영상필름’을 가져와 KBS TV에 소개해 소문으로만 접했던 김씨스터즈의 활약을 확인 시켜주었다.

그러나 이난영은 납북으로 생이별한 남편 김해송과 연인이었던 서정가요의 제왕 남인수가 잠들어 있는 고국 땅을 떠날 수 없었다. 적응키 힘든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홀로 귀국했지만 1965년 9월 11일 알코올 중독으로 쓸쓸하게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세 자매는 망연자실했지만 빡빡한 스케줄은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불효의 한을 남겼다.

1966년 유명 사회자 봅 호프와 함께 미국정부의 평화사절단으로 베트남을 방문해 1만5,000명의 참전 미군들을 위한 위문공연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또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순회공연에서도 박수갈채와 장미세례까지 받자 평론가들은 미국 최고의 흑인여자 보컬 트리오 <스프림즈>와 같은 서열로 김씨스터즈를 평가했다.

정부에서도 한미우의를 증진시키고 문화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들의 공로를 인정, 정부 감사장을 수여했다. 유명세는 엄청난 부를 동반시켰다. 미국 진출 10년 만에 김씨스터즈는 18인조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푸에르토 리코에 자신들의 호텔 나이트클럽을 소유, 연간 고액납세자 6위에 오르며 라스베가스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출처: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가수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어머니 이난영과 가족보컬을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 김해송의 비극적인 죽음...
이런 모든 아픔을 감내하며 이룬 미국에서의 성공과 금의환향  .............동서양을 조화시킨 독특한 무대매너와 연주를 곁들인 화려한 무대로 처음으로 빌보드 챠트에 진입하며 전 세계에 한국대중가요의 위상을 끌어 올렸던 김씨스터즈. 전쟁과 전쟁이후의 암울한 시대적 환경속에서도 한국 대중가요를 진일보 시킨 이난영과 김해송 그리고 김씨스터즈와 브라더스.이들 가족이야말로  한국가요사에 길이 남을 진정한 음악가족이 아니었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