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전상국 단편소설 감상하기

2008. 2. 26. 11:09마음의 양식 독서

우상(偶像)의 눈물

전 상 국

학교 강당 뒤편 으슥한 곳에끌려가 머리에털나고처음인그런무서운 린치를 당했다. 끽소리 한 번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다. 설사 소리를 내질렀다고 하더라도 누구 한 사람 쫓아와 그 공포로부터 나를 건져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였고 도서실에서 강당까지 끌려가는 동안 나는 교정에 단 한 사람도 얼씬거리는 걸 보지 못했다. 더우기 강당은 본관에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주 까마이득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재수파(再修派)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무언극을 하듯 말을 아꼈다. 그러나 민첩하고 분명하게 움직였다. 기표가 웃옷을 벗어 던진 다음 바른손에 거머쥐고 있던 사이다 병을 담벽에 깼다. 깨어져 나간 사이다 병의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그의 걷어올린 팔뚝에 사악사악 그어 갔다. 금간 살갗에서 검붉은 피가 꽃망울처럼 터져 올랐다. 기표가 그 팔뚝을 내 눈앞에 들이댔다. 핥아! 기표 아닌 다른 애가 말했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비키자 곁에 둘러선 서너 명의 구두 끝이 정강이에 쪼인트를 먹였다. 진뜩한 액체가 혀끝에 닿자 구역질이 났다. 오장이 뒤집히듯 역한 것이 치밀었다. 나는 비로소 온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나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거센 공포로 해서 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비벼댔다. 그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 바지에서 혁대가 풀려 나간 다음 벗겨져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에 칼끝이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이 왔다. 나는 그들에게 양쪽 겨드랑이를 잡힌 채 몸부림쳤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칼끝은 상당히 오랜 시간 허벅지에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살 타는 냄새를 맡았다. 칼침이 아니라 그들은 담뱃불로 내 허벅지 다섯 군데나 지짐질을 했던 것이다. 소리질러 봐, 죽여버릴 거니, 한 놈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드디어 허물어져 내리듯 의식을 잃어 갔다. 그런 몽롱한 의식 속에서 기표가 씨부려 댄 한 마디 말소릴 놓치지 않았다.


- 메시껍게 놀지 마!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이 내게 린치를 가한 이유란 단지 그것이었다. 2학년 재수파들이 나를 첫 표적으로 삼은 것은 내가 그들 눈에 메스껍게 보였기 때문이다. “유대야, 너 그대로 참을 꺼냐?” 분식집에서 만난 형우가 슬쩍 내 심중을 떠보고 있었다. 내가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는데도 그 소문은 파다했다. 소문이 쉬쉬 떠도는 며칠 동안 나는 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그 소문이 학교 선생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생길 경우 십중팔구 나는 결딴이 나고 말 것이다. 기표는 그런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아이였다. “그 새낀 악마다”

형우가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충동질했다. 그러나 나는 대답없이 빙그레 웃어 보였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해 보였다. 그것은 이미 겪은 우월감 같은 오만감이었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형우의 눈에서 자기도 미지에 당해야 하는 두려움과 아울러 내게 대한 선망이 깔려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형우가 기표에게 당할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것은 기표와 같은 배에 오른 우리들의 공동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 날 편반이 끝나고 키 크기에 따른 각자의 번호와 교실 좌석까지 다 정해졌을 때 새 담임이 된 김선생이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66명이 운명을 함께 하는 역사적 출항을 선언한다.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단 한 사람의 낙오자나 이탈자가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아울러 이 시간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우리들의 항해를 방해하는 자, 배의 순탄한 진로를 헛갈리게 하는 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나무를 전정할 때 역행 가지를 잘라버려야 하듯 여러분의 항해에 역행하는 놈은 여러분 스스로가 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1년간의 일사불란한 항해를 위해서는 서로 사랑과 신뢰로써 반을 하나로 결속하는 슬기를 보이는 일이다”


새 담임선생은 과학교사답지 않게 적절한 비유로써 자기가 맡은 반 아이들에게 뭔가 불어넣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사안일 속의 1년이었던 것이다.

“고삐는 여러분 손에 쥐어져 있다.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그 고삐를 당겨 여러분 스스로를 제어해 주기 바란다. 내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여러분 스스로가 내 손에 그 고삐를 쥐어주는 일이다. 나는 자율이라는 낱말을 좋아한다”

담임선생님은 자율이라는 낱말로 요술을 부려 우리들을 묶고 있었다. 어느 연극잡지에서 완숙한 연출가는 배우 스스로가 연출하도록 유도하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읽은 것이 생각났다. 대단한 담임을 만났다는 기대로 아이들은 가슴을 부풀이며 앉아 있었다. 14개 반에서 사오 명씩 떨어져 나와 새로이 편성된 새 반의 분위기는 사뭇 숙연했다. 나는 문득 이런 숙연한 분위기가 우습게 생각되었다. 단 며칠 못 가 형편없이 허물어질 아이들이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앉아 담임선생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게 우습게 보였던 것이다. 이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선생님, 우리가 탄 배의 선장은 누굽니까?”

내가 불쑥 일어나서 말했다. 선장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자율이라는 낱말로 우리를 묶으면서도 실상 우리들 머리 위에 군왕처럼 군림하고 싶은 그의 저의를 찔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내 느닷없는 질문에 부스럭부스럭 굳은 몸을 풀고 있었다.

“이 배의 선장이 누구냐, 그렇게 묻고 있는 사람의 번호와 이름은?” 담임이 얼굴 가득 미소를 잡으며 여유있게 나를 훑었다. 반격을 당한 나는 얼굴을 붉히며 엉거주춤 다시 일어나야 했다.

“35번 이유댑니다” “예수를 판 유댄가, 이스라엘 유댄가?”

아이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오얏 리, 옥유, 큰 댓자, 이유대입니다”

“좋았어. 이유대군이 오늘 이 시간부터 일주일간 2학년 13반의 임시 선장이다. 물론 일주일 뒤에는 새 선장을 뽑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해 두겠다. 이 배의 주인은 여러분 자신이다. 이유대 선장, 내 말의 뜻을 알겠나?” 아이들이 와하하 웃으며 박수를 쳤다. 반장하고 싶어 몸살 난 애라구요. 그렇게 소리지르는 놈도 있었다. 실로 난처한 입장이 돼버렸다. 한낱 농으로 시작한 일이 담임의 임기응변에 의해 꼼짝없이 임시 반장 감투를 쓰게 되었다. 꽁무닐 빼고 어쩌고 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담임은 첫 만남을 끝냈다. 이렇게 해서 된 임시 반장이 기표의 비위를 사납게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것이다. “어떤가, 약 일주일간 반장을 하면서 느낀 우리 반에 대한 소감은?” 담임선생이 가정방문을 나왔다.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과 집에서 만나는 선생의 이미지는 전연 다르게 마련이다. 학교에서보다 훨씬 부드럽게 대해주는데도 공연히 거북스럽고 몸이 찌부러든다. 그래서 우리들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담임선생에게 가정 방문을 당한 뒤로는 독빠진 뱀처럼 맥을 쓸 수 없게 된다. 가정방문을 나온 담임선생은 대개 여러가지 정보를 얻어내려 부심하게 된다.

“얘네 반 아이들의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났다고 좋아들 한답니다”

곁에서 엄마가 의례적인 아부의 말을 했고 담임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못 들은 척했다. 사실 아이들은 좋은 선생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다. 좋은 선생이란 조건없이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한 다음 그것을 가볍게 입밖으로 내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때, 유대가 그대로 반장을 맡는 게?”

이번에는 담임이 엄마의 귀를 겨냥한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전 그런 일이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내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고 엄마가 거들었다.

