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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참전용사 아버지 77세에 명예수당을 받은 사연.

2008. 6. 7. 11:19세상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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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6.25참전 용사였다. 올해 팔순이 되신 아버지는 3년전 부터 참전용사 명예수당을 받게 되었는데 그 사연이 참 기막히다. 6.25가 발발할 때 스무 살이었던 아버지는 강원도 후방부대에 근무중이었는데 국군이 속수무책으로 밀리면서 퇴각하다 후방부대 저지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팔과 가슴부근에 관통상을 당하여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인지 가슴을 비켜간 총알은 팔의 안쪽 흔히 알통이라는 곳 아래를 치고 나가 그곳에서 두달여간 치료를 받고 다시 귀대명령을 받았는데 소속부대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수 없었다고 한다.
일주일 뒤 새로운 곳으로 배치되었는데 그곳으로 가다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일반인들과 함께 끈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가는데 사람들이 모두 북한으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수근거렸다고 한다.
고향에 홀어머니 혼자 계시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아버지는 상황을 봐서 탈출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고 한다.
밧줄에 묶여있다고는 하나 워낙 붙잡힌 사람은 많고 인솔하는 북한군은 많지 않아 밧줄만 풀면 언제든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면서 앞선 사람과 함께 탈출하기로 하고 틈만나면 서로 뒤돌아서서 서로의 밧줄을 풀으려 노력했고 마침내 밧줄을 푼 두 사람은 야밤을 이용해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도처에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어 밤을 이용해서 할머니가 살고 계신 고향으로 가는데 풀뿌리를 캐어먹으면서 고생끝에 할머니를 만날수 있었다고 한다.
외딴 산중에 있던 아버지의 집은 전쟁중에도 조용했고 사람도 별로 찾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피난도 가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고 계셨는데  상황이 좋아질때 까지 집에 숨어있으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중에 UN군의 참전으로 다시 부대로 귀속한 후 휴전때 까지 후방지원부대에서 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45년후 아버지는 65세 부터 참전용사 명예수당이 지급된다는 소식에 보훈처에 있던 아버지 동창분에게 믿고 맡겼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참전용사를 확인할 수 없어 명예수당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농사일도 바쁘고 보훈처에 가는 것도 멀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친구니 어련히 알아서 해주겠거니 했는데.....
전화를 하면
"응 내가 계속 알아보고 있어 서류를 챙겨서 올려보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네......"
라면서 시간만 흘려보냈다고 한다.
명예수당도 수당이지만 참전용사인데 참전용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화가 났었다고 했다.
친구분은 병원에도 치료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계속 알아본다는 것이 10년이 훌쩍 넘어버렸다고 한다.
농사일이 바쁜 아버지는 그 후 아예 포기하셨고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와서 아버지가 문상을 갔는데 그곳에서 다른 친구분이 들려준 얘기는 아버지를 너무나 화가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동안 아버지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의 명예수당도 10년이 넘도록 몰래 받아서 썼다는 것이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발등 찍힌 꼴이 되어버렸다며 그렇다고 죽은 친구에게 죄를 물을 수도 없지 않나며 혀를 차셨다.
마침내 77세에 아버지의 집에는 문패처럼 참전용사의 집이라는 명패가 붙었고 명예수당 8만원도 받게 되었다.
담뱃값 밖에 안되는 돈이지만 아버지에게는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그야말로 벼룩의 간을 내어 먹은 그분을 생각하며 아버지는 오죽하면 그랬으랴 하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6월 보훈의 날에 작년에 갑자기 어미니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아버지 생각을 하다 아버지에게 들은 사연을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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