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의 모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2008. 2. 10. 00:07ㆍ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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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에 등장하는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이산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혜경궁 홍씨는 역사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역사적으로 아들 이산이 왕위에 오르며 그녀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는 듯 했지만, 이후 그녀의 삶이 그다지 편치 못했다. 그녀의 집안은 정적들의 모함을 받았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홍봉한)과 정조의 즉위에 대해 반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후에 <한중록>을 통해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변의 주장에 대해서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하게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의 저 '사도세자의 고백'에서는 한중록은 자기 변명의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말하고 있다.
탕평책을 실시했다는 것과 오랫동안 군주 생활을 했으며, 전대의 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영조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얻은 아들이 있기는 했으나 영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고약하게도 후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겨우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사도세자'라 불리는 장헌세자가 태어난 것이다.
사도세자의 탄생은 이른바 '삼종의 혈맥'이라 불리는, 손 귀한 왕의 핏줄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왕보다 당수들에게 충성을 다하던 노론과 소론 신하들도 이때만큼은 웃으며 사도세자를 축복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이미 기울대로 기운, 쇠락의 조짐을 도처에서 보이고 있었다. 사대부들도 마찬가지. 특히 사대부들이 왕보다 당수를 높게 모시는 붕당정치의 정점을 이룰 때였다.
붕당정치. 본래 의미는 좋지만 당시에 붕당정치는 패거리문화요, 사생결단의 정치이자 보복의 정치를 감행하게 만드는 패륜의 정치였다. 영조 또한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실상은 눈물을 흘리거나 단식을 해야만 사대부들이 마지못해 왕의 뜻을 들어주었을 정도로 그 골은 깊었다.
당시 백여 년 간 권력을 쥐었던 노론은 사도세자가 성장해감에 따라 사도세자를 자신들의 손 안에 넣으려고 한다. 영조 또한 사실은 노론에 치우쳐 있었고, 사도세자의 어머니도 노론으로 볼 수 있었으며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도 노론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사도세자는 노론으로 방향을 틀 것으로 보였는데 여기서 비극이 예언된다. 사도세자가 성장하면서 소론 쪽으로 어깨를 기운 것이다.
'문'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사도세자는 성장해감에 따라 아버지 영조가 아닌, 북벌을 꿈꿨던 효종을 닮아가게 된다. 태조 이성계와 효종을 잇는, '무'를 중시할 줄 아는 왕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사도세자는 소론이나 남인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북벌을 꿈꿀 만한 기재였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노론으로서는 이러한 조짐에 경악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를 두려워하면서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른바 '택군'을 꿈꾼 것이다.
택군, 그것은 신하가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간간히 쿠데타로 택군이 나타나곤 했는데 당시는 이미 조선시대가 기울대로 기운지라 신하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위해 택군을 가슴에 품는다. 실로 당수가 왕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당파가 왕권을 초월한다는 기이한 현상이라고 밖에 아니할 수 없다.
