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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가 된 친구의 모교를 둘러보다.

2008. 6. 17. 20:02여행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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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만나러 춘천에 갔다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 국도를 타고 느랏재와 가락재 터널이 있는 구성포로
가보기로 했다. 가다가 보면 구성포2리 마을이 보이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애국애향의 마을이라는 기념탑이다.독립 운동가였던 김규식 열사의 고향임을 알리는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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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였던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은 아버지가 동래부의 관리로 근무할 때 부산에서 출생하였지만 본적은 조부와 부친의 고향인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이다. 1896년 서재필이 설립한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며 국내외 정세에 대한 안목과 의식을 확대한 김규식은 다음해 미국으로 유학해 로녹대학에서 수학한 후 경신학교와 배재학당에서 민족교육과 민중 계몽사업에 힘썼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외무총장에 임명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전권대사로 참여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각국의 고위층에게 역설하였다. 192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고려혁명군조직에 참여하였으며, 1935년 난징에서 민주혁명당을 창당하여 구국투쟁에 열정을 쏟았다. 1944년 임정 부주석이 되어 해방이후 국내에 돌아와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으며, 1946년 미군정하 과도입법의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좌우 단일정부 수립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1948년 유엔에 의한 남한 단독총선거가 결정되자 통일정부수립을 위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김규식 선생이 아직도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1931년 사망한 김규식 선생은 신채호, 이상룡, 홍범도, 이상설 등과 함께 100년 가까이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남아 있다.
일제가 1912년 조선 통치를 위해 ‘조선민사령’을 공포했고,상당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광복 후 대한민국은 국적부를 따로 두지 않고 호적에 등재된 사람 모두에게 대한민국의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조차 얻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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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철문이 굳게 닫혀져있다 2007년 2월 마지막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가 된 후 이길을 통해 드나드는 주민을 위해 샛문을 열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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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25일 1952평의 부지에 개교한 이래 70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인구감소로 인하여 더이상 학생을 받지 못해 폐교된 화성분교의 전경 모습.
이곳에서 분교를 다니던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 씩 본교에 와서 수업을 받곤했는데 전교생이 12명이었다.
본교 학생들이 700여명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초미니 학교 였다.
교장선생님 훈시 하던 연단이 저렇게 작았었나?......훌쩍 커버린 지금 폐교가 된 학교는 너무나 작고 초라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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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놀던 철봉이나 정글짐에는 잡풀들만 무성하다 .이곳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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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이면 운동장 나무 그늘아래 앉아서 재잘거리던 의자에는 애기똥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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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기구 창고에 그려진 벽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의 꿈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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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가 되기 전에 아이들이 갖고 놀던 오재미가 운동장에 그대로 버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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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뛰어놀던 복도는 의외로 깔끔하다.옛날 그대로 나무 마루다...걸레에 들기름 묻혀 열심히 닦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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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 가장 우상시 했던 이승복 동상....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중학교 때 속사에 있는 기념관에 갔었던 생각이 난다...그때 교과서에 북한군인은 늑대나 이리로 표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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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네 집은 비어 있었다. 이곳에 닭을 키우면 날마다 알을 낳곤 했었다....지금 보니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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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교나 가면 꼭 볼 수 있있던  독서하는 소녀.....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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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효자 정재수 동상이 이곳에 있다.

1974년 1월22일은 구정(음력설)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날. 경북 상주에 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연일 계속 내려 쌓였고,
마침 중부지방에 폭설주의보가 내렸다
정재수는 아버지를 따라서 할아버지 댁에 설을 쇠기 위해 집을 섰는데.고갯길을 넘다가 아버지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쓰려져 정신을 잃자 정재수는 자기의 웃옷을 벗어 아버지의 몸을 덮어 주었다. 아버지는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둘은 결국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동사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와 아들은 꽁꽁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었는데, 정재수 어린이의 시체는 아버지의 시신을 덮고 있었다고 한다.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되는 어린이가 아버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이다..이일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교과서에도 실리고 영화화 되기도 했었다. 요즘 효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지는 요즘 다시한번 마음에 되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경북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효자 정재수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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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각 교재로 활용되던 것들이 그대로 버려져 있다. 학생들의 학교 생활에 대한 것이 담겨져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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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사진처럼 흐리하게 보이는 필름 속에는 아이들이 운동복을 입고 평균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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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양쪽에 있는 포효하는 사자와 호랑이....... 낡아서 부서져 초라한 모습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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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롭고 튼튼하게  ......탑은 낡아도 그 말은 언제나 가슴에 푸르게 살아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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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벽보가 그대로 붙여져 있고 그 앞에는 무성한 풀들이 자라고 있다.
아이들의 함성이 멎은 학교는 더 이상....꿈과 희망이 없다. 무성한 풀과 함께 낡아가는 폐교를 보면 친구와 졸업생들은 어떤 마음이 들까
모교는 사라졌지만 가슴에는 언제나 즐겁고 유쾌한 기억만 남아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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