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전쟁기념탑이 있다.

2008. 6. 22. 12:01세상 사는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이맘때면 늘 중학교 때 있었던 6.25 기념 행군이 생각난다.
지금으로 부터 33년전 일이다. 해마다 6월이면 6.25 행사가 있었는데 중학교 2학년이던 1975년에는 육탄용사전적비 까지 행군을 하는 것이 그 해의 행사였다.홍천지역은 유난히 부대가 많아 어려서부터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우리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자랐고 10km행군도 당연한 줄 알던 시절이었다.
날은 무더웠지만 전교생이 비포장 도로를 걷고 있을 때 군용차량이 지나가면 자욱한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 쓰곤 했다. 아마도 지금 걸어서 그곳까지 가라면 절대 갈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어설프게 배운 군가를 부르며 전쟁기념탑 육탄용사 전적비까지 행군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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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천군 화촌면 주음치리에 있는 육탄용사 전적비.>

사실 가보면 기념관은 없고 덩그라니 기념탑 하나만 있는 썰렁한 곳이었는데 그곳에 모여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사실 그때 귀담아 듣는 학생이 많지 않았지만 숙제로 제출해야하는 것 때문에 노트에 메모를 했었다.
요지는 북한군이 쳐들어 왔을 때 11명의 육탄 용사들이 이곳 말고개에서 적의 전차를 파괴해 후퇴시킨 것을 기리기 위한 기념탑이라는 것이었다.(33년전 중학교 다닐때는 육탄용사가 11명이었는데 나중에 19명으로 불어나 있었다.그때 참가햇던 특공대가 더 있었는지 인위적으로 부풀려 졌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전적비에는 11명의 육탄용사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쟁기념관의 조달진 일병의 공적에 전투기록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6·25전쟁 발발 나흘째인 1950년 6월 28일 0900경, 홍천 동북방에 자리한 말고개 능선에는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과 접전하고 있는 국군 제6사단 2연대를 지원하기 위한 한 무리의 대전차 특공대가 매복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단 주력의 철수로 확보임무를 부여받고 홍천으로 이동한 제6사단 19연대 소속으로서 적 전차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선발된 특공대였다.
  아군과 접전중인 적은 독립전차연대로 증강된 제2군단 예하의 제12사단으로, 화천-춘천 축선에 투입된 제2사단과 함께 조기에 춘천과 홍천을 점령하고 서울을 포위하기 위해 이천-수원으로 우회기동할 계획에 있었다. 따라서 홍천의 피탈 여부는 사단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과도 직결된 중대사안이었다.
  적의 강력한 보·전협동부대에 밀려 철수를 거듭한 뒤 철정리에서 가까스로 병력을 수습한 제2연대장은 말고개의 지형적 이점을 고려해 새로운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말고개는 우선 주변의 저지대 감제가 가능하고, 둘째 철정리 남쪽에서 내촌천과 합류한 화양강이 고개를 끼고 흐르고 있어 측방을 보호할 있으며, 셋째 인제-홍천간 도로와 현리에서 뻗은 도로가 철정리에서 합쳐져 고개로 통하게 되는 홍천으로의 유일한 진출로이며, 마지막으로 도로 폭이 좁고 굴곡이 심해 대전차방어에 천혜의 여건을 갖춘 지형이었다.
  한편, 춘천에서 6월 27일에 철수한 아군 제6사단 예하 제19연대의 주력은 28일 오전 08시에 홍천으로 집결해 이날 오전 9시에 경에 제1대대와 제2대대는 말고개와 북창고개 일대에서 적과 접전하고 있는 제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홍천을 출발하여 제2연대 좌측 말고개 북방 능선 일대로 진출하였다. 이때 적은 전차부대를 앞세우고 아군 진지를 위협하고 있었다.
  사단의 철수로 확보임무를 부여받고 정상적인 공격방법으로는 도저히 적 전차의 진출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제19연대장 민병권(閔丙權) 대령은 육탄공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특공대 편성에 착수했다. 잔류병력을 홍천초등학교 교정에 집결시킨 연대장 민병권 대령은 적 전차를 격파할 특공대의 긴요성을 강조한 후 조국의 존립과 민족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적 전차를 격파할 특공용사를 직접 선발하였다.
  1950년 6월 28일 22시 30여 명의 지원자 중 조달진 일등병을 포함한 11명의 자원병이 최종적으로 선발되었다. 이 특공대원들은 대부분이 일등병이었다. 북한군 전차에 대한 장·단점과 전차파괴요령을 설명받고 난 뒤 대전차 파괴무기로 81㎜ 박격포탄 1발과 수류탄 2개씩을 지급받았다.
  6월 28일 제2연대가 배치된 말고개 주변에 도착한 특공대원들은 이 곳에 배치되어 있던 대전차포 소대장 강도현(康道鉉) 중위로부터 적정에 대한 상황설명을 듣고 다음날 새벽에 적진을 향해 전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적에게 발견되어 일제사격을 받고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겨우 6명만이 남게 되었다. 조달진 일등병은 남은 5명의 대원을 이끌고 다시 적진 속으로 나아갔으나 먼동이 트기 시작하여 어쩔 수 없이 아군 진지로 되돌아왔다.
  다음날 08시 30분경 고지에서 포성이 진동하며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0900경, 마침내 제2연대가 설정해놓은 살상지대에 적의 주력이 완전히 진입하고 선두전차를 위시한 전차대열이 작은 말고개를 오르기 시작하자, 방어부대의 모든 화력이 살상지대로 집중됐다. 적은 예상외의 강력한 포화로 인해 순식간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전차와 보병이 분리되어 SU-76 자주포와 T-34 전차 등 10여 대가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을 가하면서 느린 속도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의 첫 번째 S자 굴곡지점에 배치됐던 57㎜ 대전차포가 포문을 열고 첫 탄을 명중시켰으나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속전차가 사격한 포탄에 맞아 포수 이하 전원이 전사하고 대전차포가 파괴되는 것을 도로변에서 목격한 병사들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으로 육탄공격을 주저했다.
  잠시 후 적의 전차대열은 고개 중턱에 있는 가장 굴곡이 심한 두 번째의 S자형 지점에 이르렀다. 선두에서 달리던 자주포가 굴곡지점을 미처 빠져나가기 전 30m쯤 떨어진 곳에서 제2연대 57㎜ 대전차포 중대 제2소대 1분대장 김학두(金學斗) 일등중사는 철갑탄을 사격해 자주포의 측면을 명중시킨 뒤 2탄, 3탄을 계속 발사했다. 첫 탄에 명중된 선두 자주포가 2∼3m 전진하다 정지하자 뒤따르던 전차가 자주포와 추돌하고 정지했다.
  2번 전차에도 철갑탄 공격이 이어졌다. 이때 도로변에 매복해 있던 제19연대 대전차특공대원 조달진 일등병이 1번 전차에 뛰어올라 해치 안에 수류탄을 넣고 뛰어내렸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선두전차 2대가 파괴되자 뒤따르던 전차들은 모두 정지할 수밖에 없었고, 호기를 포착한 대전차특공대는 제각기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를 공격했다. 당황한 적 4번 전차는 북으로 회전하려다 화양강으로 굴러 떨어졌고, 나머지 전차병들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살되었다. 후미전차는 전차대열이 정지하자 해치를 열고 전차장(戰車長)이 뒷면을 살피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약 10m쯤 떨어진 좌측 능선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전차 특공대가 발사한 2.36인치 로켓탄이 해치 안으로 들어가 폭발하면서 불길을 내뿜었다. 이리하여 10여 대의 적 전차는 좁고 굴곡이 심한 작은 말고개의 오르막길에서 섬멸되었다. 구체적으로 적 전차 2대를 완파하였고, 7대의 전차를 노획하였다.
  개전 이후 최대의 전차 격멸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대전차특공대는 육탄으로 적의 전차를 공격하는 용맹성을 발휘함으로써 연속되는 후퇴에 찌들어 있던 국군장병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빛나는 전례를 남기게 되었다.
  이는 국군장병의 사기를 드높임은 물론 전투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는가 하면 적은 전차를 투입하고서도 말고개를 돌파하지 못함으로써 진출이 지연되어 더욱 초조해졌다. 이 전투로 '적 제2군단은 28일까지 춘천-홍천-이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 서울을 포위공격하겠다'던 당초의 작전계획에 큰 차질을 빚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6·25전쟁의 승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출처:전쟁기념관>