“그래요 선생님, 얜 반장하는 게 죽어두 싫다는군요”

뭔가 아쉬워하면서도 엄마는 내 뜻을 따라 주었다. 반장을 하면 성적이 떨어지게 마련이란 내 생각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남 앞에 나서는 일, 남들보다 한 발짝 높은 데 선다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번거로운 일인가를 나는 엄마의 극성에 의해 중학교 3년간 반장을 하면서 절실히 체득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게 무서운 구속이었다. 남을 다스리는 그런 자유보다 남에게 다스림 받는 데서 얻는 마음의 안일이 내게는 더 좋았다. 나는 고독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기표 같은 애들이 누리는 지배욕 그 안쪽에 몸을 뒤틀고 있는 고독의 그림자를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본 것 같았다.

“맞습니다. 사실 유대는 반장을 하는 것보다 공부에 달라붙는 게 더 좋을 겝니다. 아깝지만 유대를 위해서 제가 양보할 수 밖에요”

우리의 담임선생은 일을 요령있게 풀어나가 재치있게 마무리하는 명수였다. 아뭏든 나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담임 선생의 논리대로라면 누군가 내 대신 희생이 되어야 한다.

“임형우, 걔가 반장으론 괜찮지?”

일주일 동안 그는 우리들을 상당히 깊게 파악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안목은 대단했다. 반장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를 알고 있는 담임이었다. “형우라면 틀림없읍니다” 내 말의 꼬리를 잡아 엄마가 껴들었다. “형우라니? 오매, 형우하고 또 한 반이 됐냐? 선생님, 얘하고 형우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랍니다. 걔하고 늘 전교에서 일 이등을 다튔는걸요. 그룹 과외도 같은 데서 죽 함께 해 왔고…… 우리 유대가 늘 앞선 편이긴 했지만…… 그래요, 걘 반장 같은 건 잘할 거예요. 얘가 통솔력이 보통이 아녜요”

중학교 3년 동안 아들에게서 위대한 통솔력이 나타나 주기를 고대했던 엄마의 푸념이 깃든 말대로 형우는 반장이 될 만한 여건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무게가 있고 때로는 교만하고 생각한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해 내는 결단력도 대단했다. 학교 당국의 지시에는 일단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임하다가도 어떤 결점이 보일 때는 무섭게 반격을 가하는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어떤가, 우리 반에 크게 문제가 될 만한 애는 없겠지?”

첫 만남에서 담임이 말한 우리들의 항해에 방해가 될 만한 그런 역행가지를 귀띔해 달라는 것일 게다. 나는 불현듯 담뱃불에 지짐질당해 아직도 진물이 줄줄 흐르는 내 허벅지를 내보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어쩌면 담임도 내 입에서 기표에 대한 얘기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1학년 때의 기표 담임이 기표가 1학년 때 한 번 유급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얘길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엄마 앞에서 반우를 매도하는 일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기표, 그놈 괜찮을까?”

담임선생이 조심스럽게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내 허벅지의 상처를 내보인 것처럼 불유쾌한 기분이 되어 얼굴을 돌렸다.

“최기표라면 그 1학년 때 낙제해서 한 해 묵었다는 애 말이구나?”

엄마는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알고 싶어 안달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담임선생한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러나 엄마는 가장 가까운 데 있는 내 허벅지의 담뱃불 자국을 알지 못하고 있다. 최기표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최기표가 어떤 아이인지를 진정 모르는 어른들에 대해서 내 상처를 내보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맞습니다. 걘 유급한 것도 문제지만 보통 말썽꾸러기가 아니지요. 왜, 한 눈에 이건 범죄형이다, 그렇게 보여지는 얼굴이 있지 않습니까. 걔가 바로 그런 전형적인 범죄형이지요. 음침하고 포악스럽고…… 1학년 때 걔 담임을 한 선생이 그러더군요. 십년감수를 했다구요. 그러면서 나를 동정한다는 얘기였어요. 그 정도면 알쪼가 아닙니까”

“그런 애가 어떻게 여태 퇴학을 안 당했나요. 교칙이 엄하기로 이름난 학교인데……”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얼굴에 그늘을 깔았다.

“바로 그겁니다. 이놈이 원래 교활하고 지능적이어서 도대체 제적을 당할 만한 큰 일에는 직접 앞에 나타나지 않고 뒤로 쑥 빠진다 그겁니다. 엉뚱한 놈이 당하곤 하지요. 정학을 몇 번 당하긴 했지만 어떤 결정적 꼬투릴 잡을 수 없으니까 제적을 못 시키는 거지요” 기표가 무서워서, 그의 안하무인한 앙갚음이 두려워서 제적을 못 시켰다는 그런 얘기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기표에 대해서 이처럼 깊이 파악하고 있다니---과연 기표는 이름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기표 얘기를 입에 올리는 담임은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나는 문득 이제부터 1년간 담임선생과 최기표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질 싸움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까지의 결과로 미루어 보아 최기표에게 승산이 크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의 담임선생 또한 그렇게 만만치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 싸움에 임형우도 한몫 끼어들지 모른다. 그가 어떤 편에 서느냐 하는 문제도 퍽 흥미있는 문제일 것이다. 아뭏든 이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그네들 싸움을 구경한다는 것은 진정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놈들이 옛날과 달라서 선생을 우습게 알기 때문에…… ”

담임선생은 엄마와 함께 교육론을 펴고 있었다.

그랬다. 슬픈 일이지만 우리들은 언제부터인가 교사들을 한낱 껄끄러운 존재로 여길 뿐 오히려 그룹 과외선생의 완벽함에 더 매료되곤 했다. 그것은 상대적이었다. 우리들의 교사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처럼 교사들도 우리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룹 과외선생처럼 철저하게 얼굴에 철판도 깔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문제는 지배(支配)에 대한 견해의 다름이었다. 그네들이 옛날 훈장이 누렸던 권위가 고스란히 쥐어주길 바랬고 실상 그러한 권위만이 변화된 가치 속에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러한 인습적 권위에 대해서 코방귀를 날릴 수 있을 만큼 그보다 더 완벽하고 조직적인 분명한 권위의 다스림 속에 몸을 맡기길 좋아하고 있었다. 그 한가지 예로 우리 엄마는 촌지 봉투로 담임선생을 움직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그 기표라는 얘네 집에 가 보셨어요?”

무슨 얘기 끝인가 엄마가 물었다.

“아직 못 갔읍니다. 1학년 때 담임들도 걔 부모를 못 만났다더군요. 놈이 중간에서 훼방을 놓은 거지요. 한양천 뚝방동네에 살고 있는 건 틀림이 없는데 번지를 제대로 알아도 집 찾아내기가 어렵다더군요. 어떤 애 얘기론 기표 아버지가 중풍으로 들어누운 폐인이래요”

담임선생은 우리 집 방문을 끝내고 다른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내게 말했다. “유대, 네 도움이 필요하다” “뭘 말입니까?”

“우리 반을 위해서 네 협조를 받고 싶다는 얘기다. 물론 나는 네가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고자질하는 그런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반 전체를 위한 너의 조언이다. 어때 협조해 줄 수 있겠지?”

나는 얼굴에 열기가 끼쳤다. 이것은 치욕이었다. 담임은 나를 자신의 첩자로 삼으려는 것이다. 1학년 때도 그랬다. 나는 담임선생이 원하는 대로 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임에게 알렸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역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시치미떼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었다. 아이들 자신을 위해서 내가 이바지했다고 하는 자부였다. <우리>를 위해서 내 힘이 쓰여지고 있다는 기꺼움 때문에 나는 그러한 고자질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어수룩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아이들에게 따돌림받았다. 나는 한낱 <우리>의 힘을 해치는 담임의 첩자였을 뿐이다. 나를 이용해 먹은 담임이 그 사실을 새 담임에게 인계하는 배신을 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나는……”

내 표정이 꽤 굳어 보였던 모양이다. 담임선생은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다만 나는 인간적인 면에서 네 도움이 받고 싶었을뿐이다”

“선생님, 그런 일이라면 임형우가 잘 해줄 겁니다. 선생님이 염려하는 최기표도 형우가 잘 다스려 나갈 겁니다. 내일 당장 형우를 반장에 임명하세요”

“그럴까? 네 말대로 임형우가 최기표를 잘 다스려 준다면 고맙겠지만…… 내 생각엔 최기표를 부반장에 임명하면……”

“선생님, 기표 한 개인을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기표의 힘을 빼어 반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까?”

