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경기 보려고 결근한 친구의 핑계

2010. 2. 25. 01:13스포츠 인사이드

오늘은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시작된 이래 가장 기쁜 날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팅 5000m에서 은메달을 땄던 이승훈 선수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여자 쇼트프로그램에 출전한 김연아 선수가 역대 최고점수인 78.50점을 받으며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새벽 4시부터 TV 중계를 보기 시작한 것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 까지 이승훈의 금메달 소식에 열광했다.
아내는 작은 가게를 혼자 운영해 좀 늦게 나가도 상관없지만 출근 시간을 지켜야 하는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왜냐하면 사무실 운영규칙을 정해놓은 것이 있는데 그중 결석이나 지각을 하면 그날 점심값과 함께 일주일간 청소를 하기로 약조했기 때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아내와 함께 출근을 서둘렀다.
차에 올라 가게로 향하면서 아내가 물었다.
"사무실에는 TV가 있어?"
"응"
"부럽다....나는 어딜 가서 김연아 경기를 봐야하나...."
"문닫고 옆집에 가서 봐..."
"볼 곳이 없어...요즘 장사가 안되다 보니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아 버렸어.."

6년전인가 TV가 고장나면서 독서에 맛을 들린 아내는 어느덧 독서광이 되었는데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경기가 있을 때면 가게에 TV가 없는 것을 아쉬워 하곤 했다.
특히 오늘처럼 전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김연아 선수의 경기가 열리는 것을 볼 수 없다면 그 심정이 오죽하랴....
"당신 사무실로 보러 갈까?"
"사무실에 TV가 있지만 낡고 오래된 것이라서 잘 나오지 않아...더군다나 평면도 아니고 14인치 볼록 브라운관인데 화질이 엉망이야..."
"그래도 그게 어디야...시골에는 SBS 방송이 나오지 않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곳이 많데...."
"아무튼 김연아 경기를 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어..."



아내를 내려주고 서둘러 주차를 하고 허겁지겁 사무실로 뛰어들어 갔는데 이게 왠일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인가 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마치 미리 입을 맞춘 듯 감기 몸살이라 출근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
"참나 핑계를 대려면 표시가 나지 않게 하던지 아니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지...."
아마도 스포츠 마니아에 김연아 광팬인 두 친구 모두 새벽 4시부터 중계를 보느라 잠을 못잤으니 이참에 편안하게 김연아 경기를 보려는 속셈 같았다.

할 수 없이 혼자 사무실을 지키며 지지거리는 TV를 틀었다.
각 그릅의 쇼트프로그램 출전 선수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오전 10시37분경 9번째 선수로 곽민정 선수가 출전했다.
예전보다 일취월장한 솜씨로 연기를 펼치는 동안 곽민정 선수의 몸짓 하나 하나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다행히 아무 실수없이 프로그램을 끝냈고 기술점수 31.49, 예술점수 21.76을 얻어 합계 53.16점을 받아 같은 그룹에서 2위에 랭크되었다.

그런데 보는 내내 싸락눈이 내리듯 가물가물하는 TV화면 때문에 피겨스케이팅 고유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깨끗한 고화질의 HD TV를 보다 낡고 작은 구닥다리 볼록 TV를 보려니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점심식사로 시킨 짬뽕 한 그릇을 후다닥 해치우고 외출중 표지를 붙여놓고 집으로 달려갔다.
'김연아 경기만 보고 빨리 사무실로 돌아와야지....'
그리곤 마침내 김연아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아사다 마오 선수가 아무 실수없이 연기를 마치고 73.78점을 받자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구경하는 내가 이렇게 숨이 막힌데 바로 뒤에서 경기를 펼치는 김연아 선수는 얼마나 마음이 긴장될까.....'
앞뒤로 일본 선수가 포진해 더욱 긴장할만도 한데 경기를 시작한 김연아 선수는 물흐르듯 경기를 펼쳐 나갔다.
007 영화음악에 맞춰 우아하고 절도있는 스케이팅을 보여준 김연아는 또 다시 자신의 최고점수를 경신하며 78.50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방송에서는 계속 한국선수들의 선전 소식을 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승훈 선수의 금메달 소식과 곽민정 선수의 선전 그리고 김연아 선수의 멋진 경기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새벽부터 오후까지 동계올림픽 때문에 열광했던 하루....
본의 아니게 하루 업무가 마비되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최고였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