그에 따라 노론은 정치 공작을 펼치는데 사도세자는 영특하게 그것을 버텨낸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과거를 바꾸기 위한 정치에 급급했던 영조가 노론과 뜻을 같이하면서부터 사도세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사도세자는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분투한다한들 궁궐에서 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내와 장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등을 돌렸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치욕을 견디고 수모를 참아냈던 사도세자지만 결국 자결하라는 아버지의 명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그리고 결국 장인이 가리킨 뒤주 속에 여드레 동안 감금당해 그 명을 달리하고 만다. 기가 막히게도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동안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만이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릴 뿐 어떤 신하도 사도세자를 위한 간청을 드리지 않는다. <한중록>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냈던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신의 아버지를 변명하기에 급급할 뿐이고, 신하들은 사도세자의 아들을 죽일 생각에 골몰할 뿐이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떠났다. 무를 중시했기에 문의 나라에서 추방당한 것이고, 아들마저 죽게 만드는 영조의 권력욕에 희생당했으며, 택군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데 급급한 권력가들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다. 만약 사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면, 누구보다 개혁가적인 모습을 갖춘 그가 조선의 왕이 됐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면, 그의 죽음이 한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꿈은 그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았고 노론의 정치와 자식마저 죽이는 권력욕을 보았다. 그렇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즉, 사도세자가 있었기에 정조가 있었고 정조가 개혁군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되짚어볼수록 사도세자는 참으로 비운의 주인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생전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조가 뜻을 펼쳐줬다 하지만 승자를 중시하는 역사의 속성 때문에 정신이상자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형벌 중 하나가 두 번 죽이는 것이라 했다. 살아서 죽이고, 죽은 뒤에 또 죽이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사도세자도 그것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견해와 달리 과연 한중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한중록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보자
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 참고문헌 ≫ 한듕록(金東旭 · 李秉岐, 民衆書館, 1961), 朝鮮朝女流文學의 연구(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8), 閑中錄연구(金用淑, 한국연구원, 1983), 煉 藏 <출처 ;민시련>
단순히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썼던 것이지만 그 정쟁의 중심에 있었고 사건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가문과 정파 그리고 아들을 지키려는 모정 그 복잡함 속에서 다시 재조명 되어야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역사적 사료로서의 한중록과 문학적 가치로서의 한중록 둘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므로...
한중록을 그냥 궁중문학이나 여류문학에 국한 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아들 이산이 왕위에 오르며 그녀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지는 듯 했지만, 이후 그녀의 삶이 그다지 편치 못했다. 그녀의 집안은 정적들의 모함을 받았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홍봉한)과 정조의 즉위에 대해 반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녀는 후에 <한중록>을 통해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는데,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간접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변의 주장에 대해서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하게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의 저 '사도세자의 고백'에서는 한중록은 자기 변명의 수단이라는 것이었다 말하고 있다.
자식을 편애했던 시아버지 영조와 정신이상자였던 남편 사도세자 간의 비극의 현장을 그려내기에 그렇다. 변덕이 죽 끓듯 수시로 바뀌는 고약한 시아버지가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정신병자 남편을 뒤주에 가둬 죽이는 것을 그려내는데 어찌 그 애처로운 며느리이자 아내의 심정이 알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나 역사는 '진실' 위에서 토대를 세워야 한다. 그래서 이덕일은 혜경궁 홍씨의 애처로운 신세타령이 아니라 존재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관계를 새로이 조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중록>이 남편을 죽이는데 일조한 혜경궁 홍씨의 자기변명이자 가문의 변명이라는 것을 밝히며 진실한 시선을 제공하고 있다. 바로 <사도세자의 고백>이 그것이다.
탕평책을 실시했다는 것과 오랫동안 군주 생활을 했으며, 전대의 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으로 유명한 영조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 얻은 아들이 있기는 했으나 영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고약하게도 후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늦은 나이에 겨우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사도세자'라 불리는 장헌세자가 태어난 것이다.
사도세자의 탄생은 이른바 '삼종의 혈맥'이라 불리는, 손 귀한 왕의 핏줄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왕보다 당수들에게 충성을 다하던 노론과 소론 신하들도 이때만큼은 웃으며 사도세자를 축복한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이미 기울대로 기운, 쇠락의 조짐을 도처에서 보이고 있었다. 사대부들도 마찬가지. 특히 사대부들이 왕보다 당수를 높게 모시는 붕당정치의 정점을 이룰 때였다.
붕당정치. 본래 의미는 좋지만 당시에 붕당정치는 패거리문화요, 사생결단의 정치이자 보복의 정치를 감행하게 만드는 패륜의 정치였다. 영조 또한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실상은 눈물을 흘리거나 단식을 해야만 사대부들이 마지못해 왕의 뜻을 들어주었을 정도로 그 골은 깊었다.
당시 백여 년 간 권력을 쥐었던 노론은 사도세자가 성장해감에 따라 사도세자를 자신들의 손 안에 넣으려고 한다. 영조 또한 사실은 노론에 치우쳐 있었고, 사도세자의 어머니도 노론으로 볼 수 있었으며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한 외척도 노론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사도세자는 노론으로 방향을 틀 것으로 보였는데 여기서 비극이 예언된다. 사도세자가 성장하면서 소론 쪽으로 어깨를 기운 것이다.