담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내 얼굴을 뻔히 치어다보다가 음모의 한 귀퉁이를 드러내 보인 무안감을 감추기라도 하듯, “여러 사람에게 해가 되는 그런 힘은 아예 빼어버리는 게 좋은 거다”

기표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것에 있는지도 모르는데요--이렇게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다. 그 대신,

“선생님, 기표는 유급생인데다 여러 번 정학을 당했잖아요. 그런 아이를 간부로 임명하면 아이들이 좋지 않게 생각할 겁니다”

기표가 학교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교단 위에 서서 아이들한테 애원하는 광경은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누가 사자를 울 속에 넣어 길들이는 발상을 처음 했는가. 나는 내 허벅지의 상처를 결코 격하시키고 싶지 않았다.


춘계 교내 체육대회를 위해서 우리는 정해진 체육복 외에도 마스게임용 추리닝 한 벌을 사야 했다. 협동심과 조화 속의 미를 창조하는 데 그것은 없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툴툴거리는 아이도 몇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들도 그것을 모두 준비했다. 그러나 우리 반에 단 둘뿐인 재수파들은 끝내 그것을 사 입지 않았다. 담임이 말했다. “두 사람 때문에 반의 일사불란한 결속이 깨질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집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담임이 두 사람 것을 준비했다. 받아주면 고맙겠다”

한 아이가 기표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그러나 기표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임선생이 그 추리닝을 기표와 또한 아이의 책상 위에 놓은 다음 교실을 나갔다.

담임선생이 교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기표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그 추리닝을 찢기 시작했다. 너덜너덜 조각난 추리닝을 쓰레기통 쪽으로 던졌다. 다른 한 아이가 기표처럼 그렇게 추리닝을 찢었다. 기표가 반의 총무를 맡고 있는 정수라는 애한테 다가갔다.

“야, 네 추리닝 나 줄 수 없냐?”

정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수 뒤의 애한테도 같은 말을 했다.

“쟤도 나처럼 돈이 없어 못 사 입었다. 네꺼 좀 얻자. 줄래?”

정수 뒤에 앉은 애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 반 66명은 마스게임용 추리닝을 다 사 입었다.


우리가 볼 때 기표는 구제불능이었다. 그의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보기보다 선천적인 어떤 포악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냉혈동물처럼 피가 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뱀처럼 작고 징그러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활한 자들이 가끔 보이는 그런 거짓 착함마저도 나타나 보일 줄 몰랐다. 철저하게 악할 뿐이었다. 평생을 두고 사랑이라는 낱말로 미화될 수 있는 행동거지를 해 보일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물론 그는 자신의 그런 포악성 때문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표정은 항상 독기를 음울하게 깔고 있어 맞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학교 때부터 기표를 알고 지내온 아이들(대부분 3학년이거나 졸업했다)은 기표가 그처럼 철저하게 나쁜 애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애라고 말하는 일도 없었지만 아무도 기표를 욕하지 않았다. 피해를 직접 받은 애들마저도 기표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길 꺼려하는 거야. 악에 대한 공포 때문이지.

나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이 옳지 않음을 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기표에 대한 공포는 그에게 린치를 당할 때뿐이었다. 내가 린치를 당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것은 앙갚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또한 그처럼 무자비한 린치를 당했으면서도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헤아릴 수 없는 힘이 그에게 있는 것 같았다. “형!” 동급생이면서도 우리들은 2학년에 재학하는 유급생 20여 명을 꼭 공대했다. 재수파들이 그렇게 대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공대하면서도 입이 껄끄럽지 않은 것은 재수파를 이끌고 있는 기표의 위력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 체육복 좀 빌려 줘라”

재수 없는 아이가 유급생인지 모르고 말을 함부러 놓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럴 때 그 아이는 영락없이 얻어터졌다. 일의 특징을 따지지 않는 게 기표가 행하는 악의 특징이었다.

- 명칭, 조직의 목적, 모임의 횟수를 모두 대라구!

교실에서의 집단 구타 사건으로 그들이 걸려들었을 때 학생주임은 전말서를 내밀며 소리쳤다. 기표들은 1학년 때부터 음성 써클로 지목되어 수차례 조사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주임은 번번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나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재수파는 우리들이 편의상 붙인 이름이었을 뿐이다. 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목적이나 정기적인 모임 같은 게 없었다. 동물 영화를 보면 밀림을 달리는 맹수 떼들은 한 리더를 중심해서 같은 방향으로 달려간다. 그들도 그랬다. 그냥 기표를 중심해서 그들은 모였고 계획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우발적인 악이 그들에 의해서 저질러졌을 뿐이다.

기표는 교실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의 담배 은닉처는 고호의 자화상이 있는 액자 뒤쪽이었다. 쉬는 시간이면 그는 액자 뒤쪽을 더듬어 담배를 꺼냈다. 미션 계통의 학교라 일주일에 몇 번씩 있는 채플 시간을 통해 교목이 인간 양심의 타락을 개탄했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기표는 주번을 대신해서 교실에 남아 담배를 피거나 아이들 도시락을 먹어 버리는 일을 했다. 그는 적어도 하루 두 개의 도시락을 축냈다. 아무도 그것을 항의하지 않았지만 기표 또한 미안해하는 표정이나 사과의 말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기표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학교 골목을 절뚝거리며 나오던 그 고통스럽고 긴 시간 내가 생각한 것은 기표야말로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악마의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얘기가 통할 만한 집안의 어떤 형에게 말했더니 그가 대답했다.,

- 맞아. 신이 매우 거북하게 생각하는 악마란 바로 네가 말한 놈처럼 착함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순수한 악마지.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속으로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그것을 이용할 뿐이야.


5월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 오후 반장인 임형우가 드디어 재수파한테 당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처럼 근본이 포악한 기표마저도 형우의 얘기라면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그처럼 형우는 모든 아이들의 인심을 살 줄 알았다. 형우의 성실성이, 남을 위해 자기를 던질 줄 아는 의협심이, 그의 천성적으로 착하게 보이는 외모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다른 반 선생들의 호감을 샀다. 형우는 특히 기표에게 잘 해주었다. 아우가 형을 대하듯 스스럼없이 사랑해 주었다. 그렇다고 기표에게 특혜를 얻어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유독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다른 아이들이 기표에 대해 갖는 그런 공포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5월 고사에 이르러 형우가 결정적 실수를 했다. 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형우가 반에서 성적이 괜찮은 몇몇 아이를 모았다. “두 사람을 조금씩 도와주자” 그가 제의했다.

“이번 시험을 잘 못 보면 또 낙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나쁜 낙제 제도 때문에 그들이 구제불능의 상태에 놓이도록 방관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물론 공부를 잘 못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으로 그들을 추궁하기에는 그들이 너무 한심한 상태의 아이들이다”

“결국 동정하자는 거군” 어떤 아이가 말했다.

“인간을 구제한다는 것은 값싼 동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투고 싶지 않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돕자는 거냐?”

먼저 아이가 물었다. “조금씩만 돕자” “결국 부정 행위를 하란 말이냐?” “그렇다. 커닝이 교칙에 위반된다고 해서 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다. 나는 다만 너희에게 부탁했을 뿐이다”“걸렸을 때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내가 시켜서 했다고 해라”

우리는 형우의 단호한 어조에 감명받았다.