 전쟁발발 3일 만에 서울이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간 반면, 춘천 홍천전투는 6·25전쟁 초기단계에서 한국군이 승리한 유일한 전투로 그 의미가 대단하다. 지금의 `말고개'에는 6·25전쟁 당시의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렇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기념탑이 어느 순간에 일반인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어릴 적에 길옆에 있어서 누구든 자유롭게 전적비를 볼 수 있었고 그곳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찾아가보니 기념탑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부대 담장 안에 기념탑이 보이고 담장 위로 철조망이 있어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
그래서 부대정문으로 가보았다. 그곳에는 예전에는 없던 탱크가 떡 버티고 있고 초병이 두 명이 지키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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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육탄용사기념탑에 일반인은 들어가 볼 수 없습니까?"
"예, 일반인은 관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부터 관람할 수 없게 되었고 또 저 담은 언제 생겼나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제가 입대하기 전에 있던 일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저 기념탑은 홍청군민들의 성금으로 만든 것인데 어째서 부대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일까?
그것은 아마 새로 4차선이 뚫리면서 구도로가 막히고 군부대를 넓히면서 전적비까지 부대 담 안으로 가두어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고두고 후세에 기념이 되기 위해 세운 탑이 오히려 일반인은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홍천에서 속초가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첫째 터널 들어가기전 오른쪽으로 보면 나무 사이로 기념탑이 보인다.
도로가 높아 기념탑이 다 보이는 것을 굳이 담장을 처놓고 철조망으로 가로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접근 금지와 사진촬영까지 금지한다는 푯말과 함께.......
이곳을 찾는 누구나 6.25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때의 영웅들을 기억하며 편하게 쉬어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본래의 기념탑 건립의 의미였었다. 이곳이 최전방도 아닌데 예전보다 더 삼엄하게 경비를 해야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허탕을 치며 되돌아오면서 옛날 어릴 적 기억속의 자유롭게 드나들던 전쟁기념탑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