'문'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사도세자는 성장해감에 따라 아버지 영조가 아닌, 북벌을 꿈꿨던 효종을 닮아가게 된다. 태조 이성계와 효종을 잇는, '무'를 중시할 줄 아는 왕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사도세자는 소론이나 남인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북벌을 꿈꿀 만한 기재였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노론으로서는 이러한 조짐에 경악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를 두려워하면서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이른바 '택군'을 꿈꾼 것이다.
택군, 그것은 신하가 왕을 선택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간간히 쿠데타로 택군이 나타나곤 했는데 당시는 이미 조선시대가 기울대로 기운지라 신하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위해 택군을 가슴에 품는다. 실로 당수가 왕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당파가 왕권을 초월한다는 기이한 현상이라고 밖에 아니할 수 없다.
그에 따라 노론은 정치 공작을 펼치는데 사도세자는 영특하게 그것을 버텨낸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과거를 바꾸기 위한 정치에 급급했던 영조가 노론과 뜻을 같이하면서부터 사도세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사도세자는 나름대로 자구책을 강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분투한다한들 궁궐에서 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내와 장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등을 돌렸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치욕을 견디고 수모를 참아냈던 사도세자지만 결국 자결하라는 아버지의 명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그리고 결국 장인이 가리킨 뒤주 속에 여드레 동안 감금당해 그 명을 달리하고 만다. 기가 막히게도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동안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만이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릴 뿐 어떤 신하도 사도세자를 위한 간청을 드리지 않는다. <한중록>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자아냈던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자신의 아버지를 변명하기에 급급할 뿐이고, 신하들은 사도세자의 아들을 죽일 생각에 골몰할 뿐이다.
사도세자는 그렇게 떠났다. 무를 중시했기에 문의 나라에서 추방당한 것이고, 아들마저 죽게 만드는 영조의 권력욕에 희생당했으며, 택군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는데 급급한 권력가들에 의해 버림받은 것이다. 만약 사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면, 누구보다 개혁가적인 모습을 갖춘 그가 조선의 왕이 됐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면, 그의 죽음이 한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꿈은 그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았고 노론의 정치와 자식마저 죽이는 권력욕을 보았다. 그렇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즉, 사도세자가 있었기에 정조가 있었고 정조가 개혁군주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되짚어볼수록 사도세자는 참으로 비운의 주인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서 가장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생전 그런 취급을 받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정조가 뜻을 펼쳐줬다 하지만 승자를 중시하는 역사의 속성 때문에 정신이상자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형벌 중 하나가 두 번 죽이는 것이라 했다. 살아서 죽이고, 죽은 뒤에 또 죽이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사도세자도 그것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에 대한 견해와 달리 과연 한중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까?
한중록의 내용 속으로 들어가보자
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가 지은 회고록. 모두 4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작자의 회갑해에 쓰여졌고,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 1) ∼ 1805(순조 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 한문본 ·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 한듕록’·‘한듕만록’·‘읍혈록’ 등의 이칭이 있다. 4편의 종합본은 〈한듕록〉·〈한듕만록〉의 두 계통뿐이다.
제1편에서 혜경궁은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의 추억, 9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에서부터 이듬해 입궁하여 이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하고 있다. 중도에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할 수 없다 하여 의식적으로 사건의 핵심을 회피한다. 그 대신 자신의 외로운 모습과 장례 후 시아버지 영조와 처음 만나는 극적인 장면의 이야기로 비약한다. 후반부에는 정적(政敵)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 편은 화성행궁에서 열린 자신의 회갑연에서 만난 지친들의 이야기로 끝난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 1년 5월 29일 동생 홍낙임( 洪樂任 )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제2편에서 혜경궁은 슬픔을 억누르고 시누이 화완옹주의 이야기를 서두로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이 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또 친정 멸문의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洪麟漢事件)의 배후에는 홍국영( 洪國榮 )의 개인적인 원한풀이가 보태졌다고 하면서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가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는 날을 꼭 생전에 볼 수 있도록 하늘에 축원하며 끝맺는다.