“걔들이 우리들의 도움을 거부하면?” 어떤 애가 그런 우려성을 내놓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4월 고사에서 내가 약간 시도해 보았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다”

나는 형우의 눈꼬리에 매달린 교활해 뵈는 웃음을 보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냐? 기표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냐?” “유대, 네 말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답을 않겠다” “대답해라. 대답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내가 빈중거리는 투로 다그쳤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옳은가는 네 자신이 생각해도 된다” “네 의협심을 존중한다”

내가 간단히 손을 들어버리자 형우가 당연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이왕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이 일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최소한 반장인 내가 기표의 환심을 사려는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라. 마지막으로 부탁할 것은 이 일이 내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결 기표가 모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형우의 말을 믿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얘기도 그의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4월 중순께 기표가 3학년 형을 구타한 일로 벌을 받게 됐을 때 학급 전원이 서명해서 기표를 구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처럼 우리는 형우의 지시에 따라 세심한 계획을 짜고 시험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무슨 과목은 누가 어떤 방법으로 도와준다는 등 그들이 또다시 유급하지 않을 정도의 점수를 올리기 위해 우리들은 빈틈없이 준비했다. 남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마음에 이다지 큰 기꺼움을 준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3일간 계속되는 중간고사 첫날이었다. 기표와 대각으로 앉게 된 정수가 자리의 이점을 이용해서 답안지를 바른쪽 허리께로 내리밀어 기표가 보기 좋게 해 주었다. 첫시간에 기표가 정수의 그러한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퇴장할 수 있는 30분이 되자 제일 먼저 답안지를 놓고 나갔을 뿐이다. 시간이 끝나고 답안지를 거둔 아이의 말에 의하면 기표의 답안지는 거의 백지에 가까왔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둘째 시간은 영어였다. 총무를 맡은 애가 시간 중간쯤에 문제 번호와 답을 쓴 커닝페이퍼를 몇 사람 손을 거쳐 기표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기표가 벌떡 일어나 감독선생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떤 새끼가 이걸 나한테 전해 왔읍니다”

그는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한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제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사방을 휘이 적의 깊게 노려봤다. 악한 자의 간특한 미소가 입가에 고물고물 기어다녔다.

감독으로 들어온 선생은 마음 너그럽기로 이름난 영어교사였다. 그는 기표가 내놓은 종이쪽지를 한참 들여다 본 후에 말했다.

“누가 이런 메모지를 지금 저 학생한테 전달했나?”

문제 풀기에 여념이 없던 아이들이 한번씩 고개를 들었다간 다시 문제로 돌아갔다. “누군가?”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떤 개새끼야?” 이번에는 기표가 자리에 앉은 채 으르렁거렸다.

“선생님, 제가 그랬읍니다” 반장인 임형우가 벌떡 일어섰다. 감독선생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아닙니다. 그건 제가 썼읍니다” 불쑥 딴 자리에서 또 한 애가 일어섰다. 총무를 맡아보는 애였다. “아닙니다. 제가 그랬읍니다”

다른 아이 하나가 또 일어섰다. 함께 모의를 했던 아이 중의 하나였다. “접니다” 또 다른 놈이 일어섰다. 접니다. 접니다. 사방에서 우루루 아이들이 일어섰다. 허, 허허, 허허허……감독선생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기표의 얼굴이 노오랗게 질렸다.

“자, 모두 앉아요” 감독선생이 뭔가 사태를 파악한 듯 이삼십 명의 아이들을 자리에 앉도록 지시했다. 아이들이 다 자리에 앉은 다음, 그 나이 많은 감독선생이 말했다. “오늘 이 일은 전연 없었던 것으로 해 두기로 한다. 아주 훌륭한 사람들이 모인 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이쪽지를 가지고 나왔던 사람의 곧은 정신이나 우정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준 여러분 모두의 결의는 대단히 훌륭했다” 일은 이런 방향으로 매듭지어졌다. 그 시간이 끝나자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기표를 살폈지만 그는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끝 시간인 세째 시간도 별일없이 끝났다. 종례가 끝나고 청소 시간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다.

“유대야, 담임이 아까 오라고 한 사람 빨리 교무실로 오래”

한 애가 내게 말을 전해 왔다. 종례가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가던 담임이 복도에서 나를 불러내어 청소가 다 끝난 뒤 나와 반장 그리고 정수를 교무실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함께 교무실로 가려고 찾으니 반장도 정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운동장으로 내려서는 계단 휴게실까지 가 보았다. 거기도 그들은 없었다. 교무실에 먼저 가 있겠거니 하고 계단을 올라서는데 정수가 학교 후문있는 데서 뛰어오면서 손짓하고 있는 게 보였다.

“반장은 어디 갔나?” 담임선생은 그날 끝낸 화학시험지의 답안지를 정리하면서 건성으로 물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저희들만 왔읍니다” 나는 정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곁에 선 정수의 숨소리는 아직도 고르지 않았다. “응, 됐어, 너희들 둘이 해도 되겠지”짐작했던 대로였다. 우리는 담임선생님의 채점기계로 호출된 것이다. 답안지를 든 담임선생님을 따라 우리는 화학실로 올라갔다. “나 화학실에 있다고 사환애한테 알려뒤라. 밖에서 전화올 게 있다” 복도에서 담임이 말했다. 내가 아래층 교무실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들 사이에 넙찍이라고 불리는 사환 계집애가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님 화학실에 계셔. 무슨 일 있으면 그리 연락하라고!” 넙쩍이가 고개를 들지 앉은 채, 알았어---했다.

우리는 담임선생님과 함께 아이들의 답안지에 ○×해 나갔다. 맞은 것 틀린 것, 좋은 답 나쁜 답, 착한 놈 나쁜 놈…… 우리들이 동그라미 하나 더 치면 그 아이는 5점이 올라갈 수 있었다.

“야, 느덜 오늘은 속도가 느리구나”

담임의 말이 사실이었다. 우리는 다른 때와 달리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정수나 나나 매한가지였다. 정수는 눈에 띄게 허둥거리고 있었다. 나 역시 답안지의 내용이 자꾸 헛갈렸다. 적어도 일곱 명쯤의 재수파들 속에 형우가 무릎을 꿇고 와들와들 떨고 있을 것이다. 명치를 찌르는 주먹, 정강이뼈를 겨냥한 구둣발 세례, 피가 꽃망울처럼 솟아오르는 기표의 팔뚝, 허벅지를 태우는 살 냄새…… 하나, 두우울, 세에-엣, 네에-엣, 다아…… 아악. 소리질러 봐, 죽여버릴 거니! 석공이 돌을 다듬듯 완벽한 솜씨로 그들은 형우의 육체와 영혼을 주장질시키는 일에 탐닉하고 있을 것이다. 형우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수가 담임에게 일러바쳐 지금쯤 자기를 구원해 주러 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죽기를 각오하고 그들에게 도도한 자세를 보일 것인가, 나는 짐짓 정수의 눈을 찾았다. 나를 바라보는, 정수의 눈이 애원하듯 타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네가 말해! 그런 뜻의 눈짓을 내가 보냈지만 목덜미를 더욱 벌겋게 달구며 고개를 꺾었다.

“너희들이 잘해 주어서 올해는 퍽 수월하게 넘어갈 것 같구나”

담임선생은 채점을 쉬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반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잘해 주는 것 같단 말이야. 느이들이 아다시피 우리 반이 2학년 전체에서 제일이거든. 지난 춘계 체육대회 때 종합 우승이며 이번 이사분기 납부금 실적도 단연 으뜸이고……”

나는 실소하며 정수의 눈을 찾았다. 그러나 정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직 한 권에서 반도 넘기지 못한 채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실소했다. 담임선생이 지금 형우가 처하고 있을 상황을 안다면 어떤 표정으로 바뀔 것인가.

