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빈의 유혹에 빠진 세종의 아들 문종

2008. 4. 29. 16:32카테고리 없음

세종을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어떤 사람일까?....문종 어릴 적 향이라 불렸는데
 8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후 37살에  왕위에 오른 후 2년만에 병사한 문종은 아버지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 태어난 첫째 왕자로 왕세자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성균관에 입학례를 치뤘고
 그곳에서당에서 [소학제사]를 읽었다고 세종실록에 전한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해 천문과 역산, 언어, 서예 등에 뛰어났고 성격은 유순하고 자상했으며,
거동에 기풍이 있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난받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한다.
자신이 비록 학문적 실력이 뛰어나도 학자들과 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좋은건 받아들였으며,
 아버지 세종처럼 여러 사람들을 거 느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역사는 평하는데 그가 오랜동안 왕세자
 수업을 받고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죽은 직접적인 사인은 종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를 들여다보면 첫째 빈인 휘빈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이 엿보인다.
어려서부터 병약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걱정한 세종은 세자의 나이 열 살 때
상호군 김오문의 딸을 취하여 휘빈이라 칭하였다고 한다.세자를 잘 보필하라고 들인 휘빈은 나이가
 20에 가까워 한창 무르익은데 반하여 나이 어린 세자는 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휘빈은 세자를 유혹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
"세자마마,봄이 되면 산에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옵니다.소녀의 몸에도 봄이 온듯 하오이다"
하며 세자의 춘정을 충동하면 피동적을 하자는 대로 맡겨두었다고 한다.
동궁 후원에는 봄이 되면 앵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것은 부왕 세종이 앵두를 좋아했기 때문인데
앵두가 익으면 세자가 직접 따가지고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맛이 매우 좋구나 세자가 손수 심어 부모에게 바치니 그 효성이 지극하다 왕후에게도 바치고 여러
동생과 휘빈에게도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세자는 시키대로 여기저기 나눠주고 저녁에는 휘빈 처소라 가지고 갔다고 한다.그러면 휘빈은
"동궁마마,어쩌면 이렇게 앵두가 곱게 잘 익었습니까, 마치 부풀어 오른 처녀의 가슴 같습니다."
라며 세자를 유혹하곤 했다고 한다.
시도때도 없이 세자를 불러들이려고 곱게 빗은 휘빈의 머리에서는
중국서 들여온 향긋한
밀기름 냄새가 났고 옷이 펄럭일 때 마다 젊은 육체가 풍겨주는 짙은 사향 냄새가 세자를
황홀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휘빈은 무서운 여자로구나 한번만 감기면 좀처럼 놓지 않는 뱀같이  내 몸을 휘휘 감고
자기의 욕망을 출고야 마는구나 이러고도 내가 몸을 제대로 지탱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알면서도 휘빈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집현전의 학자 태자부의 첨사를 겸한
탁신과 최만리등은 임금께 상주했다고 한다.
근래 세자가 여색에 빠진 듯합니다 ,동궁에서 글 읽기를 싫어하고 너무 자주 휘빈의 처소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세종은
"세자는 이 나라를 계승할 사람이다 후궁에 빠지면 못쓴다"
라고 타일렀지만 한번 빠진 세자는 헤어나지 못하고 휘빈은 세자를 자기 처소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그러자 점차 신경이 쇠약해진 세자는 학문까지 전폐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읍소하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휘빈은 동궁비의 자격이 없습니다. 음탕한 생활을 계속해서 장차 나라일이 근심스럽습니다."
이에 세종은 마침내 휘빈을 쫓아내도록 명하하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에서는 이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자향이 자신을 기피하며 관심을 가지지 않자 휘빈 김씨는 남자의 마
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압승술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중 한 가지가
'두 마리의 뱀이 교접을 할때 흘린 정기를 수건으로 닦아서 차고 있으
면 반드시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세종실록 1429년 7월 20일]

또한 세자 향이 좋아하는 여자의 신발 뒷굽을 잘라다가 불에 태운 재를
술에 타 마시게 하거나, 이 밖에도 마초라는 풀을 먹고 자란 나비를 말
려서 차고 다니기도 하고, 붉은 박쥐 가루를 사용하는 등 세자빈의 체
면도 무시한 채 해괴한 비방을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이
러한 행위들로 보아 결국 세종과 소헌왕후에게 들키고 말았다.

세종은 종묘에 가서, '맏며느리가 덕을 잃어 세자의 배필이 될 수 없습
니다. 대의를 위하여 사사로운 은의를 끊고 폐빈을 고유하오니 밝게
살피소서"라고 폐빈 사실을 고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세종실록 1429년 7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