제3편은 제2편의 이듬해에 쓰여진 것으로 주제 역시 동일하다. 혜경궁은 하늘에 빌던 소극성에서 벗어나 13세의 어린 손자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가 어머니에게 얼마나 효성이 지극하였는지, 또 말년에는 외가에 대하여 많이 뉘우치고 갑자년에는 왕년에 외가에 내렸던 처분을 풀어주마고 언약하였다는 이야기를 기술하며 그 증거로 생전에 정조와 주고받은 대화를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 제4편에서는 사도세자가 당한 참변의 진상을 폭로한다. ‘ 을축 4월 일 ’ 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을축년은 순조 5년 정순왕후 ( 貞純王后 )가 돌아간 해이다. “ 임술년에 초잡아 두었으나 미처 뵈지 못하였더니 조상의 어떤 일을 자손이 모르는 것이 망극한 일 ” 이라는 서문이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왕조의 나인이라 위세가 등등하였던 동궁나인(東宮內人)들과 세자 생모인 영빈(暎嬪)과의 불화로 영조의 발길이 동궁에서 멀어졌다. 때마침 영조가 병적으로 사랑하였던 화평옹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조는 비탄으로 실의에 빠져 세자에게 더욱 무관심해졌다. 세자는 그 사이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놀이를 즐겼다.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代理)를 시켰으나 성격차로 인하여 점점 더 세자를 미워하게 되었다.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마침내는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762년(영조 38)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9일 만에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 혜경궁은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홍봉한( 洪鳳漢 )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임오화변 이후 종래의 노소당파가 그 찬반을 놓고 시파 ( 時派 )와 벽파 ( 僻派 )로 갈라져서 세자에 동정하는 시파들이 홍봉한을 공격하며 뒤주의 착상을 그가 제공하였다고 모함하였기 때문이다. 작자는 양쪽 의론이 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면서 “ 이 말하는 놈은 영조께 충절인가 세자께 충절인가. ” 라며 분노한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에 친정 조카에게 내린 순수한 회고록이다. 나머지 세 편은 순조에게 보일 목적으로 친정의 억울한 죄명을 자세히 파헤친 일종의 해명서이다. 그 골자가 되는 세 사건은 영조 46년(1770)에서 정조 2년(1778) 사이에 왕비(貞純王后)의 친정 경주 김씨와 전 세자빈의 친정 풍산 홍씨의 정권다툼으로 작자의 아버지와 아들이 화를 당한 일을 말한다. 즉, 한유(韓鍮)의 상소로 아버지 홍봉한이 실각하고, 삼촌 홍인한과 동생 홍낙임이 사사되는 원인이 된 정조초, 이른바 정유역변의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해명한 것이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홍봉한 배후설이다.
홍봉한은 당시 좌의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도의적인 책임을 넘어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까지 받았다. 제4편에서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宮中 煉 史)의 내막을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공주의 후예로 명문가인 친정이 자기 때문에 망하였다는 죄책감으로 71세 노령에도 무서운 집념으로 써낸 것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그가 비빈(妃嬪)이라는 사실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가 된다.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다.
〈 한중록 〉 은 소설로 볼 수 있을 만큼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치렁치렁한 문체는 옛 귀인 ( 貴人 )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전통사회의 규범적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이 작품은 우리 고전문학의 백미라 일컬어진다.
≪ 참고문헌 ≫ 한듕록(金東旭 · 李秉岐, 民衆書館, 1961), 朝鮮朝女流文學의 연구(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8), 閑中錄연구(金用淑, 한국연구원, 1983), 煉 藏 <출처 ;민시련>
단순히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썼던 것이지만 그 정쟁의 중심에 있었고 사건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가문과 정파 그리고 아들을 지키려는 모정 그 복잡함 속에서 다시 재조명 되어야할 부분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역사적 사료로서의 한중록과 문학적 가치로서의 한중록 둘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자산이므로...
한중록을 그냥 궁중문학이나 여류문학에 국한 시킬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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