“참 알 수 없는 일은 최기표가 듣던 것과는 달리 양처럼 순하다 그거야. 몇 번 말썽이 있긴 했지만 그까짓 거야 별 거 아니지. 어떻든 그놈도 본성은 착한 놈인데 가정 형편이 못한가 보더라”

담임선생은 자기가 부리는 채점기계의 묵묵한 작업에 눈을 보낸 채 자못 흐뭇한 표정이었다. “다 담임선생님께서 잘 지도해 주신 덕분이죠 뭐” 내가 시치미를 떼면서 말하자,

“아닌게 아니라 나로서도 그 동안 너희들이 이해 못할 애로사항이 많았다. 인간을 교육한다는 것이 새삼 어렵다는 걸 깨닫게 됐고, 또한 그런 어려움 속에서 교육하는 보람도 얻을 수 있었던 거지”

정수가 비로소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마에 번지르르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알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는 몹시 괴로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형우가 재수파들한테 끌려 학교 뒷산 으슥한 곳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내게 전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사실을 나한테 얘기한 것을 몹시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면 담임선생한테 그 사실을 쉽게 알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자신의 판단이 빗나간 데 대한 당혹감으로 그는 떨고 있는 것이다. - 임마, 느덜이 생각한 것처럼 난 담임선생님의 첩자가 아냐. 나는 다시 정수의 눈에 맞춰 눈싸움을 벌였다. 정수는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이 녀석이 발광을 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학년 때 나는 해중이란 아이가 기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일을 알고 있었다. 그 애 역시 재수파였다. 다섯 놈이 캠핑을 나가 여학생 하나를 결딴냈다. 피해자 측에서 사생결단하고 덤벼 일이 크게 번졌다. 당한 애가 인상을 말했기 때문에 범위는 대번 좁혀져 재수파들이 학생부실에 불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한사코 잡아뗐다. 하루 내내 족쳐도 헛일이었다. 여학생과 대면을 시키겠다고 해도 만나게 해달라고 날뛰었다. 그때 그들 재수파 중의 한 아이 어머니가 학교에 나타난 것이다. 그네는 학생부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기표를 손가락질했다. 저 놈, 저 놈이 우리 해중일 맨날 불러냈지! 우리 해중일 망치는 놈이 바로 저 놈이라우! 모두 기표를 바라보았다. 기표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은 채 해중이를 돌아다보았다. 이 새끼야 내가 느네 엄마 말대로 널 맨날 불러냈냐? 소름이 끼치도록 낮고 매서운 추궁이었다. 말해라, 이 녀석아, 왜 사실대로 말 못하는 게야? 해중이 엄마가 퍼댔다. 말해! 기표가 씹어 뱉듯 말했다. 해중이가 느닷없이 몸을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기 시작했다. 엄마, 기표는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왔어. 우리 집도 모른단 말이야. 선생님, 접때 그 일은 제가 했어요. 딴 학교애들하고 그랬단 말예요.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학생부실 시멘트벽에 머리를 두어 번 부딪쳤다. 해중이가 병원으로 들려간 뒤 학생부 선생이 함께 조사를 받던 놈들한테 물었다. 해중이 말이 사실이냐? 기표가 고개를 끄덕거린 다음, 그 썅새끼--하고 중얼거렸다. 다른 애들도 모두 기표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중이가 스스로 학교를 물러난 것으로 일은 끝나 버렸던 것이다. “아직 멀었냐?”

담배를 피운 다음 책상에 앉아 잠시 졸고 난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느 정말 오늘 왜 이렇게 늦냐?” 우리들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때, 90점 이상 많이 나오냐?” “하나도 없는데요”

“참 느덜 공부 안해 큰일났다” 그때 화학실 문이 열렸다. 넙쩍이 아가씨가 거기 서 있었다. “왜, 나한테 전화 왔냐? 여자지”

그러나 넙쩍이 아가씨가 헐떡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가 아녜요. 선생님 빨리 내려가 보세요. 야단났어요”

담임선생님이 허둥지둥 달려나갔다. 정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유대야, 말하는 건데 그랬다” “난 네가 말할 줄 알았지”

“아까 네가 말랬잖아? 난 네가……” 정수는 금방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듯 얼굴을 우그려뜨렸다.

“기표가 안 좋아할껄, 고자질하는 거 말이야” “그렇지만형우가……”

“아마 형우도 원하지 않았을 거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니?”

“응, 형우는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당하길 원했거든”

정수가 무슨 얘기냐는 듯 나를 보았지만 나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죽진 않았을 거다” 우리들이 답안지를 정리해 들고 교무실을 내려왔을 때는 교무실은 넙쩍이 아가씨 혼자 있었다.

“김선생님이 빨리 한강병원으로 오라고 하던데요”

“무슨 일이래요?” “어떤 아줌마가 아까 막 달려와서 학생들이 뒷산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해 학생주임선생님이 가봤더니요, 2학년 13반 반장이 혼자 뒹굴고 있더래요”

우리들은 학교에서 가까운 한강병원까지 단 한 마디 말도 않은 채 달려갔다. 죽지 않았을 거다. 나는 뛰면서 생각했다. 기표가 사람을 죽일리가 없지. 기표는…… 형우는 응급실 의자에 엉거주춤 누워 있었다. 형우가 외관상 멀쩡해 보이는 데 대한 한 가닥 실망이 스쳤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형우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임시로 잡아맨 넓적다리의 붕대위엔 꽃송이처럼 선명한 핏자국이 피어올랐다. 우리를 발견한 형우가 재빠른 동작으로 손가락 하나를 퉁퉁 부은 제 입술에 댔다가 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유대야, 너 형우네 집 전화번호 알지?” 학생주임과 함께 서 있던 담임이 물었다. “모르겠는데요” 나는 시치미를 떼며 형우의 표정을 살폈다. 형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선생님, 제발 저를 그냥 돌아가게 해 주세요. 전 아무렇지도 않단 말씀에요” “임마, 여길 나가기 전에 사실대로 대란 말이다”

학생주임이 다그쳤다. “말씀드릴 수 없읍니다. 제가 잘못한 일로 싸웠는데 왜 친구들을 괴롭혀야 합니까” “임마, 넌 싸우지 않았어. 본 사람이 그랬어, 네가 몰매를 맞더라고” “아닙니다 선생님, 제가 먼저 그 아이한테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싸웠던 겁니다”

“그게 누구냔 말이다” “말할 수 없읍니다”

“너 정말……” 학생주임이 혀를 내둘렀다. “너 정말 학교를 허수아비로 아는 거냐? 학교 다니기 싫어?” “저는 처벌을 달게 받겠읍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말할 수는 없읍니다”

담임선생은 얼굴에 그늘을 깐 채 팔짱을 끼고 한 편에 묵묵히 서 있었다. 우리반의 일사불란한 항해를 거슬린 자가 누굴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야말로 우리들 손에서 고삐를 낚아채어 거머쥐고 목을 옥죄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유대, 넌 알 거다, 형우를 때린 놈들이 기표네 패라는 걸 말이다”

“형우가 그렇게 말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건 틀림이 없다. 기표 놈이 아니곤 그런 짓을 할 놈이 없다”

담임은 헐떡거렸다. 양같이 순하게 길들여졌다고 확신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을 것이다. “선생님, 형우가 뭘 잘못했다는 걸까요?” 내가 짐짓 떠보았다. “형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잘못하기는커녕 형우가 그놈들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는지 넌 모를 게다”

담임선생님은 몹시 흥분하고 있었다. 기표에 대한 협오감으로 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기표를 미워하다니. 나 역시 담임선생에 대한 적대감으로 몸을 떨었다. “뭡니까, 선생님. 형우가 기표를 위해서 무얼 했단 말입니까?” 내 반감 짙은 어투에 놀랐는지 담임선생은 좀 멈칫했다. 그러나 곧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임마, 나는 다 알고 있어. 기표가 저질러 온 짓 말이다. 유대, 너도 기표한테 당했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그놈들 부정행위를 거들어 준 것도 알고 있다” 그랬겠지. 나는 속으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무서웠다. 어른들의 음흉스러운 심뽀, 알면서도 모른 체 시치미를 뗀 그 저의는 무엇인가. 형우는 우리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이 돼 버렸다. 예상 안한 건 아니지만 그 여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3학년에도, 1학년 하급생들도 2학년 13반 반장 임형우가 입에 올랐다. 전치 2주의 상해를 입고도 끝내 그 상대를 입에 올리지 않으므로 해서 형우의 존재는 풍선처럼 부풀었다.

기표가 그 사건 다음 날부터 내리 사흘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도 재수파들은 학생부에 불려 가지 않았다.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담임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 기표를 찾기 위해 뚝방 동네를 연 이틀이나 헤맨 사실도 학교에 널리 알려졌다. 기표가 학교에 나온 날 담임은 조회시간에 간단히 말했다. “최기표군은 그 동안 피치 못한 가정사정으로 결석했다. 앞으로 다시는 결석이 없을 것으로 안다” 항상 빳빳하게 쳐들고 앉았던 기표의 고개가 잠깐 숙여지는가 싶게 느껴졌다. 그것은 이상한 조짐이었다.

형우가 병원에서 퇴원을 해 2주일만에 학교에 나왔다. 악수 세례가 쏟아지고, 등을 두드리고, 체육시간에는 헹가래까지 시키려고 했지만 형우가 도망을 쳤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은 숨죽여 기표의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친 아이들은 섬뜩한 느낌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나는 후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형, 우리 미술시간에 라면 먹으러 갈까?”

내가 말을 건넸다. 우리들은 가끔 후동교사 뒷담을 넘어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사 먹은 다음 감쪽같이 들어오곤 했다. 재수파들이 그 전문이었던 것이다. “필요없어”

기표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퉁명스럽게 뱉았다. 그는 국어책을 읽고 있었다. 안톤 슈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다른 반 애들이 말했다.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올 때마다 임형우의 일화가 예로 들어지면서, 학우를 아끼고 의리로써 지켜 준 참다운 우정과 반의 결속을 위해 담임선생님과 함께 남모르게 애써 온 그 숨은 이야기가 술술 펼쳐지더란 것이다. 교정에 모여선 아이들도 입에 입에 형우의 얘기로 만발했다.

“우리들이 커닝을 도와준 것이 기표의 비위를 상하게 한 모양이지?” 병원에 있을 때는 남의 눈을 생각해 못 물어본 걸 하교길 둘만의 자리가 됐을 때 내가 넌지시 물어보았다.

“글쎄 그런 것 같았다” 형우가 짐짓 좌우를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그때 그 일, 담임선생님이 시켜서 한 거지?”

내가 넘겨짚자 형우가 한 순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언제고 밝히고 싶었던 것이라 나는 다시 다그쳤다. “그렇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문제를 담임선생님과 의논한 건 사실이다” “합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냐?”

“아니다. 담임선생님이 기표를 나한테 일임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기표를 구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랬겠지. 형우야, 넌 지금 네가 기표를 구원했다고 보니?”

“아직 완전히는…… 그러나 멀지 않았다”

나는 웃어 주었다. “기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 형우, 네가 구원해 주고 있다고 말이야” “그것은 기표가 생각할 일이 아니다” “무슨 뜻이냐?” “우리가 무서워했던 건 기표가 아니라 기표를 둘러싸고 있는 재수파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조직은 없어졌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거냐?”

“내가 병원에 있을 때 그 애들이 모두 나한테 사과하러 왔었다. 하나 하나 서로가 모르게 다녀갔다” “기표두 왔었니?” 내가 헐떡이면서 물었다. “오지 않았다. 그러나 난 그런 놈한테 사과도 받고 싶지 않다” 그럴 테지. 나는 후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래, 다른 애들이 너한테 사과를 했다고 해서 재수파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일 거야” “물론 겉으로야 그대로 남아 있겠지.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이빨 뺀 뱀이나 다름없어. 걔들이 모두 나한테 말했다. 기표는 악마라고. 자기들 피를 빨아먹고 사는 흡혈귀라고” 형우와 갈라서야 하는 길목에 와 있었다. 나는 형우네 집쪽으로 따라 가며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냐?”

형우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기표는 다 아는 것처럼 가난한 집 애다. 거기다가 그 부모가 다 병들어 누워 있다. 시집간 기표 누나가 대주는 돈으로 겨우겨우 먹고산댄다. 기표 동생이 셋이나 있다. 기표 바로 밑의 동생이 버스 안내원을 해서 생활비를 보탰는데 요즘 무슨 일로 해서 그것도 그만두었다. 아뭏든 생활이 말두 아니란 거야. 재수파들이 매달 얼마씩 모아 생활비를 보태줬다는 거야. 집에서 돈을 뜯어낼 수 없는 애들은 혈액은행에 가 피를 뽑아 그 돈을 내놓았다는 거다”

“그렇게 해 달라고 기표가 강요한 건 아닐 텐데”

“마찬가지다. 재수파들은 기표가 무서웠다는 거야”

“지금도 무서워하고 있는 걸” “그렇지 않아”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혈색이 더 좋아진 형우가 자신있게 말했다.

“이제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될 거다”

형우가 손을 흔들고 자기집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는 유능한 반장이 틀림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씁쓸한 느낌이 가슴을 스쳤다.

담임의 예언대로 기표는 결석을 하지 않았다. 형우와 기표 사이에도 이렇다할 마찰이 없이 여름방학이 지났다. 교실에서 도시락이 없어지는 일도 드물었다. 물론 재수파들이 기표를 찾아 교실에 들락거리는 횟수는 잦았지만 아이들은 그닥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다. 기표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담임선생이 가끔 기표에게 학급사무를 맡기는 게 눈에 띄었다. 기표가 별 표정없이 그런 일을 맡아 했다. 그날도 기표는 담임선생의 지시에 의해 체육부실에 내려가 우리 반 아이들의 체력검사 통계를 내고 있었다. 그럴 시각 담임선생이 말했다.

“66명이 탄 우리배는 순풍을 맞아 참으로 순탄한 항해를 하고 있다. 다 여러분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알려줄 한 얘기는 반장이 해 줄 것이다. 다만 담임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남의 일 아닌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담임선생이 교단에서 내려서고 그 대신 반장 임형우가 사뭇 엄숙한 표정으로 단 위에 섰다.

“담임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친구 하나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 그 친구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를 잡은 형우는 언젠가 하교길에서 내게 들려 준 기표네 가정 형편을 반 아이들한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형우의 혀였다. 나한테 얘기를 들려줄 때의 그런 적대감은 씻은 듯 감추고 오직 우의와 신뢰 가득한 말로써 우리의 친구 기표를 미화하는 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기표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정경이며 기표 어머니의 심장병, 그러한 부모들을 위해서 버스 안내원을 하던 기표 여동생의 눈물겨운 얘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기표네 식구들의 배고픔이 눈에 보이듯 열거되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결코 겉에 나타내지 않고 묵묵히 학교에 나온 기표의 의지가 또한 높게 치하되었다. 더구나 그런 가난 속에서 유급을 했기 때문에 1년간의 학비를 더 마련해야 했던 그 고통스러운 얘기도 우리 가슴에 뭉클 뭔가 던져 주었다.

“나는 얼마전 기표가 버스 안내원을 하던 여동생을 몹시 때린 일을 알고 있읍니다. 그 여동생은 몸이 약해 버스 안내원을 그만두었던 것인데 생활이 더 어렵게 되자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 나가기로 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여동생이 앞으로 어떤 무서운 수렁에 떨어져 내릴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읍니다”

반 아이들은 사뭇 숙연한 자세로 형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우는 기표네 가정 사정을 낱낱이 얘기함으로써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기표의 허상을 빈곤이라는 그 역겨운 것의 한 자락에 붙들어 맨 다음 벌거벗기려 하는 것 같았다. 기표는 판자집 그 냄새나는 어둑한 방에서라면 가락을 허겁지겁 건져 먹는 한 마리 동정받아 마땅한 벌레로 변신되어 나타났다.

“한 가지 또 알려 줄 게 있읍니다. 그것은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위해서 이제까지 남이 모르게 도와 온 우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표의 가까운 친구들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이 재수파라고 불러 온 아이들입니다. 우리들이 무시해 온 그들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우정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매달 용돈을 저축하고 또는 방학 때 공사장에 나가 일을 해서 받는 돈으로 기표를 도와 온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매달 자신의 귀한 피를 뽑아 그 돈을 내놓기도 했읍니다. 한 달에 피를 세 번이나 뽑았기 때문에 빈혈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던 사람도 있읍니다. 사회에서 구원받지 못한 가난을 우정으로써 구원하려 한 그들이야말로 훌륭한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협동과 봉사--기여 정신의 산 증인들입니다. 우리들은 가끔 학교에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이 텅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분 나쁘게 생각한 적이 있읍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배고파 보지 못한 우리들의 우매함이었읍니다. 남의 찬 도시락을 훔쳐먹어야 했던 우리의 가난한 이웃을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지냈읍니다. 나는 반장으로서 그 사실을 몹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사과하는 뜻에서 나는 오늘이라도 우리의 친구 기표를 돕는 일에 앞장서기로 결심한 것입니다”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깊은 감동의 강물이 모두의 가슴 한 가운데를 출렁이며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담임선생이 교단으로 다가갔다. 그는 주머니에서 만원 짜리 한 장을 꺼내어 교탁 위에 놓았다. 반장도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이들이 조용한 술렁거림 속에서 모두 돈을 찾아 들었다.

“오늘 돈이 없는 사람은 내일 가져오는 게 어떻습니까?”

한 아이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제안하자 모두, 그럽시다--소리쳤다.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모일간지 편집부국장을 지내는 학부형이 우리 반에 있었다. 담임선생님과 반장이 그 학부형을 만나러 갔다. 그 신문사 기자가 학교에도 여러 번 다녀갔다. 며칠 뒤에 신문 미담란에 우리 반 얘기가 크게 다뤄졌다. 박스 기사였다. 기표의 갸륵한 효성에서부터 재수파들의 우정어린 피뽑기와 급우들로부터 시작된 친구돕기 운동이 전교적으로 파급되어 이룩한 성과가 자세하게 났다. 기표의 여동생 얘기도 끼어 있어 그 기사를 읽은 우리들의 콧등이 새삼 찡 했다. 기사 멘 위에 담임선생과 반장, 그리고 기표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교장선생님 지시에 의해 그 기사는 각 교실 후편 게시판에 붙이게 돼 있었다. 그 신문 기사가 나가고부터 월요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사회각계에서 보내오는 성금과 위문편지를 최기표에게 전달했다. 담임선생님도 종례 때면 기표에게 편지 여러 장을 건네며, “거기 여학생 편지도 많이 있으니까 혼자 몰래 보라구” 아이들이 와하하 웃었다. 기표가 얼굴을 벌겋게 달구며 편지 다발을 책상 속에 넣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박수를 쳤다. 실로 화기애애한 반이 되었던 것이다. “기표 얘기가 영화로 된다며?” “그렇대. 재수파들을 중심으로 한 얘긴데 TV에 나오는 제3교실 같은 거겠지” 어디서 나온 얘긴지 기표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제 아이들은 아무도 기표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호칭하는 아이도 드물었다. 아무나 곁에 가서 말을 걸 수가 있었고 때로는 어깨도 쳤다.

그것은 기표가 아주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도 수줍어하는 그 아이는 그렇게 당당하던 체구마저도 왜소하게 짜부라진 채 우리가 보통 사진을 찍을 적에 <치이즈>하고 웃듯 그런 미소를 얼굴에 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미소짓는 기표의 얼굴을 보면서 일사불란한 항해를 계속했다. 담임은 더욱 깊은 이해로써 우리 반을 돌봐주었다. 반장 형우는 그 나름의 성실과 지혜로 <우리>를 위해 헌신했다. 우리 교실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기표의 얘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얘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우리들은 덩달아 들떠서 술렁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기표의 자리가 빈 것을 알았다. 다음날도 그는 결석했다. 무단 결석이었다. 담임선생이 한 아이를 기표네집에 보냈다. “집에도 없어. 이틀 전에 집을 나갔대”

우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찮은 생각들이 머리에 젖어들었다. 기표가 내리 사흘이나 결석을 한 아침나절이었다. 수업중인데 담임이 형우와 나를 찾는 쪽지가 왔다. 우리가 교무실에 내려갔을 때 담임선생은 병색이 완연해 뵈는 어떤 여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네는 초가을인데도 낡고 두터운 오바를 걸치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기표 친구들이구만, 시상에 이렇게 고마운 친구들이 어디 있겠누. 그런데 이눔에 자슥이……”

그네는 몸을 일으켜 우리에게 굽실거리며 때 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네는 우리의 손을 더듬어 쥐고 싶어했다.

“자, 이제 고만 돌아가십시오. 애들하고 의논해서 찾아보겠읍니다”

담임선생은 기표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고 나갔다. 그네는 교무실을 나가며 자꾸 아쉬운 듯 우리들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그네를 배웅하고 돌아온 담임이 의자에 소리나게 주저앉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 망할 새끼가 끝까지 말썽이란 말이야”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으며 투덜거렸다

“내일 천일영화사 사람들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잖냐? 그런데 이 망할 새끼가……” 그는 서랍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우리들 앞에 내던졌다. 기표가 바로 밑의 여동생한테 보낸 편지였다. 팬지 맨 앞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무섭다.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 끝.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 오승희의 동화 「할머니를 따라간 메주」에서 옮겨 왔습니다.

오승희 :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동화 공부를 하고, 동화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앞 주차장에 차가 듬성듬성 세워져 있다. 꼬마 아이들이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이제 가을이 왔나 했더니 벌써 겨울인가 보다. 아이들 옷차림이 두텁다. 아스팔트 위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매섭게 느껴진다.

집으로 올라가 현관 문을 여니 구수하고도 눌은 듯한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바로 부엌이다. 할머니는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큰 들통에서는 김이 펄펄 난다.

“할머니!”

“어라? 너 어째 이리 일찍 오냐?”

“할머니도, 참. 토요일이잖아요.”

“그렇구먼. 저게 몇 시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남?”

할머니는 냉장고 문을 열고 반찬 그릇을 주섬주섬 내놓았다. 나도 숟가락을 놓으며 물었다.

“할머니, 그런데 지금 뭘 하세요?”

“메주콩 삶는 거여. 얼추 다 된 거 같은디.”

할머니는 들통 뚜껑을 열고 속을 한번 뒤저어 보았다.

“그만 끄내야겄다. 잘 되았어.”

거실 한가운데에 함지 함지 : 네모지게 나무로 짜서 만든 그릇. 밑은 좁고 위가 넓음

가 놓여 있다. 할머니는 거기다가 콩을 들이부었다.

“너 어여 밥 먹어. 난 이것 좀 찧어야 쓰겄다 .”

할머니는 방앗공이 방앗공이 : 곡식을 담아 놓고 찧을 수 있게 움푹 들어가게 판 방아나 절구 속에든 물건을 내리찧는 공이

로 콩을 찧었다.

“절구에 찧어야 하는 건디, 원 옹색혀서 참.”

처벅처벅 찧는 소리가 난다. 밥을 먹다 말고 나는 그쪽으로 가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방아질이 재미있어 보인다.

“할머니, 나도 해볼게요.”

“아서, 니가 뭘 혀.”

“아이, 할머니, 한번 해볼게.”

방앗공이를 붙들고 떼를 쓰자 할머니는 할 수 없이 그걸 넘겨주었다. 할머니는 내가 찧는 것을 바라보며 한동안 앉아 있더니 혼잣말을 했다.

“에미가 장 관리나 제대로 할지 모르겄네. 이번 장이 잘돼야 두고두고 잘 먹을 텐데……”

“할머니, 어디 가세요?”

헐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함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번 방아질할 때는 재미있더니 찧어진 콩이 공이에 처덕처덕 달라붙자 힘이 들었다. 내가 가쁜 숨을 쉬자 할머니는 공이를 빼앗으며 말했다.

“어여 가서 밥이나 먹어. 참, 너 이것 좀 주랴?”

할머니는 공기에다 콩을 조금 덜어 주었다.

“내 어렸을 때, 이거 숱하게 집어먹었구먼. 왜 그렇게 맛있던지 엄니 몰래 야금야금 먹다가 배탈 나서 칙간 뻔질나게 드나들었재.”

나는 콩을 입에 넣었다. 밥에 넣어 먹는 콩과는 다른 맛이었다. 푹 익어 물컹거리는 것이 밤맛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슬그머니 그릇을 밀어 놓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엄마가 들어왔다. 토요일이라 일찍 퇴근했나 보다. 엄마는 방아를 찧고 있는 할머니를 보더니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모른 체하고 계속 방아를 찧는다. 엄마는 인상을 찡그리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엄마를 따라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으며 엄마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정말 왜 저러신다니? 그렇게 하지 마시라고 말렸는데.”

엄마는 화가 나서인지 옷을 탁 팽개쳤다.

“하여간 꼭 자기 주장대로만 하시려고 한다 말이야. 해야 되겠다고 한 것은 기어코 하시고야 마니……주위 사람들 얘기는 듣지도 않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할머니가 메주를 쑤겠다고 했을 때 엄마가 말렸던 생각이 났다. 아파트니까 항아리 늘어놓을 데도 없고 냄새도 나니 하지 말자고 했던 것이다. 나는 엄마 옆에 서 있기가 불편해 내 방으로 건너왔다. 책상머리에 앉아 숙제 공책을 펴 놓지만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엄마는 할머니한테 불만이 있을 때 가끔 나에게 푸념을 하곤 했다.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듣기만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가슴 속은 뭉근하니 아파 왔다.

지난 추석 때도 그랬다.

추석날, 점심 때쯤 되니 큰고모, 작은고모네 식구들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고모, 사촌들과 어울려 벅적대며 즐겁게 지냈다. 그날 밤은 이 방 저 방, 사람들로 꽉 차서 나는 안방에서 자야 했다.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데 엄마가 소리를 죽여 말했다.

“송편 만드시는 걸 뭐라는 게 아녜요. 적당히 하셔야죠, 적당히.”

아까부터 하던 말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조금만 하자고 하지 그랬어?”

“말씀드리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 큰 함지에 가득 반죽을 해 놓고는…… 만드는 사람이나 많으면 또 몰라. 둘이서 그것만 붙들고 하루 종일…….”

“그래서 친척들이랑 나눠 먹으면 좋은 거지 뭘.”

“뭐예요? 나 같은 사람은 하루 종일 직장에서 시달리고, 집에 와서 좀 쉬면 안 되는 거예요?”

엄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만둡시다. 그만둬.”

아빠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이 돌아누웠다.

“그거 한 가지뿐이면 내가 말을 안 해. 날이면 날마다 온갖 손 많이 가는 일만 잔뜩 벌여 놓으시니…….”

엄마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는 누워서 자는 체했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오래도록 깨어 있었다.

거실에서 무엇인지 무거운 것을 쿵쿵 내려치는 소리가 들린다. 밖으로 나가 보니 할머니가 널따란 나무 도마에 콩 덩어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할머니, 뭘 하세요?”

“다 찧어졌응게 인자 메주를 만들어야재.”

콩 덩어리는 도마에 닿는 부분이 판판해졌다. 할머니가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계속 내리치자, 점점 큰 벽돌 모양의 메주꼴이 잡혀 갔다. 할머니는 세 개째 메주를 만들면서 벌써 힘에 부치는지 숨이 가빠졌다. 나는 슬그머니 할머니가 잠시 내려놓은 콩 한 덩어리를 끌어다가 내리쳤다.

“야가 왜 이런디야.”

“할머니, 힘드시죠? 할머닌 잠깐 쉬세요. 제가 할게요.”

“아서, 아서. 괜히 망가뜨리기나 하지.”

“저도 잘할 수 있다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콩 덩어리는 벽돌 모양이 되지 않고 찌그러지기만 한다.

“아이고, 저리 비켜. 니가 뭘 한다고 그랴.”

엄마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마지못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할머니처럼 콩 덩어리로 메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메주는 모두 열두 개였다. 할머니는 다 만든 메주를 베란다에 죽 늘어놓았다. 겉이 꾸덕꾸덕 말라야 끈에 묶어 매달 수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좁은 베란다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우리 집 베란다는 이미 항아리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우리 집에 왔다. 그때 할머니는 시골에서 쓰던 항아리를 많이 가지고 왔다. 냉장고에 들어갈 만한 작은 것부터 내가 들어가 앉아도 될 만큼 커다란 항아리까지 여러 가지였다. 그땐 베란다에 화초가 많았다. 할머니는 가지고 온 항아리가 베란다에 다 놓아지지 않자 복도에 내놓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경비원 아저씨가 올라왔다. 복도에다 이렇게 뭘 많이 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화초들은 어느덧 하나씩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비상구로 내몰렸다.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장소는 간장 항아리나 고추장, 된장 항아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베란다에 늘어놓은 메주를 보았다.

“하지 마시라니까, 어머니는 참. 슈퍼에서 사다 먹으면 될 걸 가지고.”

할머니는 못마땅한 낯빛으로 아버지를 나무랐다.

“장은 집에서 담가야 제 맛이 나는겨.” “요즘에는 파는 된장도 맛이 괜찮다구요.”

“딴 건 몰라도 이건 안 되야. 그깟 조미료로 범벅한 것이 제대로 된 장이여? 시상이 아무리 바뀌었기로서니. 다신 그런 말 하덜 말어.” 아버지도 더 이상 대꾸를 못했다.

며칠 후, 엄마가 몸이 좀 안 좋다고 일찍 들어온 날이었다. 내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 못 박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엄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어머니. 뭘 하시는 거예요?”

나도 밖으로 나가 보았다. 할머니가 베란다에 의자를 내놓고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고는 또 하나 못을 박는 것이었다. 창고 문틀 위에 나란히 못이 박혀 있었다.

“메주 매달아 놓을라고 그려.” 엄마는 한숨을 폭 쉬었다.

“어머니, 그런 데다 못을 박으시면 어떡해요?”

“매달아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그러재. 원 메주 하나 매달아 놓을 데도 없는 집구석이 어디 있다냐. 몹쓸 놈의 집구석이여.”

할머니는 못을 또 하나 들어서 박았다. 그것을 본 엄마는 입을 앙다물고 눈을 한 번 꼭 감았다 뜨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메주만 중요하고 집꼴은 아무렇게나 돼도 괜찮단 말씀이세요?”

할머니는 그제서야 돌아서서 엄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여? 집꼴? 그럼 내가 집꼴을 망치고 있단 말여? 못 몇 개 박은 게 집꼴을 망치는 거란 말여?” 할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노여워 어쩔 줄 몰라했다. 나는 무서웠다. 엄마가 이렇게 할머니에게 대드는 것은 처음 보았다. 엄마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메주 만들지 마시라 그랬잖아요.”

“뭣이여? 메주를 만들지 마라? 니가 지금 메주 만드는 거 돕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냐?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만들지 말란 소리만 하면 다여?”

“요즘 아파트에서 그런 거 만드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러세요?”

“너는 안 먹고 살래? 아무리 아파트기로서니 사람이 할 일은 하고 살아야재. 그래, 아파트 살면 장을 다 사 먹어야 한단 말이여?”

“아유, 그만두세요. 어머닌 옛날 방식만 고집하시니.”

엄마는 돌아서서 안방 쪽으로 갔다. 할머니는 속이 상한지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할머니를 불러 보았다.

“……할머니이.” 할머니는 그제서야 내 얼굴을 보더니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시상이 아무리 달라졌다 혀도 달라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여. 그렇재, 암.”

그러고는 박아 놓은 못에 메주를 걸었다. 메주는 창고 문 앞에 주렁주렁 매달렸다. 못에 다 걸 수가 없어서 빨래 건조대에도 매달았다.

내 방으로 가다가 안방 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엄마가 쪼그려 앉아 두 팔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나는 엄마를 부르지도 못하고 문을 다시 닫았다.

왜 이래야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도 좋고 할머니도 좋다. 그런데 두 분이 사이가 안 좋은 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프고 괴롭다. 어떡하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